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

by ysong 2021. 7. 14.

미가 6:2절

미가서의 분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을 듣지 않는 지도자들을 제쳐놓고, 그나마 소망이 있는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미가에게 대상을 바꿔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악한 지도자들에게 속지 않고,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속아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과 비슷할까요? 만가대의 군밤장사에게 낙인 일이 있습니다. 의정부에 일을 보고 만가대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군밤장사가 신호를 대기하고 있는 차의 창문을 두드리면서 군밤을 1,2개씩 시식용으로 줬습니다. 저와 사모도 받아서 먹었습니다. 금방 구운 군밤이어서 따끈따끈 정말 맛이 있었습니다. 그런 밤을 팔 것이라는 생각에 5천원을 주고 한 봉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신호가 바뀌어서 차는 출발을 했고, 봉지에 들어 있는 군밤을 하나를 까서 먹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낚였구나. 따끈따끈한 군밤이 아니라 구운지 오래된 색이 약간 퇴색된 군밤이었습니다. 아주 형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시식용과는 전혀 딴판의 군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속으로 탐욕과 악으로 가득하면서 겉으로는 훌륭한 지도자처럼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말라는 겁니다. 그래서 미가는 그들의 악함과 죄악을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여 믿는 자를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알고 있는 말씀의 잣대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미가서는 이런 의미에서 참 중요한 성경책입니다.

 

또 한가지 미가서를 알기 위해서는 미가,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가 동시대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외치는 공통된 메시지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난주에 남유다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봤습니다. 이런 지도자들의 죄악이 지속되면 어떤 사회가 되는 줄 아십니까?

 

의인이 없는 사회는 사회가 됩니다.

72절 이하에서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2~4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했습니다.

 

입법, 행정, 사법부, 종교인들이 다 타락해서 다 한 통속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울타리보다 더하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울타리보다 더하다는 것입니다. 의인이 없다는 겁니다. 선한 사람이 땅에서 완전히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지도자들은 권력이 이용해서 뇌물을 받으면 안됩니다. 출애굽기 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직자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요즘 뉴스를 보면 고위직에 올랐다가 뇌물을 받은 것이 들통이 나서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그 자리까지 가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을까요? 학생시절에는 잠을 설치며 공부했을 것이고, 좋은 대학에, 높은 점수로 그 자리까지 갈려고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대기업은 하청 중소기업으로부터 활동비 명목으로 접대를 받지만 사실 그것은 뇌물입니다.

사실 공무원들, 직장인은 월급이 많지 않습니다. 검사들도 월급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꾸만 다른데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 남편들이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내들이 잘해야 합니다. 타락한 시대를 보면 아내들이 남편들에게 더 많은 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모스 4:1 “사마리아의 산에 있는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힘 없는 자를 학대하며 가난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

 

남편이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봉급을 타 왔는데, 쥐꼬리만 한 월급 운운합니다. 잘나가는 친구의 남편과 비교합니다. 그러면 뇌물을 받을 기회가 생기면 바가지를 글어대는 아내의 얼굴이 떠올라서 실수를 하게 됩니다. 남양주 성실교회 성도들은 수고했다고 칭찬하고, 자족하는 아내들이 많길 바랍니다.

 

뇌물을 받고, 의인이 없는 사회가 지속되면 서로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됩니다. 7:5~6. 가정이 파괴된 사회가 됩니다. 마치 사장이 회사를 잘못 운영하면 직원들은 월급도 못받고, 퇴직하게 됩니다. 가장이 바람을 피우고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심판의 시작은 지도자들의 죄악이었습니다. 그 죄악이 지속되면 의인이 없어지고(착하게 살면 손해본다, 법을 지키면 바보이다), 서로를 신로하지 못하는 사회가 되고, 가정이 파괴된다는 겁니다.

 

미가가 타락한 지도자와 사회를 보시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 미가의 탄식이 바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탄식하면서 하나님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회복의 약속

선지서들의 패턴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판과 구원입니다. 심판하시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는 목적이 심판이 아닙니다. 회복에 대한 소망입니다. 심판에 직면해 있으니까 회개하라고 하는데 회개하지 않으니까 예고처럼 심판이 임합니다. 그러니까 끝장이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징계에 불과합니다. 최종목적은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꿈꾸시는 세상, 사회, 인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꿈꾸시는 사회는 어떤 상태일까요?

6:8절입니다. 공의-법을 지키는 나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유익을 주면서 살아가라는 겁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는 것은 밥먹듯 하면서 예배를 한번도 안 빠지는 사람처럼 살지 말라는 겁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잘 모릅니다. 제가 목사이니까 목사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죄를 짓고 감옥에 있다가 최근에 나오면서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돌려 보내셨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이 분은 교회의 재정을 마음대로 살다가 사회법에 따라 형을 사신분입니다. 이 목사님이 예수 이름 때문에 고문 받고 나왔습니까? 오지에 선교 나가서 핍박받고 귀국했습니까? 정문으로 나오지 못하고 옆으로 나왔습니다. 겨우 사회적인 죄 값을 치룬 겁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의 문을 막았습니까? 자숙하고 회개해야지...그게 왜 하나님의 승리인가? 이런 때 하나님을 이름을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인들 중에 고난을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 때문에 미움을 받으면서 마치 고난을 받는다고 착각하는 겁니다.

 

아침에 집을 나가는 가족은 가정의 대표선수들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가는 신자들은 거룩한 자들...성도라고 부르는 대표선수들입니다. 나 때문에 하나님 얼굴에 먹칠하지 말자, 그리고 함부로 하나님의 뜻을 운운하지 말라야 합니다.

 

학생들이 컨닝을 해서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성적이 올랐습니다. 그 사실을 담임선생님은 모르고 친구들은 알았다고 해요. 그렇다면 친구들에게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그 친구들에게 교회가자고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너나 잘해”, “너나 똑바로 살아라고 합니다.

 

육상시합에서 부정출발을 했습니다. 심판은 몰라서 1등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있었던 관중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런 상황에서 1등한 사람이 진짜 기독교인이라면 심판에게 가서 제가 부정출발을 했습니다라고 밝혀야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공의로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공의를 바탕으로 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공의만 있으면, 우리 주변에 철저히 법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법 이상 사랑이 있어야 다른 사람에게 넉넉히 베풀어 주고,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회를 하나님이 꿈꾸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그 사회의 사람들이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면서 더불어 사는 모습을 그토록 원하십니다.

 

우리는 비슷한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아모스 5:21~24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하나님이 원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진실로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입니까? 부자와 권력자들이 행복한 자들입니까?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참으로 행복한 자는, 참으로 성공적인 삶을 사는 자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앞에 두려워할 것이 없는 자입니다. 땀 흘려 일 할 곳이 있고,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가면 따스한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는 자입니다. 하늘을 가릴 집이 있으면 족할 줄 아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이미 행복한 사람입니다.

참목자

그렇다면 이런 참행복, 참평화는 어떻게 이뤄집니까?

참목자가 오시면 가능합니다. 4:3 평화의 나라,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는 나라입니다. 로마는 말과 말발굽으로 통치했지만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죽음으로 칼을 이기신 예수님, 참목자가 오실 때 참된 평화가 옵니다. 성도 여러분이 참목자인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참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회심 이전에는 남에게 해악을 끼치고, 남들로부터 해악을 당하면 용납하고자 하지 않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면 해악을 입어도 참아내고, 그 누구에게도 해악을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복음에 붙들리면 사람들은 화평한 자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평화의 왕이 어디서 때어납니까?

미가는 5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했습니다. 마태복음 2:1~6/ 아는 것과 믿는 것은 다름. 능력은 믿는 것에서 나옴.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지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시겠습니까? 이 믿음은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9:25~26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방법은 지혜 있는 자를 헷갈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보통 지혜자들의 생각이라면 메시아는 화려한 가문, 강력한 나라, 왕족으로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메시아의 왕국을 이루는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목자는 어디에서 나오느냐? 저 시골 동네, 유다 땅 베들레헴 에브라다! 시골 조그마한 동네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 에브라다 시골 조그마한 동네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동네는 얼마나 작았던지, 앗수르 제국의 침략 당시 미가서 110-15절에 기록된 유다의 주요 방어 거점에도 속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여호수아 1521-63절에 기록된 유다 지파의 100여 개의 성읍들 이름 가운데조차 끼어들지 못할 정도였던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베들레헴은 당시의 행정 구역 단위를 이루기 위한 최소한의 인구인 1000명도 채 못 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이런 작은 동네에 이스라엘 전체를 이끌고 나라를 살려낼 만한 구세주가 나온다는 것은 거의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 미가서가 기록될 당시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는 북쪽의 앗수르 제국의 침략 위협으로 인하여 국가의 존폐가 크게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국가안보의 위기 상황 때문에 모든 백성들은 그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진짜 능력이 있는 왕의 출현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바로 그런 새 통치자가 태어날 곳이 그 유다의 한 조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새 왕은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고 있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구세주가 될 것이라고 미가 선지자는 또한 예언했습니다.

그분은 그저 사람들의 정치적, 경제적 욕구만을 채워 주는 세속적인 군주가 결코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려주고자 하시는 그 위대하신 구속사역을 받들어 섬기고자 오실 구세주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미가가 예언한지 700년 후에 참평화는 참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리는 것은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 예언이 성취되었듯이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도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 땅에 오신 참목자이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1~15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참목자되신 예수님은 너희들은 가라라고 명령하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앞서가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마치 전장에서 앞서가는 지휘관이 부하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분을 위해 따르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거짓목자들이 참목자로 가장하여 사람들을 죽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목자와 거짓목자를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습니까? 참목자인 줄 알고 쫓아갔는데 거짓목자이면 어떻게 합니까?

 

참목자와 거짓목자의 구분은 겉과 속이 같으나, 같지 않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거짓목자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지만 참목자는 자기 목숨을 내놓습니다.

 

7;16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거짓목자는 자신을 위해 일을 합니다. 거짓목자는 겉은 양의 모양이지만 속은 세속으로 가득한 사람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미사어구를 사용하지만 속마음은 악취가 나는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짓목자가 많은 사회가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의인이 없는 사회가 됩니다. 참목자이신 예수님은 양을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먼저 가정에서, 먼저 교회에서 이 공동체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사실 섬김이 가능한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섬기려고 왔다고 했죠. 요즘 말로 사장님이 부하직원을 위해 커피를 타는 겁니다. 사장님이 먼저 출근해서 청소를 하고 업무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정에서는 가능합니다. 아버지가 예쁜 딸을 위해 무엇을 해 달라고하면 자존심을 구기면서 해 줍니다. 예쁜 딸이 화를 내도 참고, 견딥니다. 죽을 때까지 자녀들을 섬깁니다. 자녀들은 자기 편한대로 합니다. 그러면서 너희들도 결혼을 해서 너하고 똑같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라고 합니다.

 

기정에서부터 참평화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성숙한 신앙인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고, 그럴 수 있지라고 인정하는 겁니다.

 

이 모든일이 가능한 것은 참목자이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날 때 가능합니다. 미가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로 오신 이 예수. 우리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기로 순종하신 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만 신뢰하라  (0) 2021.08.28
멸망과 극복 사이  (0) 2021.08.03
듣는 훈련  (0) 2021.06.28
“너마저 타락하다니”  (0) 2021.06.10
정의를 물 같이 흐르게 하라  (0) 2021.05.0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