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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정의를 물 같이 흐르게 하라

by ysong 2021. 5. 1.

아모스 8:11~12절

몇년 전 심판의 오심으로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사건이 있습니다. 프로야구 경기에서 심판의 오심에 대해서, 태권도 시합에서 오심을 참지 못해 자살한 어느 선수 아버지의 사건이었습니다. 일련의 사건에 흥분하는 것은 최소한 스포츠에서는 정직과 공의가 통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스포츠든, 교육, 교회와 같이 공의와 정직이 꼭 있어야 할 곳이 있습니다. 몇년전부터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유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대학입학만을 강조하지, 인생을 어떻게 공의와 정직하게 살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었다고 합니다. 이유는 교회를 다니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쳤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공의로운 삶인가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쉽게도 우리사회 곳곳에서 공의와 정직에 대한 불감증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고 봅니다. 정직과 공의가 기반이 되어야 하는 공직사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사회단체나 재야단체에서도 이 단어를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봅니다.

 

아모스서를 통해 보여 지는 당시의 이스라엘사회가 오늘 우리 한국사회와 너무나 비슷합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갑작스러운 부를 누리면서, 모든 가치의 척도가 돈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가치에 대한 평가도 돈이었습니다. 이런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설교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고 계신지를 아모스 선지자의 설교를 통해 들으시길 바랍니다.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선포하는 아모스의 설교를 듣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아모스라는 인물

우리는 성경을 입체적으로 보고 있는데요, 열왕기에 기록된 엘리야와 엘리사, 예언서를 기록한 요나, 호세아, 아모스, 요엘, 미가, 이사야가 성경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들은 전혀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는 겁니다.

 

엘리야와 요나 선지자는 아마도 60년 정도 차이가 난다고 본다면, 전혀 모를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고 보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을 기록한 아모스나 호세아도 엘리야하고 길게 7~80, 엘리사와는 4~50년 차이가 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놓치면 안 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와 엘리사를 보냈는데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요나를 앗수르에 보내서 선교를 했는데,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모스라는 남한의 사람을 북한에 보내봅니다. 그들이 돌아오기를 바라면서요. 결과는 아모스서를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모스는 어떤 사람인가 볼까요? 아모스서 1:1절에 보면 유다와 웃시야의 시대 곧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러보암의 시대 지진 전 이년에 드고아 목자 중 아모스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상으로 받은 말씀이라" 이렇게 시대를 밝히고 있습니다.

 

남유다는 웃시야가 왕으로 통치하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은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고 있던 시대라는 것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를 황금시대라고하면 남유다의 웃시야와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는 시대를 은의 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넓은 땅과 차지하고, 경제적인 풍요를 누린 사회였습니다. 이스라엘주변국에는 두 강대국이 있는데, 북쪽에는 앗수르와 남쪽에는 이집트가 내부적인 문제로 약해진 틈을 타서 이렇게 부강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때가 주전760년 경이었습니다. 지난주에 봤던 요엘선지자가 남유다에서 활동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800년 전에 활동하던 사람이 아모스였습니다.

 

그 때 남유다 드고아 출신이었던 아모스가 일어났는데, 드고아는 베들레헴 남쪽부근에 있던 시골이었습니다. 거기서 뽕나무를 치는 농부였던 아모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북이스라엘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남한의 유명한 학자가 북한에 올라가서 국제사회에 남한의 형편을 지적하면서 특강을 했다고 하면 관심이 많겠죠.

 

하지만 아모스는 처음부터 선지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브르길라와 아굴라와 같이 쓰임받은 평신도선교사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에 대한 이력은 7:10~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절은 아모스의 메시지입니다. 읽으면서 설명

아모스는 농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사용하실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는 농부지만 국제사회를 읽을 줄 알았고, 남북의 신앙과 사회문제를 파악하고 있는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이런 문제가 있어라고 하실 때 바로 알아듣고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었던 겁니다.

 

언제 쓰였을까요? 다시 1:1절입니다. 아모스는 아주 무서운 지진이 있었는데, 그 지진이 있기 전 이년에 활동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모스를 기록한 것은 지진 후죠. 먼저 선지자 활동을 하고 후에 기록했습니다. 오고 오는 후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 위해서 기록한 겁니다. 또한 지진이 있었다는 것은 아모스의 예언의 말씀을 듣지 않아서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셨구나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 아모스서의 구조

2절이 주제를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자처럼 부르짖고 계십니다. 그 내용이 죄인들에 대해 심판하시겠다는 겁니다. 아모스는 심판의 메시지로 가득합니다. 또한 하나님이 심판해야 하는지를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북한에 올라가서 예언을 하는데 먼저 주변국가에 대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1:3~2:5절까지의 말씀인데, 하나님 심판의 기준이 공의입니다. 일본,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가에 대한 심판의 기준의 공의라는 겁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들은 북이스라엘백성들은 손뼉을 치면서 좋아했을 겁니다.

 

그것도 잠시 2:6~9:10절까지 북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심판의 설교를 합니다. 얼마나 강한 메시지를 선포하는지 북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인 아마샤가 예언하지 못하도록 막을 정도였습니다.

 

아모스는 북이스라엘의 죄에 대해서 반복하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2:6~16절에서 죄를 지적하고, 다시 3~6장에서 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고, 7~9장은 5가지의 환상을 통해 반복하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반복하면서 선포하고 있습니다.

 

3. 사회

그렇다면 경제적인 풍요로운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기에 하나님이 사자처럼 부르짖으면서 심판하신다고 하셨을까요?

 

2:6~8절을 읽으면서 설명. 교인들이 하고 있는 모습니다.

 

여기 말씀을 보면 당시 사회가 극단의 물질주의, 향략주의로 흐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것처럼 이스라엘백성들도 은을 받고 의인을 팔았습니다.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에 팔아넘겼습니다. 한 사람의 가치가 고작 신발 한 켤레 값이었습니다. 또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다니면서 음란한 짓을 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에 성적 타락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 전당잡은 옷 위에 누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은 반드시 전당잡은 옷은 해가 지기 전에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옷은 낮에는 햇빛을 가려주지만, 밤에는 이불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빚을 갚든지 못갚든지 해가 지기 전에는 옷을 돌려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돌려주지 않고 전당잡은 옷위에 누웠다고 했습니다. 물질에 휘둘려서 하나님의 명령도 무시하고 제 멋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11~12절을 읽으면서 설명. 나실인은 하나님이 특별히 사용하기 위해 거룩하게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나실인까지도 어떻게 해서든지 유혹해서 타락시켰다는 것입니다. ‘너만 천국갈래 같이 지옥가자!’ 이러면서 착실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나실인까지 억지로 술을 마시게 해서 타락케 했다는 것입니다.

 

또 아모스39~10절 설명. 악과 죄의 대명사로 알려진 조폭과 창녀들에게 교회에서 하는 짓을 보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자신들보다 더 겁탈과 학대가 심하다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하나님이 이방족속들, 악의 대명사라 불리던 블레셋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스돗과 애굽사람들이 살고 있는 애굽의 궁궐들을 향해 외치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성안에서, 다시말해 지금 북이스라엘의 상류층들이 얼마나 못된 짓을 하고 있는지 너희가 가서 좀 보라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던 이웃나라 블레셋이나 애굽의 지도자들보다 훨씬 더 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와서 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시 사회지도층들은 그런 온갖 탈법을 해서 쌓은 돈을 가지고 무엇을 했습니까? 3: 15절입니다.

그들은 자기 집 짓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여름궁과 겨울궁을 지었습니다. 그 규모가 대단했습니다. 궁전을 무엇으로 만들었습니까? 상아로 지었습니다. 아프리카나 이집트에서 수입한 상아들로 말입니다.

 

부유층 부인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4:1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횡성의 부인들아~~남편의 권력을 이용해서 가난한 자를 착취합니다. 불법을 범해서라도 돈을 벌어오라고 하는 합니다. 자기 남편들을 부정부패하게 하고, 힘없고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게 하도록 자꾸 꼬드겼습니다. 여성이 타락하면 더 무섭습니다. 그 나라의 고위층의 귀부인들이 이렇게 되면 이제 그 나라는 소망이 없습니다.

 

지도자들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볼까요? 아모스서63~6. 무슨 말입니까? 저들은 날이 새는지 지는 지도 모르고 날마다 허구헌날 진탕 잔치를 열고 띵까띵까 먹고 마셨다는 것입니다. 상아침대에서 늦잠자고 일어나 기지게 켜고 비파에 맞춰 헛된 노래를 지절대고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셔댔습니다. 온갖 귀한 향수를 몸에 뿌리고 우유에 목욕하면서 쾌락을 즐겼습니다.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백성들은 얼마나 굶주리고 있는지 그것은 저들의 관심사가 아니었니다. 그저 하루하루 향략과 방탕한 삶이저들의 유일한 관심사였습니다. 정치인들, 관료들, 사회 지도층들이 이러했으니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제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아모스서84~6. 무슨 말입니까? 경제인들은 양심을 팔아먹고, 거짓저울로 속여서 부당이득을 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팔아서는 안되는 찌꺼기 밀까지도 팔아먹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원산지를 속여서 수입쇠고기를 한우로 둔갑시켜서 팔아먹고, 중국산 농산물을 국산으로 둔갑시켜서 팔아먹는 짓을 서슴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성도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는 시간에도 그들의 생각은 딴 곳에 가 있었습니다. 어서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빨리 안식일이 지나서 곡식을 팔아먹었으면.. 이런 생각밖에 할 줄 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리지만 생각은 콩밭에 가 있었으니, 저들이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기쁨이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저 아무런 정성이 담겨 있지 않는 형식적이고 의례적이고 습관적인 의식 뿐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정계, 재계, 관료계, 다 썩어 버렸습니다. 정치인들은 권력을 남용했고, 경제인들은 거짓저울로 속였습니다. 고위 공무원들과 그들의 아내들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다 부정부패하고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매일같이 예배드리는 성도들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사회가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살면서 그들은 어떤 종교행사를 하는지 아십니까? 대단한 종교심입니다. 4:4~5.

 

그래서 이들이 드리는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은 어떨까요? 5:21~2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이 드리는 모든 예배를 거부하겠다는 것입니다.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를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성회도 미워한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드리는 화목제물도 내가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너희들이 내 앞에서 노래도 부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듣기 싫다는 것입니다. 비파소리도 그치라고 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간단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7:21~22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랬더니 예수님의 대답은 23절에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아모스 당시 이스라엘백성이나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나 요즘 기독교인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류짜이푸교수 작년 쌍전이라는 책을 저술하고 천안문사태의 정신적인 지주로 알려지고 있는 분입니다. 현재 망명하여 미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가 중국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국가가 될 수 있지만 선진국은 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삼국지와 수호전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류교수는 삼국지가 보여주는 권모술수 숭배현상 및 수호전이 보여주는 폭력 숭배현상이다. 중국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크고 광범위하게 해악을 끼친 문학작품이 바로 이 두 경전이었다. 정말 두려운 것은 이들 작품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괴하며, 잠재의식을 변화시켜 중국의 민족적 성격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믿어서 부를 누리는 것처럼 말하지만 속으로는 권모술수와 폭력으로 가득한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 대해 아모스는이러한 상태를 무엇이라고 말하는 줄 아십니까? 영적인 기갈이라고 합니다. 8:11~12절입니다.

 

그들은 비록 물질의 풍요로움은 누리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영적인 주림이 심했습니다. 육신의 기갈이 아니라 하나님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 심했습니다. 아무리 동분서주해도 그 어디에서도 올바로 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를 짓고 있는지 조차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탄식하시고, 분노하시고, 눈물흘리시는지,.. 애타하시는지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저 형식적으로 예배드리고 세상에 빨리 나가 또 거짓말하고, 세상 탐욕에 휘둘리면서 시기하고 질투하고 모함하면서 사는 삶을 살기에 바빴습니다. 그리고 또 주일날 하나님 앞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5:24절입니다.

 

요즘 명목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데 삶의 현장에서는 정의와 공의를 잃어버린 채 욕망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욕망을 채우려는데 옆에 있는 동료로부터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면서 고통스럽다고 기도합니다. 그것은 의를 위한 핍박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고난을 받는 것이라고 간증도 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잘못된 신앙을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진짜 핍박은 정직하게 살려다가 힘든 경우를 만나게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진급이 늦어질 수 있고, 힘든 부서에서 일할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있으면 요동이 쳐져야 합니다. 부패한 부서가 정직한 부서로 바뀌어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신자 때문에, 속이는 저울이 정직한 저울로 바꿔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신자 때문에, 사치의 모임이 건전한 모임으로 바꿔야 합니다. 누구 때문에 신자 때문에 믿는 놈들 때문에 사회가 정직해지고 가정이 정직해지고 교회가 정직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받는 핍박이 진짜 핍박입니다. 이것이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요, 여기에 모든 신자들이 신앙의 열정을 불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아모스선지자가 이 시대를 향해 말씀을 선포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스라엘에서 외쳤던 그 말씀 그대로 선포하지 않을까요? 왜요 너무 닮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강같이 흐르게 하고 있습니까? 돌아봐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의 주변에서, 삶의 현장에서 정의가 물같이 흐르게 하고 있습니까?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주어진 권력으로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옆에 있는 동료를 이용하여 실적을 쌓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정의는 철학적인 단어가 아니라 실천을 위한 윤리입니다.

 

우리는 아모스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 공의와 정직하게 살면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은 완성해가는 것이 신자의 삶이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돌아보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아모스를 통해 깨닫는 것은 사랑과 공의가 조화를 이루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랑하지만 공의롭게, 공의롭지만 인색하지 않는 조화로운 신앙생활을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타락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 각자가 교회입니다. 의인이 없으면 망합니다. 여러분들이 의인이 아니면 이 나라는 망합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이 나라의 생사여부가 달려있고 주변나라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꼭 아모스를 통해 배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아모스의 역할을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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