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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너마저 타락하다니”

by ysong 2021. 6. 10.

열왕기하 15:1~5절

열왕기하 14장의 시대적인 배경으로 아모스와 호세아, 요엘서에 관한 설교를 들었습니다.

14장 끝에 아모스와 호세아, 요엘서 읽기라고 쓰시고요. 나중에 성경을 읽을 때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연대기순으로 성경을 읽어야, 성경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선지자들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인 제사장, 선지자, 왕이 잘못되면 나라전체가 위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선지자, 왕이 3박자 타락하면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소수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지만 거대한 타락의 물살을 막기에 역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은 안 해 봤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북이스라엘이나 남유다가 멸망할 것을 모르고 계셨을까요? 하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지자를 보내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만약 선지자도 보내지 않고, 회개의 기회도 주지도 않고,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께 뭐라고 할까요? 그래서 선지자를 보내도 안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보내는 겁니다. 안되는 이야기를 기록하여 인간이 얼마나 못됐는지, 성경을 통해서 배우라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남자들이 얼마나 교만한지, 여자들이 얼마나 사치한지 배우라는 겁니다. 이런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애가 탄지를 알라는 겁니다.

 

누가 타락했기 때문에 이렇게 선지자를 보내는 걸까요? 지도자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을 잘 지도할 지도가 그 역할과 책임을 다하지 못하니까 백성들도 타락하고, 하나님이 처음 부른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결과는 망하는 겁니다.

 

그들이 망한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요나, 호세아 아모스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끝내 그 사랑을 뿌리치고 제멋대로 가버렸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 내가 알아서 할께요라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에게 깨닫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수없이 주었습니다. 마치 부모들이 자식을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자식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강대국을 의지하다가, 우상을 의지하다가 멸망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 한다. 그래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있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데, 도대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내가 약속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내가 약속을 한 사이이고, 그 약속을 지켜야 함을 깨닫는 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입니다.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는 자를 인격자라고 합니다. 약속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자를 비인격자라고 합니다. 인격자는 약속을 중시합니다. 약속했으면 반드시 지킵니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약속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이것이 인격자입니다. 그러나 비인격자는 약속해놓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개나 소같은 짐승은 비인격자입니다. 왭니까? 짐승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언약, 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다윗언약, 새언약에 이르기까지 약속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셨지만 그들은 헌신짝 버리듯 버려버렸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선지자들을 보냈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독생자인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이 구약의 배경을 모르면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 사랑의 깊이를 피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위대한 사건이 얼마나 큰 사랑의 결과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약속이 성립됩니다. 예수님을 믿겠다고 결단하는 순간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약속이 성립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이제 사는 동안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그 대신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자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자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성경을 연대기적으로 읽으면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맺은 약속과 사랑의 이야기로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얼마나 약속을 신실하게 지켰는지, 사람들이 얼마나 약속을 어겼는지, 불순종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새삼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설교 들었던 북이스라엘 상황을 사랑과 약속이라는 의미로 정리했습니다.

 

남양주성실교회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보통교회에서 자주 듣는 예수 믿으면 잘살고 복된다는 말씀이 별로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도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딱딱하고 마치 성경공부 하는 것과 같이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명을 구하는 길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왜요? 북이스라엘이 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망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종교행사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몰랐는데 그것은 성경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이것이 바른 목회라고. 그리고 여러분은 바르게 가고 있다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아직도 한국교회 중에는 바르게 목회하려고 몸부림치는 교회가 있습니다.

 

저의 책임은 여러분들이 최종목적지인 천국에 가도록 잘 안내하는 겁니다. 예수 믿는 것이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이제 출발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도록 잘 가이드 하는 겁니다. 이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오늘은 남유다 왕 중에 아사랴(웃시야)와 요담왕 아하스왕을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맺은 언약을 지키기 위해 열심이었지만 남유다도 점점 타락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끔 신실한 왕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거대한 타락의 물살에 떠밀려갑니다.

왕들이 얼마만큼 타락해 가고 있는지,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통해 들어보려고 합니다. 다음주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활동했던 미가, 그 다음에는 히스기야왕, 그 배경으로 활동했던 이사야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1. 처음은 좋았지만 나중에 나병환자가 된 웃시야왕

한 명의 왕이 열왕기하에는 아사랴왕으로 불리고 있고, 역대가 26장에는 웃시야왕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마도 당시 활동했던 제사장이 아사랴이어서 왕과 구별하기 위해 웃시야왕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웃시야왕은 처음에는 정직했습니다. 15:3절입니다.

처음은 좋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처음은 좋았지만 나중에 안좋은 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 사울왕, 솔로몬왕, 웃시야왕, 가룟유다, 세상을 따라간 데마 등을 비롯하여 많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 감옥에서, 외롭게 마감하는 기업인, 정치인, 공무원들을 보게 됩니다. 처음보다는 나중이 좋아야 합니다. 찬양으로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웃시야는 산당만을 제거하지 못했을 뿐 처음은 좋았습니다. 당시 산당은 유다의 전통적인 병폐로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에 여로보암의 집안의 금송아지의 죄가 있었듯이, 유다에도 산당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 산당은 솔로몬이 세운 이래로 항상 유다에서 우상 숭배의 한 중심이 되어 있었습니다. 훌륭한 왕들도 산당을 폐하지 못했습니다.

 

산당에서 여러 신들을 모두 섬겼는데, 비록 산당에서 여호와를 섬겼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런 것으로 속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가나안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고 모방해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비록 자기들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린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크게 어기는 것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는 산당이 없을까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인간적인 열심, 자기만족적인 예배가 바로 오늘날의 산당은 아닐까요?

 

웃시야왕은 산당문제만 제외하고 정직한 왕이었다는 겁니다. 통치자는 정직해야하는데 합격점이라는 겁니다. 이런 정직으로 나라도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5절에 보면 갑자기 무슨 설명도 없이 하나님이 치셔서 나병환자가 됩니다. 4절과 5절의 과정에 대한 설명은 역대하26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26:16이하입니다. 16절을 볼까요. 강성해지니까 교만해서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장만이 들려야 하는 제사행사까지 직접 하려고 했다는 겁니다.

 

웃시야는 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의로 분향하려고 했습니까? 왕으로 강성하게 되니까 그게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권력 곧 세상의 힘에 도취되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절대 군주나 된 듯이 왕권으로 감히 침범치 못할 성전의 신성한 일까지 하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에서 완전히 어긋나는데도 제 자신이 분향을 드리고자 했습니다.

 

26:17절에 대제사장 아사랴가 제사장 80인이 하나님의 법을 들어 막으려고 경고했지만 오히려 왕권을 저항한다고 하여 화를 냅니다. 그러니까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 형벌을 즉석에서 내리시게 됩니다. 19절에 나병이 생긴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20절에 여호와가 치셨으므로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웃시야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서 일생동안 성소와 단절되고 가족 전부와 끊어지고 모든 사람들과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54세라는 한창 장년의 나이로 겨우 목숨만 유지한 채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웃시야는 권세와 영화와 힘의 정점에 서 있다가 하나님의 거룩한 권위를 무시한 죄로 일순간에 그만 추락하여 인생의 가장 낮은 곳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14년을 보내고 열왕들이 묻히는 묘소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묘실 곁에 있는 다른 땅에 장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경박하게 여기는 것은 큰 죄입니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주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웃시야는 영화의 정점에 올라갔다가 일순간에 인생의 바닥으로 전락해 버리는 이런 무서운 사실을 하나님께서 웃시야왕의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경고를 잘 깨달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병으로 뒷방으로 물러난 상태에서 대리통치지를 하다가 웃시야왕이 죽은 지 2~3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특별한 치적이 없이 정직하게 통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아들 아하스입니다. 20세 왕이 된 후 16년간 통치를 했는데 16:2절을 보면 처음부터 정직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나간 아하스라고 부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은 열왕기 17장뿐만 아니라 이사야 7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하스 당시에 아람(아람=수리아=시리아 수도는 다메섹=다마스쿠스)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왕 18대 베가왕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이는 아하스왕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니까 하나님이 보낸 겁니다.

 

그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이사야 7장에서 봐야 합니다. 연합군이 동맹하여 침략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성과 왕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흔들렸습니다. 사시나무 떨 듯이 떨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서 두 연합군은 절대로 이기지 못한다고 알려줬습니다. 이사야 7:4절입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멸망할 것이고 절대로 유다를 침략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불과하니까 그들의 음모는 성취되지 못한다고 알려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하스왕이 믿지 못하니까 아하스왕이 알 수 있는 징조를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아하스가 알고 있는 주변 사람 중에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이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이름을 짓는 것을 볼 것이라는 겁니다. 이 징조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렇게까지 아하스왕에게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사야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통해 전하는 말씀을 인간의 말로 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하스왕이 선택한 것은 북쪽의 강대국인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그는 도움을 청탁하기 위해 성전과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왕에게 조공으로 바쳤습니다. 왕하 16:7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탁을 받은 앗수르왕은 옳다거니 하면서 아람을 쳐서 정복합니다. 여기서 더 웃기는 사건이 벌어지는데요, 너무 고마운 마음에 아하스왕이 앗수르왕인 드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함락된 아람의 수도인 다메석으로 올라갑니다.

 

아하스왕이 다메섹에 올라가서 아람국가에 있는 제단을 봤습니다. 그 제단이 쾌 화려하고 종교적으로 보였나 봅니다. 제단의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서 대제사장인 우리야에게 보냈습니다.

그 양식과 구조를 본 우리야는 아하스왕이 유다로 돌아오기 전에 다메섹에서 보낸 양식대로 제단을 신축했습니다.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그들이 섬기는 신이 강해서 이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앗수르가 아람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면 어느 왕이 강합니까? 당연히 앗수르왕입니다.

 

보통 상식이 있으면 강한 나라의 신을 따르려고 합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패배한 아람의 신을 섬기기 위해 제단의 양식에 따라서 신축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여 거둔 성과를 놓고 좋아하는 아하스의 태도가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더 기막힌 것은 왕하 16: 16절에서처럼 우리야가 왕의 명령대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왕에 그 제사장입니다. 지도자인 모두 타락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앞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앞일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의지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애를 통해 무슨 일이 앞에 닥칠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처리해 주실 것을 믿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선지자가 와서 여호와만을 의지하여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고 가르쳤는데도 불구하고 괜찮겠지 이번 문제만 풀면 그 다음에는 별것 없겠지하고 제멋대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결론

지금도 우리들에게 웃시야, 아하스왕이 있습니다. 교만하여 말씀이 들리지 않고, 위기를 만나면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웃시야, 아하스왕을 닮았습니다. 설교를 통해, 말씀을 통해 세상은 부지깽이에 불과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청탁하기 바쁘고, 사람을 찾아다니기 바쁩니다.

 

보통 사람들은 강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당장에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많은 뇌물을 바치기 위해 성전을 훼손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보물들을 다 내라 해서 바치는 아하스왕과 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를 대상 28:21절에 별로 유익이 없었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용

웃시야왕이 처음에 정직하니까 복을 받았습니다. 그가 처음 사랑을 잃지 않는 지도자가 되었다면 더 큰 복을 누릴 수 있었을 겁니다.

또 아하스왕이 위기를 만났을 때 선지자의 말을 들었으면 물질을 낭비하지 않고 이방신을 섬기는 우스운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두 왕의 공통점은 교만입니다. 교만하면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고, 주변의 조언도 들지 않습니다. 이 상황에서 활동했던 선지자가 미가와 이사야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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