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34절~27:4절
26:34~35절은 에서의 결혼 이야기입니다.
에서가 결혼 할 때 이삭은 100세입니다.
그러나 에서의 결혼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에서가 가나안 땅의 여인을 둘이나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입니다.
27:46절을 보면 리브가가 얼마나 근심을 많이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는 신앙을 따라 고향을 떠나 낯선 가나안땅까지 와서 결혼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집안에서 성장한 에서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먼저 신앙의 가치관에 따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여인과 결혼을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을 우습게 여기고 멸시하는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판 장자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가볍게 여김으로 복을 걷어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장남이면서 축복을 받지 못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정에 에서와 같은 자녀들이 많습니다.
우리 모두의 기도제목입니다.
결혼사건은 27장의 사건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27장부터 이삭에게서 야곱에게로 카메라가 옮겨갑니다.
이삭의 축복으로 야곱의 인생이 본격적 시작됩니다.
이삭은 2~3장만에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졌지만 야곱은 오래 걸립니다.
야곱의 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누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었고 누가 안믿었나의 문제입니다.
이삭이 60세에 아이를 낳았고, 현재 137세이니까 약속을 받은 지 77년이 지난 후의 사건입니다. 창세기 47:9절를 기점으로 계산을 하면 나옵니다. 130세에서 야곱이 밧다아람에서 14년을 보냈을 때 요셉을 낳았으니까 14를 빼고, 요셉이 30살에 총리가 되었으니까 30을 빼고,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 2년째이니까 9년을 빼면 야곱의 나이가 77세입니다. 이삭이 야곱을 60세 낳았으니까 60을 더하면 이삭의 나이는 137세입니다.
27장에서는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이 다 실수를 합니다.
최종적으로 야곱이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해석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한 인간을 어떻게 바꿔 가시는 지를 볼 수 있습니다.
1절-이삭이 눈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은 131세 정도의 나이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34:28절을 보면 180세로 죽게 됩니다.
눈이 흐려졌다는 것은 육체적인 눈이면서 영적인 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죽을 때 눈이 흐리지 않고 쇠하지 않았습니다.
눈이 흐리면 오감이 흐려집니다.
에서를 축복하겠다는 것은 이삭이 눈이 흐려져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보여준 것입니다. 당시 자녀를 축복할 때는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일상적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에서만을 불러서 비밀이 진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이 축복이 목적이 아니라 별미를 먹고 싶은 게 목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3~4절의 축복을 해 주는데 별미를 왜 해오라고 했을까요?
사냥-7번, 별미-6번이 나오는 이삭이 사냥해서 만든 음식을 별미로 좋아했던 것입니다.
이삭은 소와 양이 많기 때문에 고기를 먹고 싶은 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습니다.
축복을 핑계로 사냥을 다녀오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 때문에 욕심 때문에 판단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이삭을 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도, 에서도 팥죽을 먹는 것으로, 이삭도 먹는 것으로 두 아들이 헤어지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콩가루 집안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집안 이야기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신앙의 수준이 달라서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지 전부터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리브가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이삭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리브가처럼 그대로 받는 것이 믿음인데, 이삭은 나름대로 변형시켰던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리브가가 내버려두면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셨을 것인데,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야곱이 간 순간부터 다시는 보지 못합니다.
리브가는 야곱이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주려는 것도 문제이만 리브가도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총명하고 지혜롭고 신앙도 좋았는데 하나님의 뜻을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집안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온전한 사람이 없습니다.
둘로 나눠져서 대립, 속고 속이는 집안을 통해 하나님은 끝까지 초지일관 뜻을 이뤄나가십니다.
부족하고 서로 갈등하고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일은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부족하면 온전케 해서 쓰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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