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4:6~10
신앙의 기본은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역사와 예언서를 연결하여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사의 현장에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를 알기 위해서입니다. 역사와 신앙은 같이 봐야 합니다.
우리는 오랜 신앙생활을 했어도, 하나님을 단편적인 면만을 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사랑의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소위 ‘편식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남양주성실교회는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데 힘쓰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가 활동하는 시대를 구분하면 3시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시대에 엘리야와 엘리사, 여로보암2세와 웃시야시대인데 다윗이후 가장 번성하고 잘 살던 시대입니다. 이때 북=요나, 호세아, 아모스. 남=이사야, 미가선지자가 활동했습니다.(왕하15~20장) 그리고 마지막 유다의 멸망의 시기에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선지자가 동시대에 다양한 환경 속에서 말씀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남유다, 북이스라엘이 다윗 이후 가장 잘 살게 되었을 때, 선지자가 가장 많이 활동을 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 썩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호세아와 아모스선지자는 우리시대에 비교할 때 꼭 필요한 말씀들을 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도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또 모든 국민들이 경제적인 풍요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였습니까? 경제대통령을 뽑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시대는 더 악해지고 있습니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나 강해지고 거칠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는지를 보면서 이 시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1. 동시대에 활동했던 선지자
15:8(스가랴-8개월)-15: 10,13절 샬롬(한달)-17절 므나헴(10년)-23절 브가히야(2년)-27 베가(20년)-17:1 호세아(9년)
요아스-아마샤-웃시야-아하스-히스기야
예언자들이 이 시대에 활동했던 것을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호세아 1:1, 아모스1:1// 이사야 1:1, 미가 1:1 이 말씀을 통해 이들이 동시대에 살고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외치고 있는 말씀이 같다는 사실도 발견하게 됩니다. 왕, 제사장, 거짓선지들, 백성들의 회개와 심판이었습니다. 돌아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당시 거짓선지자는 평안과 풍요만을 외쳤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호세아서의 구분
호세아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백성들을 끝까지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사실을 불행한 결혼생활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불행한 호세아의 결혼생활이 1~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4~14장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마치 신앙 간증을 하듯이 오랜 세월동안 말씀을 전한 내용입니다. 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이 결혼관계를 깨기 때문에 망하게 되는데, 앗수르에 멸망한 이후 다시 회복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교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3. 호세아의 결혼생활
호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이상한 명령을 받았습니다. 1장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했습니다.
호세아에게 행실이 좋지 못한 여성을 아내로 맞이해서 자식을 낳으라는 것입니다. 500명 정도 사는 동네에서 행실이 나쁜 것은 금방 소문이 납니다. 고멜이라는 처녀는 행실이 좋지 않다는 것을 동네사람들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그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는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거룩한 사람입니다.
아니 왜 이렇게 이상한 명령을 하십니까? 그 이유는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혼관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속내가 담겨 있습니다. ‘호세아 너도 나처럼 아내로 인해 속을 좀 썩어봐라. 그래야 이스라엘백성으로 인해 속을 썩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거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이 언제 결혼했습니까? 시내산에서 결혼식이 거행됐습니다. “너는 내 백성되고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서약을 했습니다.
여러분 혼인서약서를 어디에 있습니까? 결혼 이후에 다시 본 적이 있습니까? 부모싸움을 하고 이혼직전에 이르게 될 때, 결혼서약서를 보라고 조언도 합니다. 보통 결혼서약서는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아내를 삼고 어느 때, 어디서, 어떤 일 곧 기쁜 때나 슬픈 때나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부요 하거나 궁핍하게 되는 모든 경우에서 아내만을(남편만을) 사랑하고 존중히 여기며 도와주고 보호하며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키기로 사역합니다.” 이 서약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이혼을 하지 않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경건하게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이후 거의 600년여 년 동안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다른 음란한 행동을 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면서 풍요와 다산만을 추구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다른 신도 섬기는 양다리를 걸쳤습니다. 결혼한 사람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을 보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시되 쉬지 않고 보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선포해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이 푹푹 썩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을 또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의 심정을 호세아야! 너도 좀 경험해보고 그 심정을 전해주라는 것이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과 딸, 이렇게 세 자녀들을 낳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 고멜이 가정을 지키지 않고 자녀들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호세아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고멜은 집에 없었습니다. 토끼같은 예쁜 애들을 놔두고 집을 나가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가 아내를 찾으러 백방으로 다니면서 찾으면, 어느 놈팽이 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좋게 타일러서 데려와서 집에 앉혀 놓으면 어느새 집을 나가 또 다른 놈하고 눈이 맞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호세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여자를 언제까지 용서하고 살아야 하나? 이제 도저히 안되겠다.’ 열불이 나서 포기하려고 할 때, 호세아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호세아3장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는 또 가서”라는 말씀입니다. 벌써 한 두 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또 가정을 팽개치고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포기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사랑하는 것처럼 너도 가서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는 것입니다.
할수없이 호세아가 고멜을 수소문해서 찾아가 보니 이번에도 어떤 놈팽이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놈이 아내를 찾으러 왔다고 하니까 눈을 불을 부라리면서 까불지 말고 조용히 가라고 합니다. 정 아내를 데려가고 싶으면 돈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2절입니다. 자기 것을 찾아오는데 값을 지불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지금 위자료를 받아도 시원찮을 판에 불륜을 저지른 자기 아내를 찾아오는데 돈을 내라니요. 눈에 불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참으로 기막힌 상황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이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억울하고, 분통터지고, 한심하기도 하고, 또 아이들이 안쓰럽고 여러 가지 심정이 복잡하고 착잡했을 것입니다. 마음같았으면 이 연놈들을 때려죽이고 싶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을 생각하면 그러지도 못하고,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그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습니다.
그 흘러내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고멜을 데리고 나서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던 것입니다. “이제 내 심정을 알겠니? 내가 그토록 사랑을 쏟아부었는데, 사명감당하기는 커녕 여전히 우상을 섬기면서 내 규례와 법도를 따르지 않는 이스라엘백성들을 향한 내 마음, 내 심정을 이제야 알겠느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첫사랑인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명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이 그들을 때렸다가 또 고치시고, 또 용서하시고 또다시 사랑하시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통해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버릴 수도 없고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애타시는 심정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멜을 값을 지불하고 데려오는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서 값을 치른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것을 찾기 위해 값을 지불하십니다. 예수님을 십자가게 죽게 하셨습니다. 늘 죄를 짓고, 이기적인 욕심에 이끌려서 음행을 일삼을 우리들을 포기하지 않고 데려오고, 또 데려오고, 또 데려오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로소 호세아는 평생동안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한시도 잊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열불나는 심정을 한번도 잊지 않았습니다. 바람피우는 남편을 데려와서 살아야 하는 아내의 심정을 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속 터지는 마음을 알 겁니다. 우리를 행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4. 호세아의 자녀
호세아서1장을 보면 하나님은 호세아의 자녀들의 이름을 통해 이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호세아서는 자녀들의 이름의 의미를 명확하게 알면 호세아를 통해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녀들의 이름 셋을 연결해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배반한 결과 그들이 겪어야 하는 징계와 심판의 뜻을 자녀들의 이름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아마도 마을 사람들은 호세아가 자녀의 이름을 듣고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보통 자녀들의 이름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짓습니다. (우리 아버지 이야기) 그런데 호세아가 자녀들을 이름을 지었는데 우리말로 의역하자면 심판아, 끝장아 단절아라고 지었다는 겁니다.
동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선지자는 분이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삼더니 이제는 이름도 이상하게 짓는다고 수군대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런 상태인 줄 모르면서 말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에게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이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4절입니다.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은 나봇의 포도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전에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죽였을 때, 바로 거기가 이스르엘이라는 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후를 통해 아합을 심판했습니다. 그런데 예후도 아합처럼 타락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는데 갈수록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후왕조도 오모리의 왕조처럼 심판하시겠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 아들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보복하겠다는 겁니다.
둘째를 낳았는데, 딸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고 했습니다. ‘로루하마’라는 뜻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6절입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화가 났으면 이렇게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세 번째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고 했습니다.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9절입니다. 이젠 관계가 끝났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여로보암2세의 말기뿌터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까지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호세아는 자녀의 이름처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했습니다. 호세아는 끝내 돌이키지 않는 이스라엘백성들이 멸망하는 것을 눈으로 지켜봤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외쳤지만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백성들이 앗수르에 멸망하는 것을 비켜봐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지만, 영원히 참는 분이 아니십니다. 한계가 있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대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 한계를 넘으면 더 이상 참지 않고 진노하실 뿐 아니라 관까지를 끊어버리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마치 음란한 아내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남편과 같이 그렇게 속앓이를 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의 마음이 복잡합니다. 음란한 고멜을 아내로 둔 호세아와 같은 마음입니다. 그 마음속에 질투의 불길이 맹렬히 타고 있습니다. 질투하시고, 분노하시고, 애타하시고, 눈물흘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가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만큼 이스라엘백성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지 않으면 질투도 없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관심도 없고 아픔도 없습니다.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애타하시고, 분노하시고 진노하십니다. 그 큰 손으로 때리고 나서 얼마나 아플까 그것을 또 걱정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아내나 남편이 잘못하는데 가만 둡니까?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두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사랑이 없든지, 아니면, 포기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세상 것들에 휘둘릴 때, 질투하시고 분노하시고 진노하시고 눈물 흘리십니다.
그러다 더 이상 변화가 없을 때 이제는 포기하십니다.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이 가장 큰 심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어린애는 늘 말하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밖에 없습니다. 부모님의 입장,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릅니다. 지금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부모는 밤잠을 못자고 애쓰고 있는데, 철딱서니 없는 자식놈은 핸드폰을 사내라, 막무가내로 졸라댑니다. 이것이 어린애의 일입니다.
그러다가 어른이 되면 달라집니다. 어린애의 일을 버립니다. 이제 부모님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알고, 부모님의 심정도 헤아릴 줄 압니다.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이런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명절 때 부모님을 뵈러 갈 때, 부모님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실까 기대하고 갔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아직 어린애의 수준에 불과합니다.
장성한 어른이 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고 부모님을 찾아갑니다. 그래서 부모님이 좋아하시는 음식과 선물을 한 아름안고 가서 안겨드리지 않았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어린애 수준에 있을 때에는, 늘 하나님 에게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늘 다고다고 합니다. 늘 그 관점이 자기에게 촛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다가 신통치 않으면 실망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사명감당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저 세상에서 허랑방탕하게 먹고 마시는데 다 써버립니다. 이것이 어린애의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신앙이 깊어지면,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가? 이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물질과 재능을 바칩니다. 이제 바라보는 관점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의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여로보암2세 시대처럼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지금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복을 가지고, 빨리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열방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서 저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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