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1~3절
하나님은 선지자들에게 가끔 황당한 요구를 하십니다. 호세아에게는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삼으라고 했고, 이사야에게는 3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라고 했고, 예레미야에게는 결혼을 하지 말고 자녀를 두지 말라고 했고, 에스겔에게는 사랑하는 아내를 갑자기 죽이시는 일을 하십니다.
이것을 ‘선지자적행동예언’이라고 하는데,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심정을 알리셨습니다. 이런 선지자적 행동으로 예언을 하는 시기를 보면, 대부분 나라가 멸망할 위기에 처해 있거나, 백성들의 타락이 극치를 달하고 있을 시기입니다.
요즘 하나님이 목사에게 행동예언을 요구하신다면 어떤 것을 요구하실까요? 아마도 말을 듣지 않는 자녀들을 주시지 않을까요? 말을 듣지 않는 자녀를 키우면서 징그럽게 말을 듣지 않는 성도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마음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에는 호세아의 불행한 결혼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호세아선지자의 처지를 요즘 말로 바꾼다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느날 하나님이 존경받고 정직한 어느 유명한 목사님에게 말을 했습니다. 그 말씀은 교회에서 남자관계가 복잡한 여인을 아내로 삼으라고 명령이었습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남자관계가 복잡한 그 여인과 결혼했습니다. 이렇게 훌륭하신 목사님의 사모가 된 그 여인은 결혼한 이후에도 복잡한 남자관계를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모님은 툭하면 어느 남자와 눈이 맞아서 음란한 행동을 하고, 가출을 일삼고, 사치하고, 자녀들을 돌보지도 않습니다. 이런 처지에도 불구하고 목사님은 주일마다 설교하면서 성도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목사님에 대해 성도들은 자신들은 문제가 없다는 듯이 “목사님 가정이나 잘 돌보시지요”라는 반응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정직하고 바르지만 늘 사모님 때문에 고통을 겪으면서, 사모처럼 죄를 짓고 음란만 일삼은 백성들에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목사님은 어느 날 설교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전국을 다니며 자기 가정의 쑥스러운 창피한 이야기를 해 가면서, 간증을 하면서, 하나님의 입장과 하나님이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질투를 선포했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징계를 내리실 것이라고 심판의 설교를 선포하면서 성도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지난주 말씀한 목사님이 바로 호세아입니다.
이번 주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면서 20~30년 호소했던 호세아의 설교를 듣고자합니다. 2800년 전에 살았던 호세아는 자신의 창피한 집안 이야기를 기록하여 오고오는 세대에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설교 내용을 통해 현재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호세아서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룰 수 있습니다. 전반부는 1~3장이고, 후반부는 4~14장입니다. 사실 1~3장의 내용에 타락, 징계, 회복의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이 내용을 다시 4~14장에서 길게 반복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즉 4~14장이 오랫동안 호세아가 설교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설교는 간단합니다. 고멜과 같이 타락한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지적,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타는 사랑으로 포기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심정, 끝내 듣지 않아 징계를 결정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움, 징계를 받아 포로생활이라는 고통을 당하게 될 이스라엘을 생각하면서 다시 끌어안겠다고는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복잡하게 섞여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음
이스라엘이 왜 멸망했을까요?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원인 중 하나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해서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1절, 6절, 5:4절, 이스라엘백성에게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결론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은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아는 것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앎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결과는 하나님이 떠나신다는 겁니다. 5:6절입니다. 하나님이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마치 사람이 더러운 돼지우리에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돼지들은 더러운지 모르지만 사람은 돼지우리를 보고 더럽다고 합니다. 돼지우리에서 사람과 돼지가 함께 잠을 잘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음행으로 더러워진 사람과 거룩한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5:15(고난 받을 때에 하나님을 찾을 때까지 하나님의 곳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최종상태는 못쓰게 된다는 겁니다. 7:8절(아마도 식사를 혼자준비하다가 깨닫음?), 9:12절(하나님이 떠나는 때는 화가 미친다고 했는데) 9:17절에서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십니다. 11:7절(지식이 없어서 회개하는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결과 의인이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면 이런 꼴이 됩니다. 하나님의 입장을 가르치지 않으면 이스라엘백성들처럼 됩니다. 성장과 성공을 강조한 번영신학의 영향으로 한국교회는 커졌지만 상대적으로 말씀에 대한 진지함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 결과를 호세아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하나님의 자기소개서입니다. 이 소개서를 잘 읽으면 알 수 있는데, 아주 간단하게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 심판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그들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에게 율법을 주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는 것입니다.
구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들과의 관계가 부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를 부자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갈라지면 남남이 되지만 부자관계는 갈라진다고 해도 남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내가 남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 부부는 정성적이 않습니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가 무엇을 하든 관심이 없다면 정상적인 부부가 아닙니다.
보통 부부는 닮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친밀해지고, 대화를 통해 많이 알게 되면서 먼저 내면이 닮아감으로, 생각이 비슷해짐으로 인해 후에 얼굴도 닮게 되는 겁니다. 그만큼 많이 알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호세아의 아내인 고멜은 호세아의 입장이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좋아하고,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 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백성들도 하나님의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음행을 즐겼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 상태가 지속되니까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호세아의 설교말씀처럼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하게 됩니다.(여로보암2세가 41년 통치했는데 이후 6명의 왕이 30여밖에 통치하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나라의 멸망이라는 극단적인 징계하기로 작정하셨을까요?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교회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교육이 집안에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때리기도 하고, 좋은 것을 주면서 부탁도 하지만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교육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엘리야, 엘리사 선지자를 보내고 요나 아모스, 호세아까지 보냈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고약한 이웃에게 잠깐 맡기기로 했던 겁니다. 그 고약한사람 밑에서 고생을 하면 자기의 부모가 얼마나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이 마음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우니까 벌 받고 말아라라고 끝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을 악한 이웃인 앗수르에게 잠시 맡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깨우치고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원래 남편인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2:7절(집나간 고멜이 고백하게 될 내용), 포로생활을 하면서 고백하기를 바라시는 내용이 6:1~3절입니다. 망하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3절은 신실하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6:6절에서 예배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혹독한 징계를 받은 이스라엘백성이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겁니다. 14:1~3절에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다시 사람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고백할 것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징계하지만 회복을 약속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사실은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 때문입니다. 11:8~11절을 읽으면서 설명. 하나님의 불붙는 사랑에 대해. 사람에게는 이런 사랑이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그처럼 악하고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긍휼의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하나님 편에서는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회복하기로 마음먹은 것은 처음 만남을 잊지 못해서입니다.
사실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이 처음 만났을 때는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그들과의 만남을 9:10절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막 길에서 포도를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촉박한 광야에서 수분이 풍부한 포도를 먹는 것처럼, 겨울 내내 과일을 먹지 못했는데 무화과의 첫 열매인 파김을 먹는 것처럼 반갑고 좋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첫 사랑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첫 사랑처럼 애지중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악한 이웃에게 맡겼지만 그들을 버리지 못하는 겁니다. 1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처음 출애굽을 해서 거친 광야를 쫓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순수한 마음을 기억하면서, 고생할 줄 알면서 쫓아온 기특함을 못 잊이서, 신혼초의 달콤했던, 좋았던 시절을 생각하면서 다시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겠다는 겁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들이 혹독한 교육을 받아서 깨닫게 된 것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 외에는 구원자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호세아의 예언대로 이스라엘을 721년 앗수르에 멸망하여 전세계에 흩어져서 살게 되었습니다. 호세아가 2:1절의 예언처럼 그들은 통일된 국가로 돌아오게 되는데, 고생고생 한 후에 1948년 돌아오게 됩니다. 세월을 계산 해보니까 2669년 동안 나라 없는 서러움, 부모 없는 서러움을 당하면서 나치로부터 수백만명이 죽기도 했으며, 갖은 고난과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돌아온 이후 호세아의 예언처럼 14:8절의 말씀처럼 그들은 그 이후 우상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형식주의에 빠져서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됨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계시록을 보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습니다. 요한도 유대인 중에 구원받은 144000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과거 2천8백년 전에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동시에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 우리 한국교회에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루 빨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갖춰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믿고-행하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상을 섬기지 않고, 이 땅에서 바르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2) 호세아는 부를 잘못사용하면 독이 된다는 사실을 설교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마치 탕자의 비유처럼 아버지의 유산을 챙겨서 풍족하게 쓰다가 망한 둘째아들을 닮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부를 주기를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물질의 풍요로움을 누리면 교만하게 되어 있고, 방자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세아를 통해 4: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그들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했습니다.
잘되고 잘나가면 더 감사하고 하나님께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방자해서 교만해가지고 하나님을 떠나버립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7:15절에도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의 팔을 연습시켜 힘 있게 했더니 그 힘으로 악한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부로 무엇을 하는 줄 아십니까? 마치 부자가 되니까 나쁜 짓을 일삼는 사업가와 같습니다. 10:1절입니다. 부로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요즘 우상은 즐거움이라고 생각 13:6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먹여 준대로 배가 불렀고 배가 부르니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며 이로 말미암아 나를 잊었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망하게 되는데 기 이유를 13:9절에,16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더 기가막힌 것은 제사장도 부로 인해 타락했다는 겁니다. 4:8절입니다. 원래 속죄제물은 제사장이 먹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제사장들이 생각하기를, 죄가 많아야 제사를 많이 드리고, 제사가 많아야 제물이 많을테고, 그래야 내가 먹을 것이 많은텐데, 제사장들이 늘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죄가 많아야 할텐데 그래야 내가 잘먹고 잘 살텐데.. 은근히 죄짓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제사장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습니까?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 2:8절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으로 바알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생색을 내는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들은 사용권만 있을 뿐입니다. 소유권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부를 잘못 사용한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부를 잘못 사용하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호세아서의 결론은 14:9절입니다. “여호와의 도”입니다. 깨닫는 사람도 있지만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인이라야 이 도에 행할 수 있고, 반면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는 죄인은 오히려 이 도에 걸려서 넘어지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호세아가 활동하던 2800년 전의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했지만 그들의 제사는 이방신을 섬기는 행동이었고, 하나님을 아는 태도가 아니었습니다. 이 사실을 그들은 나라를 빼앗긴 후에, 주권을 빼앗긴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호세아는 음란한 아내와 살면서 속타는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신하고 배반하는 것을 일삼는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불타는 질투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설교를 그들을 듣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았습니다.
호세아서는 2800년 후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우리들을 대하고 계신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한번 솔직해,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일이 잘되고, 편안하게 살고, 자녀들이 잘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까?
배신하고 배반하는 우리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하나님의 입장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호세아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입장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의를 물 같이 흐르게 하라 (0) | 2021.05.01 |
---|---|
회개하는 자에게 예비 된 복 (0) | 2021.04.16 |
불행한 결혼생활 (0) | 2021.03.13 |
버럭 요나(2) (0) | 2021.02.23 |
버럭 요나(1) (0) | 2021.02.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