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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완성)

비판이 가득한 사회

by ysong 2021. 4. 25.

마태복음 7:1~6

2주 동안 제자가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문제를 다뤘습니다.

그것은 물질과 염려이었습니다.

물질의 문제는 섬김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해결될 수 있고, 염려는 우순순위를 바르게 하면 해결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8복의 제자는 타인을 어떻게 대하면서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의 말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가장 실수를 많이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비난하는 문제입니다.

이는 가정, 사회, 교회에까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저는 한 때 상당히 많이 판단하고 비판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저는 가능한 한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하지 않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몇 가지 알게 된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조금 알면서 변화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성령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깨다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비판하다는 헬라어 크리노는 법정에서 판결을 내리거나, 남을 비판하는 것, 정죄하는 의미를 가리킵니다.

1~2절에서 예수님은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많이 남을 판단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가장 가까운 사람입니다.

가장 가까이서 상대방은 정확하게 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까이서 보면 더 잘 보입니다.

가까운 사람은 가족, 친구, 작장동료들입니다.

부부가 가장 가까이 봅니다.

그래서 고치려고 지적하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니가 비판하는 대로 너도 비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니가 비판하는 대로 하나님이 비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눈에 문제가 있다고 하십니다.

들보가 시야를 가려서 사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들보가 바로 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너 자신이 바로 보고 있는지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보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분별하여 참된, 아름다운, 선한 것을 기초로 하여 옳고 그림을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들보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안, 두려움, 증오와 같은 감정들입니다.

이것들로부터 지배를 받으면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감정이 올라오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까?

화가 나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까?

미움이 가득하면 바르게 볼 수 있습니까?

두려움, 염려, 잘못된 섬김은 바르게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입니다.

이 들보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밖으로 향하여 누군가를 증오함으로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들보를 제거해야 합니다.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후에 타인의 티를 빼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시선을 나 자신을 향한 시선으로, 사랑의 시선으로 돌아보고, 하나님의 치유해 주심을 기대해야 합니다.

눈이 밝아져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나를 성찰해야 합니다.

나의 눈을 점검해서 내 눈의 들보를 빼내야 합니다.

 

자신의 들보에 가려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을 낭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가인과 사울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인은 동생의 제사를 판단했고, 동생의 제사만을 받으시는 하나님을 판단했습니다.

가인은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했습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주권을 스스로 사용했습니다.

가인은 열등의식, 경쟁의식,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아벨을 판단하고 결국에 살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초대왕으로 성공했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일생을 불행하게 살았습니다.

사울처럼 내면의 생각이 건강치 못하면,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면에 확실한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마치 때가 돌아와서 밥을 먹고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일상의 일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끔찍하게 사람을 잡아 죽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유형의 들보가 있습니다.

자신이 상당히 고상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선이 무엇인지 알고, 판단하는 기준도 갖고 있습니다.

그 기준에 따라서 틀렸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운 장로의 유전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는 자, 세리의 친구, 마귀의 왕인 바알세불의 부하로 판단했습니다.

안식을 범하는 자, 신성을 모독하는 자로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우리들이 비판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속속들이 절대로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남의 전 인격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이나 장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들보는 이것을 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속에 잠재되어 있는 미를 찾지 못하도록 합니다.

외적인 결점만 보고 남을 저주하거 판단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데 철두철미하게 공평할 수 없다는 없습니다.

사람은 본능적이고 직감적으로 반응합니다.

우리의 많은 판단은 직감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에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것들의 우리들의 들보로 작용합니다.

 

제가 가능한 한 판단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몇 가지 깨닫게 된 것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제가 만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가 만달란트를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어마어마한 빚입니다.

그런데 왕의 은혜로 탕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는 백 데나리온의 빚진 자를 탕감해 주지 않습니다.

나는 만달란트 빚진자인데, 타인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은 백데리온을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싶을 때 만단란트의 빚진 신하를 생각합니다.

 

저는 들보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온전한 곳은 하나도 없이 들보가 그득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점도 많고 허물도 많습니다.

이런 허물과 단점을 속이기 위해 타인을 비판하여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의로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외식하는 바라새인들처럼 행동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여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 있습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돌을 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다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어린아이부터 시작하여 돌을 땅에 넣고 돌아갔습니다. 요한복음 8:10~11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우리 주님도 정죄하지 않았는데, 내가 뭐라고 정죄하면서 사는가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욕심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뭐가 되겠다고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하나님과 동행의 기쁨을 누리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욕심과 욕망이 줄어드니 비난과 비판도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상대가 없으니 비판하는 일도 줄어들게 됩니다.

제가 비판하지 않으려고 한 결정적인 이유는 하나님이 비판하라고 계명을 주시지 않고 하지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가 은혜로 산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비판으로 사람을 변화시키거나 생명을 살리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작은 진리를 알게 되면서 비판보다는 품으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은 비평에는 매우 열심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은 그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우리는 남의 결점을 찾아내 고치려 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의 생활을 고치는 일만으로도 벅찹니다.

얼굴과 거울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신의 얼굴은 직접 볼 수 있는 분은 없습니다.

자신의 얼굴은 거울을 통해 봅니다.

만약 자신이 가지고 있는 거울을 딱지 않아 더럽다면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얼굴은 직접 봅니다.

직접 보기 때문에 잘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제자가 성경을 통해 자신을 보지 않고, 성경을 통해 상대방을 보지 않으면 잘못된 판단과 비판을 하게 됩니다.

비판은 자신을 하나님 자리에 앉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남의 눈을 티를 빼내주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바로 보고 분별하여,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라는 것입니다.

사회의 불의 모순에 대한 비판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나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분별하라고 했습니다.

불안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분별력을 가로막는 들보, 특히 불안과 두려움과 증오 같은 감정들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렵습니다.

실천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아는 것으로 끝내지 말고 삶에 적용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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