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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수훈(완성)

기도생활을 하십니까?

by ysong 2021. 3. 8.

마태복음 6:5~8

요즘 여러분들의 기도생활은 어떤가요?

저는 믿음이 약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바로 표시가 납니다.

혈기도 올라오고요, 분별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고요, 설교를 준비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습니다.

또 현재와 미래에 대한 염려와 두려움도 커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모든 것이 잘 풀려서 기도할 필요가 없는가요?

그렇다면 기도에 대해 오해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요즘 새벽에 성도님들이 오지 않는 날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새벽기도를 계속하는 이유는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기도생활을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그동안 기도에 관한 설교를 여러 번 했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기도를 중요하게 여기고 종교가 없는 사람도 기도를 할 정도입니다.

하늘도 무신하지도 사실 따지고 보면 기도입니다.

한국교회 교인들도 기도를 많이 하지만 타 종교도 이에 뒤지지 않습니다.

불교에서는 108, 300, 100일기도를 합니다.

무슬림들은 하루 메카를 향해 하루에 5번을 기도합니다.

작년에 성지순례를 갔을 때 차량을 운전한 분이 무슬림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할 경우가 많았는데, 먼저 식사하고 자리를 뜹니다.

기도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도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라헬의 묘가 있다는 회당에 들어갔는데, 군복을 입은 젊은 청년군인이 점심시간을 이용하여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녁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우리들의 금요철야처럼 통성기도와 같은 큰소리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보다 더 열심히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다 같은 기도인가요?

다른 종교와 차별성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요?

기독교의 기도는 아무렇게나 마구 드리는 기도가 아닙니다.

차별성을 가지고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잘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사람과 대화를 잘 못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대화를 잘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시중에서는 대화법에 대한 책들이나 강연을 흔히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자리입니다.

모든 관계가 제대로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화의 소통입니다.

 

오늘 부정적인 기도와 긍정적인 기도를 살펴서 올바른 기도생활과 우리들의 기도생활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부정적인 기도의 모습입니다. 피해야 하는 기도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이방인의 기도입니다.

이들의 기도에 무엇이 잘못됐을까요?

5절은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이들은 회당이나 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오전 9, 12, 오후 3시에 기도를 했습니다.

사도행전 3:1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이 시간에는 어떤 곳에 있더라도 기도해야만 했습니다.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이들의 기도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의 기도가 사람을 향해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로움과 경건을 자랑하는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을 향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기도했기에 사람이 왕래하는 곳에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기도입니다.

자신을 선전하고 자랑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받는 칭찬입니다. 경건하다고 하는 칭찬입니다.

사람에게 기도했기에 사람들이 상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기도입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서 기도할 때 회중을 의식합니다.

사람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광고의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목사와 장로가 싸우는 교회에서는 기도 시간에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기도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기도를 하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들으라고 하는 기도이기에 잘못된 경우에 해당됩니다.

 

특정 사람에게 들으라고 기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기도의 대상이 자녀일수도 있고, 조언을 해 주고 싶은 성도일수도 있습니다.

기도의 형식을 빌려서 자기의 말을 하는 경우입니다.

이는 사람에게 하는 바리새인들의 기도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7절은 이방인의 기도가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기도는 중언부언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중언부언은 주문을 외우듯이 길게 하는 것입니다.

길게 하는 기도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길게 하는 목적이 문제입니다.

원하는 것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오용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거나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과 이방인의 기도에는 끝없이 반복하여 스스로 최면상태에 빠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8:26절에서 우리는 바알 선지자들이 어떻게 외쳤는지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반나절이나 오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19:34절에서 에베소 폭도들은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라고 외쳤습니다.

이들의 중언부언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했습니다.

정성스럽게 최선을 다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들은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지 않는가요?

중언부언이 아주 위험한 기도입니다.

정말 열심히 기도했더니 응답해 주셨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답을 받기 위해 서로 기도경쟁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많이 얻기 때문에 교회에 욕심쟁이로 가득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얻는 수단으로 기도를 사용하고 있다면 중언부언의 기도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언부언의 기도를 피하려면 자기의 욕심인가 하나님의 뜻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정성과 간절함으로 하나님을 설득해서는 안됩니다.

기도는 하나님만 찾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이방인의 기도는 기도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긍정적인 기도의 태도입니다.

6절은 골방에서 하나님과 대화하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골방은 개인적인 장소이며 친밀한 사랑을 확인하는 곳입니다.

아무도 방해받지 않고 장소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전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장소입니다.

골방은 내 필요만을 전하는 정보 전달의 장소가 아닙니다.

골방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발전하는 곳입니다.

주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이 만나서 인격적인 교제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괴로움을 듣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호소하라는 것입니다.

눈물, 통곡, 침묵이 기도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새벽기도시간이 골방입니다.

또 아침에 뒷산을 산책하는 시간이 저의 골방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은 저에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여러분들의 골방은 어디입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사랑을 나누는 시간과 장소를 갖고 있습니까?

어떤 출근 길 지하철이 될 수 있고, 어떤 분들은 차 안이 될 수 있고. 어떤 분은 주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작은 방이 될 수 있습니다.

장소는 다르더라도 꼭 골방을 마련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골방을 마련하시길 바랍니다.

 

8절은 마치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미리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구해야 알고 깨닫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다 아시고 의롭게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다 아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믿고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병 앞에 떨고, 실패와 좌절 앞에서 울부짖습니다.

그만큼 약한 존재입니다.

이렇게 연약하다고 해서 우리들의 불신앙적인 태도를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간구를 응답하시고 들으십니다.

약한 기도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다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기도는 나의 필요를 채우는 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날마다 인격이 성장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타종교의 대부분 기도는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데 있습니다.

알라딘의 램프의 지니처럼 소원을 들어주길 원합니다. 지니가 주인의 말을 듣는 것처럼 말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하나님과 관계이며 소통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나의 변화를 이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교인이라면 누구나 기도를 합니다.

어떤 기도의 태도를 갖느냐, 어떤 내용의 기도를 하느냐는 신앙에 따라 달라집니다.

자기 필요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로 점점 나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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