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6:12~21절
이젠 요한계시록이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다 기억하기는 어렵지만 두 가지만이라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것만 알아도 나중에 혼자 계시록을 읽으실 때 도움이 될 겁니다.
1) 기록 방식과 구조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1장은 교회와 성도를 붙들고 있는 어린양 예수님입니다.
2~3장은 고난과 핍박과 이단과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7교회의 모습입니다.
6~16장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시기인 종말의 때에 벌어지는 인, 나, 대접 심판입니다.
건전한 목사님들은 인, 나, 대접 심판의 개괄식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같은 내용을 다른 측면에서 기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의 심판은 경고의 메시지를 강조하고, 나팔은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 중심, 대접은 심판의 시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점진적 강화해 나가는 방식으로 기록되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15~16장의 대접심판은 최종심판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현재 회색지대가 존재하지만 마지막 최종심판은 중간지대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들은 불이 섞인 유리바다에 서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새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생명나무 과실을 먹으며 주님과 영원히 거하게 됩니다.
반면 사탄에게 소속된 두 짐승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지게 됩니다.
중간계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6번째 인을 떼고 7번째 인을 떼기 전에 기록된 중간계시(삽입부, 막간계시)인 7장입니다.
6번째 나팔을 불고 7번째 나팔을 불기 전에 기록된 중간계시인 10, 11장입니다.
7번째 나팔을 불고 대접 심판이 있기 전에 기록된 중간계시인 역사의 압축인 12~14장입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는 계시록의 큰 틀을 그릴 수 있습니다.
종말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건부터 예수님의 재림까지 시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시록은 역사의 끝에 일어날 어떤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현실을 위한 말씀입니다.
견고하게 인내를 가지고 설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소한 4가지만이라도 기억해 주시면 주겠습니다.
오늘은 7대접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최종 심판입니다. 보통 인, 나, 대를 반복적이며, 점진적 강화로 보고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른 측면에서 기록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일부의 주장이기는 하지만 14:8~9절을 연결하여 보면, 7대접 심판은 이렇게 보기엔 논리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7대접심판은 최종적인 심판으로 보는 것도 좋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7대접심판은 성도들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성도들은 불이 섞인 유리바다 가가 서서 어린양의 노래, 모세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중에 동시적으로 회개하지 않은 세상을 향해 쏟아지는 진노의 심판으로 보입니다. 그래야 14장과 연결해도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최종심판에 이를 때 두드러진 특징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인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개가 없는 시대가 최종심판의 시기입니다.
2절을 보면 첫 번째 대접이 땅에 쏟습니다.
악하고 독한 종기의 심판입니다.
대상은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과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입니다.
3절을 보면 두 번째 대접이 바다에 쏟습니다.
바다가 피가 됩니다.
모든 생물이 다 죽습니다(나팔 심판에는 1/3만 피, 죽음)
4절을 보면 세 번째 대접이 강과 물 근원에 쏟습니다.
피가 됩니다. 먹을 수가 없는 물이 됩니다.
5~7절에는 천사들의 찬양과 제단의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시다, 침되다는 것입니다.
15:3~4절에 기록된 어린양의 노래 내용와 동일합니다.
8절을 보면 네 번째 대접이 해에 쏟습니다.
태양이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우게 됩니다.
9절은 이에 대한 반응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비방합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주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10절을 보면 다섯 번째 대접이 짐승의 보좌에 쏟습니다.
나라가 어두워집니다.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혜를 깨물 정도로 고통스럽습니다.
11절은 두 번째 반응입니다.
비방하고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섯 번째 대접이 유브라데 강에 쏟습니다.
강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됩니다.
용, 두 짐승, 추종자들인 세상의 왕이 최종결전을 벌입니다.
이 전쟁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므깃도의 산)
온갖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잘못된 해석인데 많은 사람들이 들은 해석입니다.
대표적인 인물은 핼 린지(Hal Lindsey)가 1970년에 발간한 '대 유성 지구의 종말'은 1948년 이스라엘의 재 건국을 종말 카운트다운의 시작으로 간주합니다. 그리고 계시록의 아마겟돈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마지막 단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2천8백만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이 전쟁이 어떤 전쟁인가에 대한 무리한 해석은 자제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일곱 번째 대접은 공중에 쏟습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에게 쏟습니다.
사탄 지배하는 영역에 쏟습니다.
세 갈레로 완전한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21절은 세 번째 반응입니다.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바벨론의 멸망하는 이유는 세상 가치로 사람들을 취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치에 취한 사람들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비방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삶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은 15절의 말씀에서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적용하고자합니다.
하나님이 코로나19 속에서 우리를 깨우시는 것이 무엇일 대해 적용하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교회가 참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습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왜 기독교만 그러느냐며 종교탄압으로 열을 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코로나19로 교회를, 성도를 깨우시는 것은 아닐까요.
진리의 길로 다시 서도록 깨우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부흥하면서 교회조직을 만들고, 법과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노회와 총회를 만들고, 조직을 가동할 법과 제도를 필요해서 교회법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주 예수를 믿는 것에 전념하지 않고, 그 조직에 누가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할 것인지였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했습니다. 그들은 조직에서 열심히 일한 사람뿐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좋은 포장지를 씌워주었는데,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는 포장지였습니다. 어떤 조직에 충성하는 것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별개로 생각하지 않고, 같은 것으로 여기며 사람들은 조직을 만들고 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 시작을 했던 것입니다.
군더더기가 핵심을 차지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목사님이나 사역자를 소개한다고 할 때, 학벌, 어떤 일을 했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 진짜 말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주님을 믿고 있는지, 어떻게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몸부림을 치는지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권사, 집사, 장로를 소개할 때 어느 교회를 섬기느냐를 따졌습니다. 큰 교회에서 섬기면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그래서 불만이 가득하면서 큰 교회를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한국교회를 사랑해서 정부가 발표한 지침으로 한국교회를 깨우신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각종 소모임이 없어서 서원하고, 교회에서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그동안 소월하게 여겼던 예배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예배의 소중함을 깨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수적인 것이 아닌 진짜에 집중할 수 있도록 깨우신다고 생각합니다.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우리를 깨우시는 하나님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스스로 자정 능력을 상실하니까 외부의 권력을 빌어서 깨우시는 것은 아닐까요. 본질에서 벗어난 일들을 생각하도록 깨우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에게 기회를 주셨다고 보고 싶어졌습니다.
예수님을 진짜로 믿었는지, 일하는 것으로 예수를 믿는 것으로 생각했는지에 대해 깨우시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데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깨우시는 이유를 몇 군데 말씀으로 정리하고자 합니다.
살전 5: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과 함께 하십에 깨어나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마귀에서 당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딤후 2:26절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마귀의 올무에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습니다.
15절-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알고, 마귀도 아는 은밀한 죄에 빠지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에 깨어 있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반드시 진행되니까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3번째 복에 해당되기도 하고, 우리들이 누를 복이기도 합니다.
첫 번째 복-1:3//두 번째 복-14:13절-주 안에서 죽은자//세번째 복-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지 아니하고 부끄러움을 보이지 않는 자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