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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완성)

새 노래를 부르자

by ysong 2021. 1. 15.

요한계시록 14:1~5

국가는 국민들의 생존을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만약에 대통령이 방송에 나와서 국민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반대로 교회에서 목사님들이 설교를 통해 생존의 문제만을 말한다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국가는 생존을 말해야 하고, 교회는 영생을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은 영생이 아닌 복 받는 생존의 비결을 말해왔습니다.

또 그것을 교인들도 좋아했습니다.

원래는 교회는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영생을 깨달은 사람이 구별된 생존을 걸어가도록 가르치는 곳입니다.

나름대로 이 원칙을 지금까지 지켜왔는데, 우리 성도님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지 외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숫자가 많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영생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할까요.

 

특별히 요한계시록은 영적인 세계에 대해 확신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12~14장은 역사에 대한 압축인데, 세계사와 많이 다릅니다.

역사의 본질을 압축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의 구속사와 사탄의 출현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보호하시고, 사탄은 교회를 박해합니다.

사탄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두 짐승을 대리자로 세웁니다.

국가나 권력으로 대표되는 적그리스도와 가짜 종교로 대표되는 거짓선지자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역사를 보는 눈을 갖게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폭넓게 정리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몇 가지 유익한 점을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들에게 생각하면서 살도록 합니다.

고난과 어렵에 대해 바르게 해석해 줍니다.

매일 은혜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공급받습니다.

소망과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사탄의 실체와 그 보다 능력이 많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은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특히 누가 새 노래를 부르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자격을 갖춘 사람이 새 노래를 부르는가? 새 노래는 어떤 노래인가? 우리들이 부를 수 있는 새 노래는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적용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 요한 또 다른 장면을 봤습니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어린양과 함께 십사만사천이 서 있는 것을 봤습니다.

십사만사천은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이 장면은 12~13장과 대조를 이룹니다.

어린양이 서 있는 이유는 12:17절에 용이 성도들과 싸우려고 서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이 섰다는 것은 전쟁의 태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양쪽 진영이 영적 전쟁의 대열을 갖춘 것입니다.

 

이마의 이름도 대조를 이룹니다.

13:16~18절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을 쓴 사람과 짐승의 이름을 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사람과 짐승의 소유이며 짐승의 관리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어디에 서 있는가?

시온산이란? 이사야 24:23-시온산=예루살렘은 같은 표현

하나님의 통치의 장소

이사야 40:9-11-어떤 통치인가? 먹이시고, 안으시고, 인도하시고

통치//돌봄의 장소입니다.

몸은 12~13장에 있지만 결국 우리가 누리게 될 영적인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기뻐하라는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2-어린양께 바치는 노래입니다.

웅장하고 장엄합니다.

감성적이고 은혜롭습니다.

3-누가 새 노래를 부르는지 봤습니다.

자격을 갖춘 자만들이 부를 수 있습니다.

땅에서 구속받은 십사만사천명 외에는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자녀들만 부를 수 있는 노래입니다.

짐승과 우상에게서 승리한 자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다른 표현은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입니다.(15:3=15:1)

오도 가도 못하는 절망의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홍해를 건너 구원받은 자.

 

4~5-노래를 부를 수 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1)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않는 자= 정결을 지킴 사람입니다.

여자는 계 17:1,5절에서 알 수 있듯이 타락한 세속성을 말하는 바벨론입니다.

황제 숭배를 음행으로 묘사합니다.

로마의 가치와 사상으로 삶과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던 자들입니다.

13장에서 짐승을 경배하지 않고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자입니다.

육신적인 순결, 영적인 순결을 지킨 구별된 사람입니다.

 

2) 어린양이 가는 곳이면 따라가는 자=제자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길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따라가는=제자들이 주님을 따를 때 쓰는 단어입니다(9:9/10:38)

 

삶은 쉬운 것입니다.

주님만 따라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무슨 고민이 있고, 무슨 갈등이 있습니까?

갈등은 두 의견이 충돌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자 자에게는 갈등이 없습니다.

 

3)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께 속한 자들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하나님께 구별되어 드려진 자

자기의 삶을 거룩한 산제물로 드린 자

 

4) 거짓말이 없음, 흠잡을 데가 없는 자입니다.

도덕적 완벽주의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고백한 자입니다.

황제가 숭배 받는 현실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 되심을 고백하기 때문에 로마의 기차에서 볼 때 거짓말쟁이요 흠결이 잇는 자라고 지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결백하다 참되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믿기지 않는 진리를 전해해 하기 때문에 신뢰를 얻어야 합니다.

1+1=3이라는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 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믿을 수 있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

진짜, 솔직히 말해, 인간적으로, 까놓고 말해서입니다.  

이는 불신이 바탕이 깔려 있는 사회라는 반증입니다.

거짓이 없고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재미없고 무겁지만 진실만을 말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누가 새 노래를 부르는가?

새 노래는 고난을 통과한 이들이 부르는 노래입니다.

새 노래는 지금 이 땅에서부터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서 부른 노래입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줬다는데, 돈벌이를 잃은 여종의 주인이 고발을 해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바울 일행은 엄청나게 맞고 차꼬에 채여 깊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가랑이가 찢어질 정도로 두 다리를 벌려 고정시킨 형틀입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었습니다.

좋은 일을 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히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올 생각이 없었는데,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로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했고, 지금까지 일이 잘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모든 죄수들이 들을 정도로 큰 소리로 기도와 찬양을 불렀습니다.

갑자가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형틀이 풀리게 되었습니다.

간수와 가족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새 노래는 고난 중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고난을 당하게 될 때, 이렇게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고난 중에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기회를 받았구나!

힘들다 죽겠다고 하지 말고 찬송을 부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구나!

하나님께 허락하신 은혜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기회구나!

 

누가 부를 수 있는가?

하나님께 맡기니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부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지진이 일어납니다.

우리들에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짧은 기간 동안에만 허락되어지는 기회입니다.

 

지금부터 새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고난이라는 현실에서 천상을 바라보며 새 노래를 부르라고 우리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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