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5:5절
모세의 사건을 통해 보는 온유의 유형입니다.
민수가 12:1~3절의 사건을 통해 본 유형입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두고 형님과 누님이 비방하고 조롱합니다.
아론은 제사장이고, 미리암은 선지자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이면서 측근으로 이스라엘공동체를 함께 이끌고 가는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 간에 분열이 생긴 겁니다.
아론과 미리암의 주장은 하나님도 자신들의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는 즉각적인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힘으로 제압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취하지 않습니다.
침묵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이처럼 자신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는 자녀에게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녀가 어릴수록 이런 힘을 강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통제하는 것은 온유함에 연결된 것입니다.
직장에서 직급이 올라가면 힘과 권위가 주어집니다.
어떤 이는 그 힘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 힘과 능력을 통제합니다.
이런 모세와 같은 온유함이 어디서 왔을까요?
부당한 공격에 입술을 닫을 수 있는 힘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온유함의 비결은 2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이런 상황을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것을 바르게 잡아 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시시비비를 하나님이 갈라 주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던 겁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는 가운데 온유하려고 하면 스트레스가 쌓이게 됩니다.
보통 이런 억울함을 당하면 참지는 못합니다.
바르게 잡지 않으면 세상이 뒤집어 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이 일하실 시간과 공간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주권을 맡기며 기다리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온유는 자신을 통제하고 절제하는 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격분하여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에 자신을 의탁하는 태도가 온유입니다.
이는 나약함이나 비겁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참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입니다.
월래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동족을 위해 나섰지만 동족에게 손가락질 당하여 도망자로 살았습니다.
상처가 많은 인생입니다.
모세는 철저히 하나님을 신뢰할 때까지 광야를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훈련을 마친 모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입술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합니다.
40년 동안 훈련을 받는 동안 1,2복을 철저히 경험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온유하게 살 것인가?
1,2복을 경험하여 내적인 부유함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 내적인 자유와 여유로움이 외적으로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맡김-내적인 풍요함이 찾아옴-넉넉함이 생기고-자신감, 자유함이 밀려옴-평화의 상태가 찾아옵니다.
온유의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8번째에 해당됩니다.
온유는 성령이 지배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해야 합니다.
내 감정은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가?
내 입술의 언어가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가?
나의 물질적 탐욕이 성령님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가?
하나님의 통제되는 것이 온유입니다.
양생마가 길들여져 온유해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온유의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비겁한 사람과 온유한 사람은 다릅니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무엇에 화를 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것도 온유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청결하는 분노와 같은 것입니다.
땅의 의미란?
토지의 개념이 아니다.
삶의 현장이요 하나님의 질서가 드러나야 하는 공간적인 개념입니다.
창세기 1:28절-하나님의 원리, 질서, 가치관을 구현하는 물리적 공간으로 땅을 주었습니다.
창세기 3:17~19절-죄의 결과로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창세기 12:1절-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순종과 은혜와 복락을 누리도록 땅을 주었습니다.
이사야 2:7~8절-그 땅에서 우상에 빠졌습니다.
에스겔 22:29절- 우상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타락한 인간 속에서 시편 37:9~11절 여호와께 소망을 둔 사람이 관계 회복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온유한 자는 여호와께 소망을 둔 자입니다.
마태복음 11:29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종의 형제로 오셔서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인내하고 품어주시며 온유하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신실하게 교제하면서 은혜 안에 잠기게 되면 하나님께 잘 길들여진 자가 온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온유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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