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고난 뒤에 숨겨진 행복 이야기 룻기(1)

by ysong 2020. 9. 30.

룻기 4:18~22절

룻기는 주는 사람의 대가가 따르는 자기희생적인 인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룻기의 시대적인 배경은 요즘 우리시대와 같습니다.

경건하게 살도록 하는, 율법에 순종하도록 하는 지도자인 왕이 없는 사사시대입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옳은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기가 옳은 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희생보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앞선 시대입니다.

 

이런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이라는 촌 동네에서 일어난 자기희생적인 사랑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 룻기입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룻기의 주인공은 나오미도, 룻도, 보아스도 아닙니다.

룻기의 주인공은 바로 다윗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라를 다스리는 왕의 족보를 정리하는 중에 발견된 다윗의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순고한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다윗이라는 인물이 탄생하기까지 보여준 조상들의 남다른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순고한 사랑의 결실로 다윗과 같은 훌륭한 후손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밖에도 룻기는 룻과 보아스가 보여주고 있는 이타적인 사랑, 고부의 갈등 해결법, 동서간의 문제, 믿는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이기적인 행동 등 다양한 주제들이 다루고 있는 드라마와 같습니다. 서론 1:1~5, 본론 1:6~4:12 결론 4:13~22절입니다.

 

룻기는 징계로 시작됩니다. 1:1절입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은 하나님이 사용하는 징계의 수단입니다. 경제적인 손해, 어려움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이런 것은 제일 가벼운 징계입니다.

 

징계는 과정입니다. 징계는 저주가 아닙니다. 심판이 아닙니다. 심판과 저주는 끝입니다. 성도 중에도 이런 징계를 만나면 3가지의 반응이 보입니다. 첫 번째는 대듭니다. “내가 무엇이 잘못이 있느냐, 환경과 조건이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문제이지 나는 문제가 없다고 대듭니다. 반항을 하는 겁니다. 청소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반응이기도 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보여주는 태도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도망가는 겁니다. 간혹 교회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험들어서 조금 쉴려고 합니다. 내려놓으려고 합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가거나 봉사의 자리에서 떠나는 분들이 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정작 그들은 많이 짐을 들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이 들고 있었지 정작 본인은 들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약간의 어려움이 징계인지도 모르채, 성숙을 위한 시험인지도 모른채, 시험에 들었다며 도망가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매를 순순히 받고, 징계를 순순히 받고 회개를 합니다. 이것이 기본입니다. 이런걸 성경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는 말을 듣지 않으면 때립니다. 때래서 바른 자로 돌아오길 바랍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버려 둡니다. 그런 자식을 버린 자식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유기라고 합니다. 로마서 1:24~32절은 내버려두니까 일어나는 죄악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식이니까 징계를 합니다. 때리고 혼내기도 합니다. 룻기 에 등장하는 엘리멜렉은 징계를 맞난는데 두 번째를 선택했습니다. 모압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민을 가도 잘못 갔습니다. 그곳은 이방신을 섬기는 곳입니다. 모압은 영원히 저주받을 땅인데 그곳으로 갔습니다. 3절을 보니까 남편이 죽었습니다.

 

이 정도 고난이 오면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나오미는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이민 갔는데 실패했습니다. 돌아오고 싶었겠지만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합니다. 성공해서 돌아오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실패한 사람들은 동창회모임도 못나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오미에게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창피를 무릎서는 용기입니다. 나오미는창피했지만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당장은 괴롭지만 돌아왔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죽는 더 큰 징계를 받았을 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주님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왜냐구요. 아직도 인간적으로 기대 수 있는 두 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민감함이라는 것은 빨리 깨닫는 겁니다. 혹시 나오미가 깨닫고 돌아왔다면 사랑하는 두 아들은 잃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이방인 며느리까지 둡니다. 때리는 하나님의 입장도 생각해야 합니다.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르는 하나님의 입장도 고려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오미는 이런 하나님의 입장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급급했습니다.

 

이젠 이민을 갔는데 남편도 죽고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몸은 늙었습니다. 한 인간이 비참함이 이처럼 되기도 쉽지 않습니다. 기쁨을 빼앗긴 여인이 되었습니다. 한숨이 절로 나오는 희망의 끈이 끊긴 여인이 되었습니다. 요즘은 여자들일이 일할 수도 있지만 고대의 여자들이 일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먹고 살기가 막막합니다. 풍족하게 나갔더니 비어 돌아온 여인이 바로 나오미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보는 듯합니다. 1:20절에 나오미는 자신의 이름을 가지고 말놀이 합니다. 나오미=즐거움, 마라=괴로움이 되었다는 겁니다.

 

징계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징계의 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려놓음의 상태입니다.

더 이상 기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징계의 끝입니다.

끝이 있으면 시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지를 룻기는 보여주기에 우리가 징계를 받아도 자살하거나 좌절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서론은 징계로 시작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