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5~42절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 방향을 돌린 두 명의 제자의 이야기(안드레, 사도요한)
안드레가 예수님과 하루 밤을 지새우고 나서 뿅 간 것 갔습니다.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치고 있습니다. 만났다(유례카)는 눈이 시리도록, 뼈가 저미도록 찾아 나섰던 것을 발견했을 때 쓰는 말입니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할 때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깨닫고 외침과 같습니다.
요즘 기독교인이 “예수님 만났어요”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내 죄와 허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고, 만났어요고 하지만 혹시 그것이 교리로만 믿는 것은 아닌지, 머리만로 받아들인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안드레는 차원이 다른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영성이 빈약한 이유 중에 하나가 서둘러 만족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래서 믿음의 뿌리가 깊지 못하고, 조금 아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다 안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표피적으로, 교리적으로 만남이 아니라 안드레처럼 마치 천하보물을 얻은 것처럼 격정으로 은혜를 전하는 만남이 이뤄지길 바랍니다.
예수를 진짜 만나면 생의 2/3의 문제가 그 순간에 풀리게 됩니다.
나머지 1/3는 주님이 풀어주시고, 힘을 주어, 인생의 모든 문제가 정리되어 담대하게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안드레처럼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안드레는 1) 하나님의 증언에 반응했습니다.
찌르면 움직이는 것입니다. 찌르는 방향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불특정 다수 앞에서 했을 텐데, 두 사람만 반응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진리와 계시를 펼쳐 보시는데, 듣는 사람은 듣고, 듣지 못하는 사람은 듣지 못한 것입니다.
명령은 생명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순종은 생명이 없습니다.
요한은 생명이 영적인 자발성에서 나온다고 봤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에는 명령이 없고, 선포도 없습니다. 자발적으로 반응할 때 영생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끝나고 은혜 받았습니다고 말하는 것은 느낌일 뿐이지 반응이 아닙니다. 반응은 태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새롭게 결심하게 됩니다. 문제를 키를 얻게 됩니다. 기도했던 것에 대한 응답이라는 확신이 옵니다. 반응하기 위해서는 말씀에 집중하고 말씀에 신뢰해야 합니다. 말씀에 기대감을 갖고 집중할 때 반응할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이 주시는 축복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을 구했습니다.
38절-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음은 목적이 무엇이냐?, 추구하느냐? 바라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주님 앞에 오는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왜 와 있느냐?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대답-랍비여 어디계십니까? 하루 저녁을 함께 있겠습니다. 예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39절-10시(금요일 오후 4시, 안식일 시작됨)인데 함께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인식일 동안 함께 있겠다는 의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와서 봐라’는 나를 경험하라는 의미입니다.
뭘 구하느냐?에 대한 질문에 우리들도 예수님 자신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제자의 구함입니다.
예수님 자신 외예는 아무것도 구하지 말아보세요. 교회, 나라 민족, 봉사, 자녀, 신상문제, 질병에 대해 기도하지 말고 오직 예수님 구하는 기도를 해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과 대화하고, 예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려고 노력해 보고, 말씀 속에 예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가를 찾아보고, 예수님께 대화하는 마음으로 가 보시길 바랍니다.
아마도 1시간 기도하는 분들도 예수님만 구하는 기도는 단 5분도 힘들지 모릅니다. 그러면 자신이 지금까지 예수님 주시는 복만 붙들고 기도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선물입니다. 주님 구해서 주님과 대화하게 되면 삶에 끈질기게 괴롭혔던 삶의 질곡이 풀려나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자가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와서 만져주시기 시작 하시면 신기하게 풀리고 치유되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안드레처럼 예수님 자신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리아가 본 가나 혼인잔치(설교노트 6) (0) | 2020.08.06 |
---|---|
간사함이 없어야 합니다(설교노트 5) (0) | 2020.08.01 |
요한이 행한 세례의 의미(설교노트 3) (0) | 2020.07.20 |
빛과 생명(설교노트 2) (0) | 2020.07.19 |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설교노트 1) (0) | 2020.07.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