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29:1~14절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한 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푯대가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바른 방향으로 향하려는 조치이기도 합니다.
첫 시간에 성경이 말하는 푯대를 원리를 문화 사명, 지상명령, 위대한 계명으로 정리했습니다.
푯대를 향하는 달려가는 우리들의 내적 푯대는 새 마음, 새 영으로 부드러운 마음을 갖는 것으로 정했습니다.
새 마음, 새 영이 내 안에 들어와야 내가 변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일순간에 일어납니다.
목수였다가 목사님이 되신 분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이 가르친 성경 공부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분이 하나님을 모를 때 목수로 살아갈 때, 전도사님이 남긴 말씀으로 새 마음으로 바뀌었습니다.
히브리서 3:4절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입니다.
그렇지 내가 집을 지었지, 그렇다면 인간을, 우주를 지은이가 있겠구나.
그때 성경을 믿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초월적 신호라고 부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런 경험이 있었을 것이고, 있을 겁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앞에서, 바울은 다메석 노상에서, 저 같은 자도 이런 초월적 신호를 경험했습니다.
새 마음, 새 영으로 충만한 사람은 외적 푯대를 향하게 됩니다.
외적 푯대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 것인가입니다.
세상은 두 종류가 있습니다.
먼저 세상 사람들을 가리킬 때 씁니다.
요한복음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세상 사람들입니다.
또 세상은 세상 정신,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 16: 11절에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하는 세상입니다.
세상 사람은 사랑하고 세상 정신은 멀리 해야 합니다.
새 마음을 가진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in the world-우리는 세상에 있습니다.
직장, 사회생활을 합니다.
not of the world-세상이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세상에 살면서 세상에 속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not out of the world-세상 밖으로 나가자는 것은 아닙니다.
into the world-세상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보냄을 받았기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외적 푯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예레미야가 포로로 끌려간 포로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 자칭 예언자들은 포로로 끌려갈지언정 곧 유다로 돌아온다고 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전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28:1~4절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바벨론의 왕의 멍에를 꺾을 것이다.
2년 안에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들 맞자고 들었고, 하나냐의 말에 속았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바벨론은 이방인, 부정한 곳, 섞이면 안되는 땅입니다.
그 세상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냐의 말은 듣기 좋고, 겉으로 애국주의자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를 거짓 선지자라고 하면서 박해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보낸 편지를 보고 화를 낸 거짓 선지자도 있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온 스마야라는 사람입니다.(렘 29:24절)
하나냐와 스마야와 같은 주류에 속한 것처럼 행세하는 이들의 주장은 바벨론과 단절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바벨론에 사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당시 선지자들의 신념이며, 신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메시지는 대다수 선지자의 주장과 달랐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벨론이 번영하도록 기도하라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에서 살아라.
그곳에서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며 살라.
예레미야는 메시지는 세상과 타협, 동화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배교하라는 메시지로 들릴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세상에 대한 단절을, 예레미야는 세상과 동화를 가르친 것으로 들립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동화처럼 들리지만 단절이나 동화가 아닙니다.
새로운 대안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29:6절이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번성하라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문화사명의 말씀입니다.
번성하라, 충만하라, 땅을 다스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심을, 하나님의 영향력을 넓히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세상이라는 바벨론에서 자기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도록 해서 하나님의 지식이 퍼져나가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예레미야 29:10절의 약속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70년이 차면 돌아오도록 약속하셨습니다.
소망이 이것입니다.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인 약속을 잡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알려줍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이며, 노예, 아픔을 초월하여 미래에 소망을 두게 됩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에서 오는 소망입니다.
본향으로 돌아가는 소망을 갖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1~13절 말씀을 주셨습니다.
평안을 주겠다,
만나 주겠다고 하십니다.
외적 푯대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훨씬 크고 대단한 하나님을 바벨론 사람에게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라는 것입니다.
삶의 방식을 그들에게 보여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바벨론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릴 사명을 주신 것으로 알고 자기를 통해 하나님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가지고 대안으로 살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제시한 대로 순종한 사람입니다.
단절이나 동화가 아닌 대안으로 산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예레미야보다 20살 정도 어렸습니다.
다니엘 9:2절은 그 사실을 알려줍니다.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책을 통해 여호와께서 말씀으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 그 연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칠십 년만에 그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추측이 아니라 생각하여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예리미야의 편지를 읽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신앙을 지켰고, 고위직에 올랐지만 기도했고, 바벨론 사람에게 유익을 끼쳐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단절하지 않았고, 신앙을 타협해서 동화의 결과를 얻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대안으로 살았습니다.
그래서 2:47절을 보면,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너희 하나님은 참이라고 인정하게 했습니다.
또 3:28절을 보면, 다니엘처럼 대안으로 산 3명의 다니엘의 친구를 통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단절이 아닌 동화가 아닌 대안을 살아냄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높여드렸습니다.
바벨론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외적푯대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과 단절하면 안됩니다.
어울려 살아야 합니다.
소금이 녹는 것처럼 살지만 소금의 고유한 영역을 끝까지 잃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대안으로 사는 외적푯대입니다.
단절 하지 못함과 동화의 유혹을 위험을 알아야 새로운 대안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사기 시대는 실패의 역사입니다.
그들이 왜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세상과의 관계를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 시대의 잘못된 세상과의 관계의 출발은 사사기 2:10절입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일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단절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상징하는 가나안 사람을 쫓아내지 못함입니다.
과감하게 끊어버리지 못합니다.
죄와 단절을 선언하지 못합니다.
1:19절, 21절, 29, 30, 31, 32, 33, 2:3절에 쫒아내지 못했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동화되었습니다.
동화의 결과는 악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사사기는 악을 행함을 8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2:11절, 3:7절, 3;12절, 4:1절, 6:1절, 8:33절, 10:6절, 13:1절입니다.
악을 행했다는 것은 우상을 섬겼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사시대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소망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열방이 주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살지 못했습니다.
돌아오는 새벽에 주유를 하다가 안경을 구리주유소에서 잃어버렸습니다.
은혜를 받고 돌아왔는데, 안경으로 인해 우울했습니다.
다음날 혹시나 해서 차를 뒤져봤지만 역시나였습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구리휴게소에 갔습니다.
다행히 휴게소 사무실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안경도 잃으면 찾고 찾는데,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나 찾았을까.
휘장이 위에서 아래서 찢어지듯, 하늘이 찢어졌습니다.
어릴 적 운동회 때,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박 터뜨리기 하듯이, 터진 박에서 선물이 땅으로 떨어지듯 하늘이 찢겨서 온갖 복음, 하늘의 가치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 일을 이루도록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찢긴 휘장, 찢기 하늘, 찢기 육체로 주어진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네가 어디에 있느냐?
거기에 네가 있느냐?
준비되어 있느냐?
제가 여기 있나이다.
이것이 외적인 푯대입니다.
단절도 아닌 동화도 아닌 새로운 대안으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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