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2~21절
구원의 진리를 자기 것으로 고백하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먼저 내가 처한 조건과 환경에 크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잠시 고민도 하고, 갈등은 하지만 빠르게, 쉽게 정리가 됩니다.
그것은 관계의 변화로 나타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누리기에 화평을 잃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로마서 5:1절의 말씀을 알게 되었고,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확신은 어느 순간부터인지 아주 강력하게 역사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을 나눈 것처럼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표지입니다.
오늘은 구원받은 자에게 나타난 두 번째 표지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가 출발입니다.
그 자유는 현실로 드러납니다.
각종 염려, 두려움뿐만 아니라 소유, 비교, 차별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자유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교회는 자유의 훈련장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태를 하나님과 함께 왕 노릇으로 표현했습니다.
베드로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왕 노릇을 하면서 화해자로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존재입니다.
이런 기쁨을 모두 누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죄의 지배를 해결하는 위해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죄의 지배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의 죄란 단순히 범죄 행위, 법의 위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거부하고 죄의 지배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죄의 지배를 선택하여, 죄가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하고,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이 세상에 죄를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12~14절에 불순종과 범죄라는 단어로 정리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주인이 되어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거부했습니다.
아담은 자신이 주인이 되면 자유를 얻을 줄 알았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죄의 지배하에 던져져서 모든 자유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죄의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고통과 두려움은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질서가 되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시작된 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순종, 즉 신실함을 통해 끝냈습니다.
15~18절은 순종과 선물로 요약했습니다.
19~20절은 한 사람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12~21절은 대표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류역사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한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참으로 바울의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두 개의 역사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역사를 죄가 왕 노릇 하는 역사, 즉 죄가 통치하여 죽이는 역사입니다.
또 하나의 역사를 생명이 왕 노릇하는 역사, 즉 살리는 역사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면서 “잘살아라”고 하신대로 회복되는 것이 인류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역사를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화로 취급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만든 이론이 진화론입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죄와 사망의 문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는 죄가 없었습니다.
아담은 처음 죽음을 몰랐습니다.
불순종으로 죄가 들어와서 죽음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아담은 아벨이 죽어서, 육체가 썩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심각성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죄의 형벌은 사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에게 미칩니다.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15절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
16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죄인이라는 유죄판결을 받음
17절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18절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모든 인류는 죄로 죽게 되었습니다.
불순종으로 죄인이 되었고, 그 죄로 죽게 되었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죄의 영향력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그러면 이런 반발을 합니다.
나는 아담처럼 선악과를 따먹지도 않았고, 불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대한 대답이 14절입니다.
모든 인류는 사망의 통치를 받고 죽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제 36년 동안 식민지로 살아가는 동안 태어난 사람은 태어나면서 식민지 백성이 됩니다. 조선시대 노예의 집안에 태어난 사람은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납니다.
죽음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 생각이 들면 허무하기도 하고, 아쉽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그래 육신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
그러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주님과 함께 하지.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왔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이 이룬 역사를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비극을 역전시켜 생명의 역사를 시작했습니다.
이 생명은 어떻게 주어졌는가요?
18절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생명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아담의 역사는 불순종의 역사이며, 예수님은 순종의 역사입니다.
인류의 불행은 불순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불행을 종식시킨 것은 예수님이 죽까지 순종함으로 불행을 마쳤습니다.
예수님의 순종은 사랑이 동기가 되는 순종입니다.
순종하는데 동기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하셨는데 그 동기가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생명은 차고 넘칩니다.
여기서 은사=은혜=선물은 같은 것입니다.
15절에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7절에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습니다.
20절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이 차고 넘치도록 주십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나도 살리고 주변도 살게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신앙은 왕권싸움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 하도록 자신을 내어 주느냐, 생명이 왕 노릇 하도록 자신을 내어 주느냐의 싸움입니다.
17절, 21절에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여 다스림을 받는 세계는 경쟁, 시기, 분쟁, 살인입니다.
자신이 살기 위해 상대방을 죽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결국 자신도 죽게 됩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는 사람의 인생입니다.
반대로 은혜가 왕 노릇합니다.
21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도 살고 이웃도 살게 하는 은혜입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뜻과 목적인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죽게 할 것 같은 불행, 두려움, 염려에 기죽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생명이 왕 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 자유가 구원 받은 이들에게 나타난 두 번째 표지입니다.
적용) 자유하십니까?
우리는 거룩을 함께 하는 공동체입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죄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죄에서 해방되었지만, 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잠시 화평이 깨지고, 넘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곧 자유하게 됩니다.
주님이 넘치도록 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후 대책을 세우셨나요? (2) | 2024.07.10 |
---|---|
옛 사람은 죽었습니다 (0) | 2024.07.01 |
갈라진 틈이 없어야 합니다 (1) | 2024.06.16 |
믿음은 기적이다 (2) | 2024.06.09 |
출생 이야기 (0) | 2024.06.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