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절-선지자로소이다=당신이 말한 것이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여인이 자기를 묶여 있던 것에서 풀리는 지점입니다.
부인하고 숨기면 더욱더 묶입니다.
인정하고 드러내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단은 자꾸 숨기려고 시킵니다. 나를 붙잡아 매여서 나를 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단은 자꾸만 더 그것 말하면 큰일 나, 사람들이 뭐라고 말할지 알자냐, 꼭꼭 숨겨놓아야 한다” 빛이신 예수님께 오셔야 진리가 자유케 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사람을 만나기가 싫어요? 자유롭습니까? 엄청난 고통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에게 용서해 달라고 하지 않았고,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 여인을 받아주었을 때 여인이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우리 속에 연약함을 만지심을 경험하셔야 합니다.
바르게 다뤄지지 않은 상처와 죄는 내 생명을 갉아먹는 질병이 됩니다.
남자는 세 번 운다고 하는데, 예수님 앞에 오니까 주님의 만지심에 눈물이 많아집니다.
자유함을 누리게 된 사람은 예배하고 싶어집니다.
과거의 상처로부터 풀어내주시니까 너무너무 좋은 것입니다.
속이 고쳐질 때 자유가 생기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어집니다.
영이 치유되면 내적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주여 주여 하지만 껍데기가 두껍습니다.
그 전에는 물에 관한 말을 하다가 주님은 껍데기를 깨기 위해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17절-남편이 없다고 말을 함=거짓이기도 하지만 진실이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자기 남편이 없으니까요.
19절-내가 어떤 여지인지 다 아시는군요=선지자로소이다
자기가 부끄러운 여자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껍데기가 벗겨지기 시작한 지점입니다.
은혜의 출발점입니다. 더러우면 깨끗한 척 했던 것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자기의 수치를 드러낼수록 주님은 끌어 앉으십니다.
24절- 예배는 무엇인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구약 시대는 장소가 중요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제기했던 예배는 ‘어디에서’가 중요했습니다.
그녀는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을 전통으로 여겼습니다.
사마라아 사람들은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 5경만을 정경으로 인정했기 때문에 모리앗산=그리심산을 드리는 예배가 전통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어떻게 드리는 것이냐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배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가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따라 참과 거짓으로 구분된다는 겁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함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영=성령께서 진리되신 예수님께 이끄시는 예배입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가 이미 왔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예배의 형식으로 드릴 때가 왔습니다.
예배의 혁신이 일어낫던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에 장소가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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