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0:25~37절
예수님의 비유를 나누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바르게 알게 됩니다.
비유의 전후 맥락을 살펴보면 그동안 무심히 지나친 말씀이 보입니다.
지난주 보화와 진주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값진 진주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진주 장사가 찾고 찾아서 모든 것을 올인해서 산 값진 진주가 나였습니다.
나는 인생의 밭에서 우연히 보화를 발견한 줄 알았는데, 그 이전에 나를 찾고 찾아 나선 진주장사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로마서의 말씀과 통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바울도 이 진리를 깨달았구나.
그리고 바울은 그대로 살아냈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법이 있습니다.
충분히 도울 수 있는 처지인데,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지 않고 외면한 사람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돕다가 잘못되더라도 민사상, 형사상 책임을 모두 면제해 주는 법입니다.
미국, 영국의 비롯한 선진국에서 이 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유사한 법이 있습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구호자보호법)입니다.
이 법들은 어디서 유래되었을까요?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처럼 너무도 잘 알려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전하고자 한 진의가 옳게 전해진 것은 아닙니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던 중 강도 만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를 내려가는 길은 34km 광야길입니다
골짜기도 많고, 험해서 자주 강도들이 출현하여 피의 길이라고 불렸습니다.
몇 년 전에도 어떤 여행객이 강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지금도 예루살렘 여행객들이 혼자서는 가며 안되는 길로 알려질 정도였습니다.
강도들이 어떤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도 이 길로 내려갔습니다.
제사장은 강도 만나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멀찍이 떨어져 반대편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레위인은 강도 만난 사람을 들여다보고 멀리 돌아서 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참고로 여리고는 휴양지입니다.
선교 여행 중 선한 사마리아인의 기념관을 들렸습니다.
사해와 여리고 사이에 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도 그 길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거의 죽어서 버려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치료해 주었습니다.
자기 나귀에 그를 태웠고 자기는 걸어가 갔습니다.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봐주었습니다.
다음날 길을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계속하여 돌봐 주라고 부탁했습니다.
두 데나리온은 주막에서 1~2달 머물 수 있는 돈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돌올 때, 더 들어간 비용도 내겠다고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돕기 위해 돈, 시간, 정성을 다했습니다.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율법 학자의 입장이 난감합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주 미워하여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사람으로 등장하니까 놀라운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가 강도 만나 사람의 이웃이냐고 묻자 37절에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대답하지 않습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언급하고 싶지 않아서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이 비유를 적용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를 착한 일,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법도 만들어진 것입니다.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비유만 따로 떼어서 읽으면 그런 교훈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선행에 관한 가르침 이상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웃을 돕자는 메시지를 넘어섭니다.
이 비유는 율법교사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25절에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가 비유의 배경입니다.
율법교사는 신학교 교수 정도는 됩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이 전통적인 유대교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나?
다른 이론을 주장하지 않은가?
이단을 말하지 않은가?
책잡고자 한 질문이었습니다.
율법교사의 질문 때문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 비유는 신학자의 영생에 관한 질문에 답한 것입니다.
답이 사마리아인처럼 도와야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면 행위구원이 됩니다.
구원에는 당연히 착한 행위라는 열매가 따라옵니다.
착한 열매가 없다면 구원 자체를 의심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 이뤄집니다.
율법교사가 몰라서 질문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율법교사에게 되묻습니다.
율법을 알지 않느냐, 율법이 뭐하라고 쓰여있느냐?
율법교사는 준비해 온 답을 말합니다.
신명기 6:4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와 레위기 19:18절의 이웃의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는 말씀을 종합하여 대답합니다.
예수님이 율법교사의 대답이 옳다고 합니다.
답이 맞는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너도 가서 그게 행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네가 율법의 모든 조문을 다 지킨다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네 행위대로 영생을 얻겠다면 그대로 행하라는 하셨습니다.
완벽하게 지키면 영생을 얻는데, 그렇게 못한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의 역할이며, 기능이며, 목적입니다.
율법교사는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자신의 의인임을 드러내 보이려고, 자신이 영생을 얻기 충분하다고 것을 드러내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다시 질문한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합리화하려고 다시 질문합니다.
29절에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다시 묻는 까닭입니다.
나는 잘하고 있습니다.
영생 얻을 자격을 갖추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율법교사는 이웃에 대한 정의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동족이거나 같은 종교를 가진 자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같은 유대인만이 이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만 사랑하면 되었습니다.
유대인을 돋는 사람을 유대인으로 인정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웃을 더 좁혔습니다.
바리새인의 이웃은 동료 바리새인들입니다.
율법교사는 잘해 왔다고 자부했습니다.
세리, 창기, 이방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이웃에 대한 한계가 있다는 것은 아시죠.
예수님이 이웃은 유대인이지?라고 대답할 것을 기대한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대답하면 “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있기에 나는 의롭고, 영생을 얻을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의 관점을 바꿉니다.
36절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웃을 묻는 것입니다.
도움을 받을 사람에서 이웃이 정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이 유대인입니다.
이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지 않고 제사장을 만났다면 제사장은 이웃입니다.
레위인을 만났다면 이웃입니다.
사마리아인을 만났다면 이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강도를 만났습니다.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버려졌습니다.
이때는 누가 이웃입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돕지 않았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이 이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돕는 이웃이었습니다.
강도를 만나니까 이웃이 바뀌었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무엇인가를 빼앗겼습니다.
웃도 빼앗기고, 건강도 빼앗기고, 생명도 거의 빼앗겼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돕는 자를 만나지 못하면 죽게 됩니다.
이 상대가 되면 이웃이 바뀌는 것입니다.
강도 만나기 전과 강도 만난 이후의 이웃은 다르게 됩니다.
이 비유의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웃에 대한 관점입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에 영생을 얻을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을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신이 의인이기에 사랑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내 이웃”에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관점이 바뀝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와 강도 만나 자를 동일시합니다.
질문하고 있는 율법학자가 바로 강도 만난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학자가 무엇인가를 빼앗기고 강탈당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학자는 무엇을 빼앗긴 자입니까?
영생을 빼앗긴 자입니다.
구원을 빼앗긴 자입니다.
21절에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하는 자에게 천국이 감춰져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과 스스로 톡톡하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숨겼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이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요한복음 8:48절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예수님을 시험하여 죽이려고 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으로 불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린 예수님이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영생에 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을 이웃 삼아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내가 강도 만난 자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압니다.
의롭다고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춰져 있습니다.
나는 강도 만난 사람인가?
죄와 사망으로 죽어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되신 예수님이 이웃으로 다가옴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나의 참된 이웃입니다.
비유에 등장한 사마리아인은 파격적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도 파격적입니다.
죽어 가는 우리들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이웃이 되셨습니다.
37절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구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도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다.
너도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다.
너도 은혜로 구원받을 사람이다.
너도 강도 만난 자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이 필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강도 만난 자와 21절의 어린 아이들은 자기 스스로 못하는 존재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았기에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착한 일을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선행은 그분처럼, 작은 예수처럼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기로 작정했기 때문입니다.
적용) 나는 작은 예수로 강도 만난 자의 이웃으로 살고 있는가?
나는 율법교사인가?
율법교사처럼 스스로 의인이라는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종교 행위를 하고 있기에 의인이라고 착각한 것은 아닐까?
율법교사의 이웃은 율법교사입니다.
서로 잘 대했습니다.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는데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를 볼까요?
고급 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이웃은 고급 아파트는 사는 사람입니다.
임대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담을 쌓고, 길을 막습니다.
나는 난파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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