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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내가 너를 사랑하였노라”

by ysong 2023. 6. 27.

말라기 1:2~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하나님과 어떤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까?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는 어떤가요? 고집을 부려서 험악한 분위기입니까, 아니면 순종해서 온유한 분위기입니까? 성경은 하나님과 나눈 많은 대화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래서 대화 내용도 여러 가지이고, 분위기도 다양합니다.

 

어떤 대화는 친구들과 나누는 것처럼 다정하고, 어떤 대화는 부모에게 혼나는 것처럼 무거울 때도 있습니다. 말라기서도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 사이에 나누는 대화입니다. 어떤 분위기일까요? 보통 말라기서를 구약성경에 제일 끝에 있어서 말라기라고 오해하는 분들도 계시고, 말라기를 선지자로 생각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또 성경을 조금 아시는 분들은 말라기하면 십일조를 잘 내야 복 받는다는 정도입니다.

 

말라기는 구약성경의 끝에 있어서 말라기도 아니고, 말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간의 천년의 사랑이 어떻게 마무리 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대화입니다. 천년의 사랑이 결실을 이루지 못하고 마지막 이혼법정에서 서 있는 것과 같은 분위기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BC 1446년쯤에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건저내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살도록 했습니다. 말라기가 기록되는 BC 400여년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말라기서에 이르러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간의 사랑이 파경에 이르게 되었던 겁니다.

 

왜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을까요? 납득이 안됩니다. 그동안 바벨론 포로잡혀 가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천하 모든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상천하지에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고,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 곧 자기들의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분이고, 거룩하신 분이고 유일하신 분이다 하는 것을 확실히 다 공부하고 왔습니다.

 

70년 포로생황을 통해 정말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알아도 진정으로 안게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안게 아니라 머리로만 알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렇지않고서는 해석이 안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말라기에 기록된 백성들은 바벨론에 망해서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 분들입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와서 폐허가 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또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함께 말씀을 읽고 회개할 때까지만 해도 정신을 차린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만 열심히 섬길 줄 알았습니다. 지도자 에스라 느헤미야가 있을 때는 하는 척 하더니, 그 지도자가 사라지고 나니까 원점으로 다 돌아가버리고 엉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보시는 하나님은 답답하시겠죠. 하지만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할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희생을 했습니다. 가족과 헤어지면서까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방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렵게 성전도 건축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이정도까지 희생을 했으면 상식적으로 잘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사야나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 약속한 회복의 역사가 이뤄져야 하지 않습니까? 백성들은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전이 건축되었지만 나라는 여전히 바벨론의 속국으로 주권은 회복되지 않았고, 생활은 여전히 힘들고 어렵기만 했습니다. 정치, 경제, 생활 모든 면에서 기대 없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말라기 당시 이스라엘백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많은 사람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하는 일마다 잘되고, 자녀들도 갑자기 말을 잘 듣고, 가족들도 갑자기 화목하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기 전이나 믿은 후에나 생활형편의 변화가 없습니다. 특별하게 개선되는 것이 없습니다. 생활이 여전히 힘들고, 하는 일은 잘되지 않고, 힘들게 하는 사람은 여전히 살아 있다면 예수님을 믿었던 것을 후회하지 않을까요?

 

이런 신앙생활이 지속되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식고, 신앙생황은 기계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마치 계시록에 기록된 7교회 중 살아있지만 죽어 있다고 책망을 받은 사데교회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을 해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죽어버린 교회를 말합니다. 요즘 교회들이 닮아가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불만이 가득해서 할 말이 많은 성도와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백성과 마지막 대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대화의 형식은 하나님이 먼저 말을 하면 이스라엘백성들이 따지면서 반응하고, 하나님이 또 구체적인 예를 들어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화의 주제도 6개 정도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대화의 주제를 통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무엇이었고, 백성들은 어떤 불만을 갖고 있는지를 배워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은 어떤 믿음생활을 해야겠다고 결단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보면 말라기는 경고라고 밝혀서, 꼭 들어야 하는 것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대화는 1:2~5절입니다. 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2절은 말라기의 분위기를 함축적으로 알려주고 있으며, 앞으로 대화가 어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말을 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했노라. 이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어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냐고 하면서 덤벼들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되 친구처럼 사랑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내 벗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도 너희를 이제부터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였노니종은 주인이 뭐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했는데, 왜 친구니까. 그래서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라고 찬양을 하는 겁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어쩌면 하나님의 사랑과 질투로 가득합니다. 사랑한 것만큼 질투하고, 질투한 것만큼 사랑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질투하느냐? 죽여버릴 만큼 질투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에 대한 질투 때문에, 죽여버릴만큼 질투합니다. 왜 그만큼 질투하느냐? 그만큼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안 되면 자기 자신이 죽을 만큼 사랑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랑해서 사랑의 매를 들어서 좀 때렸습니다. 애굽, 모압, 암몬, 에둠, 아람, 앗수르,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를 들어서 이스라엘백성을 때려서 사실 많이 맞았습니다. 죽도록 맞고 한대 더 맞았습니다. 비오는 날 먼지 나도록 맞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워낙 많이 얻어맞았기 때문에 사랑받은 기억이라고는 전혀 없고 얻어맞은 기억만 남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고, 주님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은 무능력해서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못한다고까지 말하게 되었던 겁니다. 이에 대한 표현이 바로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했습니까라 나타났던 겁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하면서 말라기 이 말씀 때문에, 그렇게 눈물이 흘린 적이 없습니다. 언제 사랑했느냐고 따지는 것이 꼭 저의 모습과 같아서입니다. 불만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이렇게 따지는 저에게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다고 하시는 겁니다. 꼭 야곱처럼 살아온 나에게 말씀하저에게 하시는 것 같아서, 너무 인간적이어서 너무나 가깝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그 하나님이 직접 말씀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나 인격적이신 하나님, 강원도만한 이스라엘 하나를 놓고 이러지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사랑해서 포기할 수 없으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녀된 이스라엘, 아니 우리들을 키우려는 하나님의 애절한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이 3~5절입니다. 야곱은 아무 조건을 따지지 않고 선택했고, 에서는 심판하신다는 겁니다.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힘으로 아무리 세우려고 해도 처음에는 세워지는 것 같지만 결국 망하게 된다는 하나님의 준엄한 사랑의 말씀입니다.

 

선택받은 게 사랑받는 겁니다. 구원받은 게 사랑받는 겁니다. 새생명을 가진게 사랑받는 겁니다. 영원히 아버지인 하나님과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 사랑받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말라기 이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백성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백성들이 사랑으로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오게 할 수 있겠는가에 대한 대답이 예수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랑의 최고의 절정인 겁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셨던 로고스가 육체가 되어서 인간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3년간 뭘 보여 주실 줄 압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사랑하시는지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지 못하면 믿음생활은 지루한 노동에 불과합니다. 구원받은 사랑, 선택받은 위대한 사랑을 알 때 이스라엘백성처럼 대들지 않게 됩니다.

 

두 번째 대화는 1:6~2:9절입니다. 6절에서 또 하나님은 질문합니다. 왜 공경하지 않느냐?고 질문합니다.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하나님이 내가 아버지인데 왜 공경하지 않느냐, 모든 만물을 창조한 창조주인데, 주인인데 두려워하지 않는냐? 왜 무시하느냐고 이유를 묻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아버지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힘이 없어 보이는 아버지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계신데 4가지가 없는 백성들이 하는 대답이 하반절에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라고 빡빡 우기고 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서 화를 낼 수 없는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공경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는 더러운 떡을 제단에 드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그렇게 더러운 떡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식탁은 별거 아니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제단은 별거 아니야, 제물도 드리기만 하면 사랑의 하나님이니까 다 받으신다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예배의 중요성을 모르는 요즘 성도들과 비슷합니다. 예배 중에도 휴대폰이 울리면 전화를 받기 위해 나가거나, 졸거나 하면서 예배를 드려줬으면 됐지라고 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배를 드려줬으면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다 용서 하신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엇이 더러운 떡인가에 대한 설명이 8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13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지금 나에게 드리는 제물을 한번 너희 총독에게 드려봐라 그가 그것을 기뻐할 수 있게느냐고. 사람에게 아무하기 위해, 청탁하기 위해 드리는 선물조차도 최상의 것을 바치건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존경을 담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벌써 주일이야, 또 예배를 드려야 해, 늦어도 되 하면서 귀찮게 여길 뿐입니다.

이런 태도로 제단에 제사를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를 드리는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은 10절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예배가 하나님을 존경하는 표현이고, 두려워하는 태도입니다. 그런 태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고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런데 더 이상 예배를 드리지 말라고 합니다. 즉 복을 내려주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너무 화가 나시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형식적인 제사를 싫어하십니다.

이사야 1:12~14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호세아 2:11 “내가 그의 모든 희락과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모든 명절을 폐하겠고

 

하나님은 사람과 제물을 받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드리는 제물은 문제가 있습니다. 또 제물을 바치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어서 둘 다 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장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온지 1백여년 조금 넘을 뿐인데 말인데 하나님이 거부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536년 고레스칙령으로 고향으로 돌아와서, 516년에 성전을 건축하고 에스라(457), 느혜미야(444)의 개혁이 있은 지 채 50여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들의 신앙은 다시 이스라엘이 망할 당시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복음을 받아 들인지 120년 조금 넘었을 뿐인데 꼭 말라기 당시의 백성들을 너무나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형식적인 예배,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 하나님께 대드는 태도가 꼭 닮았습니다.

 

가증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복을 내려달라고 떼를 쓰는 모습도 꼭 닮았습니다. 학생들이 컨닝을 하면서 좋은 점수를 바라는 것과 같고, 부정한 방법으로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 꼭 닮았습니다.

 

성도여러분. 변질되지 않고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은 늘어가겠지만 우리의 영혼은 더욱 깨끗하게 유지하는 성도님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시 이스라엘백성처럼 우리들도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2번째 설명은 2:1~9절까지입니다. 말씀을 맡은 제사장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4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모세와 맺은 언약을 항상 백성들이 알도록 해야 할 책임이 제사장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을 주는 언약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이 항상 백성들의 입에 머물러 있게 해서 죄악에서 떠나도록 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책임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8절입니다.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말씀을 맡은 사람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서도 미가의 신상사건, 레위의 첩사건을 통해 레위인의 악행을 지적했던 것처럼 말라기당시에도 하나님은 또다시 제사장을 악행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르치지 않아서 백성들이 율법에 떠나 죄악에 빠지도록 했다는 겁니다.

 

지금도 말씀을 맡은 저같은 목사가 잘해야 합니다. 또 교사, 목자를 비롯해서 말씀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는 분들은 8절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에스겔 33:6도 동일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칼이 임함을 파수꾼이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므로 그 중의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거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으로 말미암아 제거되려니와 그 죄는 내가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리라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으면 그 죄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일꾼들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들이 경고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그들의 죽음에 대해 나팔을 불지 않는 일꾼들에게 묻겠다는 뜻입니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가르치는 교사는 말씀을 가감하면 안됩니다.

신명기 4: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

신명기 12:32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모든 말을 너희는 지켜 행하고 그것에 가감하지 말지니라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왜냐하면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서, 자기 맘대로 가르쳐서 언약을 깨뜨린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에게, 목원들에게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지 않아서 말씀을 지키도록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존경합니다고 하면서도 정작 말씀을 안가르치면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말한 것이 거짓말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는 9절 하반절에서 소개하고 있는데,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됩니다. 지금 교회들이 왜 비판을 받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존경하지 않는 이유로 예배를 드리는 것과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존경한다면 바른 예배로 살아야 하고, 바르게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3번째 대화는 왜 거짓말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2:10~16절입니다.

4번째의 대화는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했냐고 묻고 있습니다. 2:17~3:5까지입니다.

5번째 대화는 3:6~12절인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묻고 있습니다.

6번째 대화는 3:13~4:3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말라기의 결론은 4~6절입니다. 율법대로 살아라, 엘리야를 올 것을 기다리며 살아라, 미래를 기다리며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저주로 칠까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입을 닫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 말씀의 심각성은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본문의 핵심적인 결론입니다. 이 말은 말라기 선지가 우리에게 부르짖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은 구약이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다음에는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없습니다. 구약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다른 말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후 400여 년 동안 침묵 속에 있었습니다.

 

이 기나긴 세월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경고하시던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려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이 암울함과 두려움을 한번 느껴보십시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라기 선지를 통해서 명령하신 이 회개의 마음을 깨닫지도 못했고, 이 마음을 가지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더욱 더 불안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들은 이 기나긴 세월 동안에 당했던 외국으로부터의 침입과 압제에 당황하면서 하나님의 저주를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늘도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저들은 오신 메시야는 쳐다보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저들 유대인의 회심과 이방인의 회심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숫자가 차면 이 세상은 끝이 나고 맙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예비하여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은 전부 다 영벌의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될 것입니다.

 

말라기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혹시 우리들도 말라기 선지자 당시의 백성들처럼 예수님을 믿어도 삶의 변화가 없어서 내가 너희를 사랑했노라고 하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라고 반응하면서 살아가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복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하나님이 어디 살아게시느냐며 말로 괴롭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이 천년의 사랑을 정리하는 마지막 대화를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한 선지를 보내고 보냈던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예수님의 초림을 약속했던 하나님은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모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르게 됩니다. “내거 너를 사랑했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 저들도 하나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시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기도

1. 꼭 말라기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형식적인 예배로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태도로 살면서 하나님이 사랑했다고 말하셨을 때, 우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나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면 왜 이렇게 살아가게 됩니까?라고 대들지는 않았습니까?

 

2. 가르치는 자로 책임을 맡은 우리들은 어떻게 가르쳤습니까? 말씀을 가르치는 시간에 말씀보다는 세상이야기로,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가르치는 자는 말씀을 가감하지 말고 가르쳐야 했는데, 일류의 타락은 말씀을 가감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책임을 다하지 못하지는 않았습니까?

 

3. 교회를 위해

 

추석명절에 우상하게 절하지 않게

 

 

 

 

 

 

 

 

 

 

 

 

 

 

 

 

 

3번째 대화의 주제는 왜 거짓말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2:10~16절입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10~13절입니다. 요약하면 그 거짓말은 이스라엘백성들이 이방인과 결혼하는 문제입니다. 이 대화의 주제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 아내들은 바벨론에 남았습니다. 바벨론포로귀환 백성들은 주로 남자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왜냐하면 포로생활이지만 70년이 지나면서 정착하게 되었고, 바벨론은 최고의 도시에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포로 민들이었지만 경제적으로 안정을 찾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당시 예루살렘은 황폐했습니다. 교육시스템도 없고, 사회시스템도 갖춰지지 않는 광야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로 남자들만 돌아왔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 정착한 이방인들의 여자들에 눈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에스라서에서 알 수 있는데, 제사장뿐만 아니라 지도자들도 바벨론의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 여자들과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가증한 것이고,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하는 너희들의 제사도 받지 않고, 대를 끊겠다고 하니까 하나님께 눈물과 울음으로 탄식해도 듣지 않겠다고 합니다. 11절입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백성의 반응이 14절 상반절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해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합니다. 14~16절까지 설명하고 있는데 15절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가 있는데, 이혼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말라기의 이스라엘벡성들처럼 경제적인 이류, 성격의 차이 등 각자지 이유를 들이내면 이혼증서를 써 주고 있습니다.

 

천사의 경우는 한번에 만드셨습니다. 천사는 자녀를 낳지 않습니다. 사람도 한번에 수십명의 사람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남자와 여자 한명만 만드셨을까요? 그 이유가 바로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해서라는 겁니다.

 

당시 주님께 헌신하겠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본적인 창조의 법칙조차 지키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들이 거짓말한다고 하니까 이런 일이 어찌됨이냐고 따지는 이스라엘백성의 모습과 하나님의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고 게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세 번째 대화의 내용입니다.

 

네 번째의 대화는 2:17~3:5까지입니다. 말로 하나님을 괴롭게 했냐고 묻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하나님 별거 아니야, 제사 대충드리며 되, 하나님이 힘이 없으신거 같아 등 하나님이 듣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함부로 말하는 이런 모든 말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시다는 겁니다. 야고보서 3:2절을 보면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한 것처럼 함부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하나님에 위대하심을 업신여기는 말들이 하루에도 수없이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답변이 3:1~5절입니다. 두 사자를 보내겠다는 겁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언약사자를 준비하는 사자인 세례요한과 언약의 사자인 예수님을 보내시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단을 심판하는 것이고 우리들에게는 구원의 사건인 겁니다. 심판의 대상이 바로 5절입니다.

 

다섯 번째 대화는 3:6~12절인데,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이 7절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 8절입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라고 강요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무슨 말을 해도 꼬박꼬박 말대꾸하고, 자기들 잘못을 깨닫지도 못하고 시인도 하지 못하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문을 닫아버리고 떠나서 400년간 어떤 예언자도 보내지 않았습니다. 이 가슴아픈 슬픈 대화, 하나님의 천년의 사랑이 일언지하에 묵살당하는데 그런 기가 막힌 책이 말라기입니다.

 

물론 십일조는 당연히 바치는 것이지만, 십일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되는 것이지, 복 받을 욕심으로 바친다면 그것도 바리새인들 보다 별로 나을게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십일조의 한푼도 떼먹지 않고 바친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십일조 열심히 바치고 안식일 그렇게 철저히 지켜도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 종교행위에 불과합니다.

 

여섯번째 대화는 3:13~4:3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냐고 묻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에 대한 설명이 14~15절입니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16절의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누가 기념책에 기록되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이고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는 하는 자는 두 번째 대회에서 알 수 있듯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지키는 자라고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는 마땅히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100% 순종해야 합니다. 99%로 안됩니다. 살다보면 100%가 안되기에 매일매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는 겁니다.

18절에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심판의 때가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때에 의인은 어떻게 되는지를 4:2절에 알려주고 있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가 기쁘게 뛰는 것처럼 그렇게 해 주겠다는 겁니다.

치료하는 광선은 아픈 곳을 치료하는 지엽적인 것에 머물지 않고 의인이 악인들로부터 받은 온갖 상처를 치유하여 전인적인 구원의 표현입니다. 이것은 바로 심판의 때에 이뤄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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