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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완성)

성벽이 완성된 후

by ysong 2022. 10. 2.

느헤미야 7:73~8:6

우리는 21세기 첨단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정작 현대인들은 과학의 시대를 역행하고 있습니다.

산신제, 각종 점성술, 특히 전통문화의 입고 진행되는 각종 제의행사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인도와 불교, 샤머니즘과 같은 영의 세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이와 더불어 무속종교와 종교간 통합이 유행하면서 영적으로 상당히 혼탁해질 거라는 전망도 나옵니다.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거부현상은 뚜렷해질 거라고 합니다.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시대에 알지 못하는 신에게 제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이 풀어야 할 두 가지 숙제를 풀지 못한 불안 때문입니다.

생존과 영생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 두 가지 숙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제시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해답이라고 합니다.

기복신앙은 생존에만 초점을 맞춘 신앙입니다.

풍년과 안전을 기원하는 대부분 제사들은 기복의 성향이 강합니다.

구원신앙은 영생에 초점을 맞춘 신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육체와 영혼의 완전한 회복을 말합니다.

신체적, 지적, 정서적, 사회적, 도덕적으로 완성된 인간이 되어 영생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거룩하고 정확합니다.

 

느헤미야서는 52일 만에 기적같이 성벽중수를 완성했습니다.

숱한 방해와 어려움 속에 감격스럽게 성벽중수가 완성되었습니다.

이젠 적을 물리칠 수 있게 되었고, 생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벽의 봉헌식을 진행하는 축제를 진행하고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는 성벽이 완성된 이후에 곧바로 봉헌식을 행하지 않습니다.

봉헌식은 느헤미야 12:27절에 합니다.

 

성벽중수 된 이후 느헤미야가 진정으로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말씀으로 돌아가는 영적인 부흥이었습니다.

영적인 부흥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의 영적인 부흥을 다시 소망하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615~16절에 성벽공사를 마치게 되자 새로운 리더를 세우고,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공사를 마친 날이 625일인데요, 각각의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허전한 것입니다.

고향으로 돌아간 이들은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영적인 갈급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성벽중수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했기 때문에 더 갈급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5일 후인 71일에 예루살렘 성의 수문 앞 광장에 모여들었습니다.

71일은 이스라엘의 달력으로 새해이기도 했습니다.

새해에 나팔을 분다고 해서 나팔절이라고 합니다.

일제히 모여든 백성들은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왜 느헤미야가 아닌 에스라일까요?

처음에는 느헤미야를 찾아가지 않았을까요?

느헤미야는 자신은 행전관이라며 에스라를 소개하지 않았을까요?

겸손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의미에서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내적부흥은 에스라에게 맡깁니다.

에스라는 2차 포로귀환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그는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사이며 제사장입니다.

그의 가문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면서도 모세오경을 간직했고, 그 말씀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경을 읽어 달라고 했을까요?

2절에 남자와 여자와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입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입니다.

학자들은 3~5만명 정도가 모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에스라는 몇 시간이나 읽었을까요?

새벽부터 정오까지 읽었습니다.

오전 6시부터 12시까지 읽었다는 것입니다.

6시간을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말씀에 대한 목마름, 갈증을 갖고 있으면 6시간 이상도 읽을 수 있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는데 하루에 6시간 이상을 공부해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말씀의 홍수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방송, 유튜브로 언제든지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은 홍수 때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영적인 기갈을 맞고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에 대한 회개의 반응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으면 어떤 반응이 일어나야 할까요?

말씀을 들은 이스라엘백성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먼저 그들은 말씀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대했습니다.

5절입니다.

책을 펴니까 모든 백성이 일어섰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앉아서 들을 수 없어서 일어서서 들었습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부흥은 말씀을 대하는 태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권위를 높여드리는 태도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권위를 인정할 때 그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읽는 자도 은혜를 받았습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읽다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합니다.

말씀을 읽다가 은혜를 받아서 감격해서 찬양을 했다는 것입니다.

읽는 자와 듣는 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의 반응입니다.

손을 들고 아멘합니다.

아멘은 그대로 이뤄지기를 내가 믿습니다.

예 그렇습니다.

고객을 끄덕입니다.

몸을 굽히고, 얼굴을 땅에 대고 예호와께 경배합니다.

이것이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 듣고 변하면 진짜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영이 살아나면 반응이 달라집니다.

 

저는 가끔 이런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오늘의 말씀에 제가 반응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눈물도 나고 기쁘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지 매달라가고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말씀에 대한 반응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대하는 태도를 회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해석하여 가르치는 교사가 있었습니다.

7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레위인들입니다.

이들은 흩어져서 읽은 말씀을 해석해 주고 깨닫도록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히브리어로 쓰여졌습니다.

백성들이 주로 사용하는 언어는 히브리어와 비슷한 아람어입니다.

히브리어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레위인들이 아람어로 통역하고 설명하여 깨닫게 했습니다.

 

뚜렷한 말씀의 반응이 있었습니다.

반응은 9~10절입니다.

왜 말씀을 듣고 울게 됩니까?

통회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살면 안된다는 깨달음의 눈물입니다.

까닭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한없이 흐르는 눈물입니다.

찬송을 듣자마자 눈물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부흥은 회개로 시작하는데, 회개는 통곡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순식간에 깨달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영이 말씀을 통해 나를 만졌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눈물, 고난에서 건져주신 감사의 눈물입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의 눈물입니다.

눈물이 있으며 기쁨이 있습니다.

말씀이 임하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죄를 짓도록 해서 기쁨을 빼앗아가려고 합니다.

두려움과 염려를 사람들의 생각에 넣어서 기쁨을 빼앗아가려 합니다.

말씀에 대한 확신과 깨달음이 있으면 영적인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12절에 말씀을 밝히 알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말씀을 깨달은 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단계 9절의 말씀처럼 깨닫는 순간에 머리, 가슴, 영혼을 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기쁨이 솟아납니다.

손을 들고 찬양합니다.

 

말씀으로 은혜를 받으면 또 다시 말씀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인 72일에 또 다시 말씀을 읽어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 때 읽은 말씀이 초막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말씀의 응답은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어제 아침에, 우연히 읽은 말씀이 영적으로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715일부터 일주일 동안 말씀대로 초막을 짓고 지키게 됩니다.

1천년 동안 지키지 않았던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인 부흥입니다.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삶의 뿌리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으면서 고난의 의미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기억해야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시킨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불 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이 내 인생 가운데 인도하신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광야 40년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영적인 부흥은 말씀에 대한 온전한 반응이며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경을 읽어주고 알려줘야 합니다.

마음이 열리고 찬양과 경배가 솟아나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적용) 말씀에 반응하면서 살아갑시다.

말씀에 갈증을 느낀 적이 언제였습니까?

예배에 대한 갈증을 느낀 적이 언제였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처럼 영적인 반응을 했던 적이 언제였습니까?

바로 오늘 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자 하는 갈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부흥은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말씀이 목말라 하고 그 말씀을 들어서 내 영혼에 새겨지고, 말씀이 내 영혼의 골수를 쪼개고, 내 생각을 지배하게 됩니다.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이 생각을 뒤흔들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이뤄집니다.

그 날이 바로 오늘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살아 움직이는 은혜를 맛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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