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3:1~5절
우리들은 아름다운 사회생활에 필요한 덕목을 배웠습니다. 저주하지 말고, 이웃의 아픔과 기쁨을 공감하고, 직접 원수를 갚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기독교인의 사회생활 2탄입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에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소속된 우리가 세상법을 지켜야 하나? 왜 지켜야 되는가? 어느 수준에서 지켜야 하는가? 또 우리들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하는데,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라의 법질서에 순응할 의무가 있는가? 공무원이 되려는 학생들이 있는데, 안정적인 직업, 월급이 아니라 공무원이 되려는 목적이 무엇인가?
오늘 말씀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어느 이단은 ‘병역의무’를 기피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잘못 해석한 신앙과 신조에 따라 군대를 가면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젊은이들이 감옥을 선택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어렵습니다. 이런 극단적인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도 오늘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저의 철없었던 젊은 시절을 되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아쉬웠습니다. 제가 총신대학교 1학년 시절, 80년대로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데모가 많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국가에 대해, 공권력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쳐 주신 교수님이 있었다면, 아니 목사님이나 선배들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저는 기독교인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목회자가 되는 것일까에 대해 고민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냥 신앙생활 잘해서 복 받고, 기도 응답받고 잘 살면 되는 것 아닙니까?라며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두 손이 있는데 오른손에는 교회를, 왼손에는 국가라고 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나라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본문에 대한 바른 해석으로 올바른 국가관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공권력, 회사의 상사, 학교의 선생님 등등 권세를 갖고 계신 분들에 대한 성경적인 입장이 필요합니다.
1. 하나님께서 권세를 주셨기 때문에 책임을 묻습니다.
1절부터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는 말씀입니다. 1~3절은 세상 권세자에 대해 정의하고 있는데,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임명되었다(1절)-1절 하반절, 권세를 거스르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르는 것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2절), 그들은 선에 보답하고 악을 벌하는 하나님의 종들이다(4절).
바울만 아니라 베드로도 같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벧전 2:13~17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왕이나 총독에게 순종하라, 그들은 하나님의 종과 같이 존대하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 직장 상사, 학교 선생님의 모든 권세자는 하나님이 세우셔셨 때문에 복종해야 합니다”라고 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편안하십니까? 그러나 성경적인 가르침은 복종을 원칙으로 합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본문의 말씀을 자의적 해석해서 얼마나 많은 권력들이 오용하고 악용했는지 모릅니다. 본문이 영국, 프랑스(16,18세기)에서는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는데 악용됐고, 제2차 세계 대전 때에는 독일 국민들에게 나치 정권의 살인마적 행위에 가담하는 구실로 악용됐고, 일제시대에는 신사참배가 국민 모두의 당연한 의무라는 변명의 구실을 준 구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성경의 정신을 빼고, 악용한 대목입니다.
성경의 정신은 3,4절을 잘 읽으면 알 수 있습니다. 세상 권세자에 복종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3절 다스리는 자는 악을 막고, 악을 행하는 자를 처벌하고, 선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 하나님은 다스리는 자를 ‘하나님의 사역자’ 6절에서는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는 의미입니다.
로마서는 네로황제가 통치하는 초기에 쓰여졌는데, 또 많은 통치자들은 예수님을 안믿는 공직자들이 많았은데,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님의 사자’로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사용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당시 로마정부와 공직자들은 유대인을 싫어했고, 기독교인을 박해하거나 사회적인 불이익을 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기만 아닙니다. 이사야 44:28절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내 목자라 그가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네 기초가 놓여지리라 하는 자니라” 고레스는 왕입니다. 그는 페르시아 왕(이란의 왕)입니다. 하나님이 ‘그는 나의 목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혼돈이 옵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상의 통치를 위해 그를 목자로 사용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권세자, 모든 공무원, 모든 상사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생각을 가져 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을 사용해야 합니다. 약하고, 어렵고, 낮은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역자에게 복종하라는 겁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가장 즐겨 봤다는 대통령은 정치가인가 공무원인가?인가 미국 최고의 드라마 명대사 가운데 “선출직으로 선거에 나선 그때에는 정치가라고 해도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 다음에는 공무원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인 견해는 대통령은 공무원입니다. 그것도 국민을 위해 서비스를 하는 서비스직종에 해당한다고 봅니다. 모든 공무원은 국민들이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서비스해야 합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특히 공무원이 되려는 학생들은 꼭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공무원을 하나님의 사역자로 여긴다는 사실, 그래서 모든 공무원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선을 행하여, 악을 제거하고 질서를 유지하는데 주어진 칼(권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4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19년 독립선언문에 33명이 사인을 했는데, 이 가운데 16명이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인은 당시 전체 인구에 2%로 미만인데 50%가까운 기독교인이서명을 했다는 것은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나라를 위한 종교이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세상 권세를 잡은 대통령을 비롯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이 세상 권세에 복종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바울은 세상의 잘못된 법에 복종하면서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유대인의 경고와 로마의 경고에 순응하고 살아간 사람이 아닙니다.
권세자에 복종하라는 명령은 조건적 복종입니다. 아무리 민주주의 정부의 권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위배하는 것이라면 복종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 위에 하나님의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세상 권세에 따르지 않는 사건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산파들입니다. 애굽의 왕은 산파들에게 남자아기나 태어나면 모두 죽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도 신앙을 지조를 지키기 위해 저항했습니다.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아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졌지만 하나님이 보호로 살아나게 되었고, 왕의 조세를 어기고 기도했던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지만 살아난 사건이 있습니다.
당국자들이 베드로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했지만 따르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의 4장 1~20절을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세상 권력에 대한 태도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 나왔기 때문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권력이 하나님에 대한 순종에 불가능한 명령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보다 위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저항은 우리 자신의 손해와 순교까지도 각오하는 비폭력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저에게 젊은 시절, 이렇게 허술하지만 가르쳐 줬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권세는 사회유익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을 법에 따라 처벌함으로써 사회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 대리자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권세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2. 진노 때문이 아닌 신앙양심에 따라 복종합니다.
5절입니다. 오른 행동을 해야 하는데, 올바른 이유로 해야 합니다. 동기가 올바른 동기이어야 합니다. 예)미국사람이 교통법규를 잘 지킴-벌금이 무서워서, 독일 사람도 법을 잘 지키는데 벌금이 무서워서라고 합니다.
세상 권세에 순종해야 할 이유가 다름 아닌 신앙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복종합니다. 훨씬 고상한 수준에서 복종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양심입니다.
딤전 3:8~9절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이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믿음의 비밀이란 예수 믿어 구원을 받는 다는 것과 같은 비밀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나가서 깨끗한 양심을 속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 안에 믿음의 비밀을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함을 받아야 하고, 성령께 계속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양심이 깨끗해집니다.
저는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에서와 야곱 중 에서가 더 매력적입니다. 사양도 잘하고, 호탕하고 욕심도 없는 에서가 매력적입니다. 야곱은 깨끗한 양심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속이는 자였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전에 그렇게 고생을 한 것은 깨끗한 양심을 갖는 기간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으면 안된다. 우리교회는 말씀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기도에 대해서는 약한 것 같습니다.
깨끗한 양심은 보혈의 능력, 성령 인도하에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기도할 때 가능합니다.
양심에 따라 복종하는 것은 세상 권세뿐만 아니라 교회 봉사에도 해당됩니다. 봉사를 복을 받는 수준이 아닌 감사 차원에서 헌신해야 합니다. 복받으려고 봉사했는데 복 안주면 떠납니다. 바른 신앙, 성숙한 신앙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신앙입니다. 일터, 가정 나에게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할 줄 아는 분이 복 받기 아니라 감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결론
하나님께서 세속 권세에게 권위를 주신 것은 창조의 선한 질서의 연속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무질서와 혼돈되지 않고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세상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부패한 인간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통치 사역입니다. 권세자들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에 수종들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세계는 넓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어서 복받고, 자녀 잘되고, 편안하게 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 믿는 것은 훨씬 큰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좁은 세계에서 나와 모든 이치를 가르침에 따라 신앙 생활을 하여 멋진 사회생활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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