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14~21절
9~13절은 기독교이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덕목으로 거짓이 없고, 우애하고, 열심을 품고, 기도에 힘쓰고, 손님을 잘 대접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기독교인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비기독교인에 대한 인간관계를 맺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대인관계는 사회생활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카네기연구소에 따르면 “재정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 중 15%는 기술적 지식에 의한 것이고, 85%는 인간관계 능력, 즉 사람을 움직이는 능력에 의해 성공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간과계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가운데는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너무 사회적으로 인간관계를 잘하면 너무 세상적이어서 신앙생활을 잘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직장에서 인간관계를 잘 맺는 것을 요즘 말로 줄을 잘 서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면 기독교정신과 어긋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것이, 늘 피해를 보는 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곤 합니다. 꼭 인간관계가 좋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은 아니고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생활 잘하는 사람은 비기독교인들과 인간관계도 잘해야 한다고 봅니다.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이나 모두 인간관계가 중요하지만 추구하는 목적이 다를 뿐입니다. 비기독교인이 인간관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성공을 위한 목적이라면 기독교인의 인간관계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키워드 ‘원수’입니다. 우리는 상당히 많은 원수들과 살아갑니다. 직장인들은 동료들과 성격과 일처리의 방식과 말하는 표현이 달라서 원수의 상태로 지냅니다. 심한 경우 함께 식사를 안합니다. 학교생활에서도 좋은 친구가 있고, 늘 피해를 줘서 상대하기 싫은 친구가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우리교회는 없지만, 원수가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은 원수가 없길 바랍니다. 직장에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사람이 없길 바랍니다.
원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1.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는 사람이 되라(14절)
우리는 원수들에게 재난이나 손실이 어떤 방법으로든 임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 원수에게 나쁜 일이 임하기를 바라지는 않더라도 그 원수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백 명 중에 한 사람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축복한다는 것은 인간의 타락한 성품 그대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14절이 우리들의 목표가 되는 겁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앙갚음을 하면 그 상한 심정도 치유되고 마음이 다시 편해질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복수는 상처를 치유하지 못합니다. 은혜만이 그럴 수 있습니다. 응징할 방법을 모색하지 말고 은혜를 요청하라고 합니다.
14절은 축북하라고 할 뿐만 아니라 저주하지 말라고 함으로써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에 대해, 부당한 대우를 하는 자들을 원수로 만들지 말라고 합니다.
원수를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전에 용서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예수님은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했는데, 바울은 이 말씀을 14절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헬라인의 세계에서도 유대인의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도 벧전 2:18~20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선하고 관용의 사람에게도 순종하고, 까다로운 사람에게도 순종하고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닐 앤더슨는 “용서란 다른 사람의 죄의 결과와 함께 살기로 동의하는 것이다. 단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은 이 결과들과 함께 살 것이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용서하지 않는 원한 속에서 살 것인지, 용서의 자유 속에서 살 것인지에 대한 선택밖에 없다.”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습관으로 원수를 만들지 맙시다. 부당한 대우를 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축복하는 것은 상대방을 살리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나를 치유하는 지름길 이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2. 교만하지 말고 공감하는 사람이 되라(15~16절)
15절은 공감하라는 뜻입니다.
공감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마음을 같이 하는 것(16절)-이해,,사고방식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는 것(16절)-신분이 낮은 사람과도 동등한 관계로 교제하는 것,,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지위가 낮은 사람과 어울린다의 뜻입니다. 그러면서 경계할 것-스스로 통찰력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감에도 남녀의 차이가 있지만 어떤 사람이 잘 공감할 수 있는가? 고난을 터널을 통과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성경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로 수두룩합니다. 노아-500세까지 아들을 못 낳아 실패자로 살아옴, 모세-광야에서 40년 동안 푹 썩어, 다윗-13년 동안 도망자의 신세였습니다. 욥은 30:25절에서 “고생의 날을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라고 했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이들이 이웃과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3.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 되라(17절~21절)
중국 무술영화의 주제나 미국 헐리우드 영화의 주제도 마찬가지로 원수를 갚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떠나는 내용들도 있긴 합니다.
요나서의 주제도 원수를 용서할 수 없다는 내용이 아닙니까? 나라의 원수인 앗수르의 수도인인 니느웨가 망하게 내버려두고 싶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요나 선지자가 아닙니까? 그대로 하나님이 가라는 곳과 정반대로 가는 배에 탄 것이 아닙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건짐을 받아 원수의 나라 수도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제대로 전하지 않는 요나를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결국 요나는 그들까지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결국 요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고 할 말이 없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늘 원수는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과거에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와서 퀴즈를 푸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느냐는 질문에 할머니 “원수” 네글자로 하나니까 “평생원수”라고 했습니다.
원수를 보는 관점을 정립해야 합니다.
1) 시므이 저주 사건 때 다윗의 태도에서 원수를 보는 입장을 배울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궁궐에서 도망하는 중에 발생한 사건입니다. 도망가는 다윗을 향해 시므이가 다윗을 보고 저주를 했습니다. 삼하 16:5~8//10절이 바로 원수를 보는 관점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고 한 것이다. 저주하는 시므이 뒤에 있는 하나님을 봤던 것입니다.
2)요셉의 사건(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자기를 노예로 팔았던 형님들에 대한 태도가 바로 원수를 보는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계획과 섭리로 이렇게 되었습니다.
인생을 파탄시킨 형들을 넘어갔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원수를 넘어서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하셨다는 깨달음이 있어야 이런 고백이 가능합니다. 원수를 넘어 하나님을 바라볼 때 자유롭게 됩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을 높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비판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윗이 시므이를 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사람들을 통해 듣도록 하는구나,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는구나, 잘되기를 바라시는구나, 하나님의 주권을 절대로 신뢰하는 태도를 봐야 합니다.
악은 더 많은 악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 몸의 세포 하나하나는 생을 위해 프로그램 되어 있습니다. 어떤 물체가 얼굴에 너무 가까이 다가오면 우리는 움찔합니다. 누군가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면 보복을 함으로써 정의를 추구하려는 것이 우리가 타고난 본능입니다. 바울의 요구는 초자연적인 요구입니다.
17절에 기록된 초자연적인 행동에 필요한 것
1) 선을 도모하라(17절)
2)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18절)
3) 원수를 직접 갚지 말고(19절)
3) 머리에 숯불을 쌓고(20절)---잠언 25:21~22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22.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의 말씀을 직역한 것인데요,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라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해서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빨개지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4) 악에게 지지 말아야 합니다. 악 감정에게 지지말라는 뜻입니다. 악인의 속에 있는 악과 자신의 속에 있는 악에게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십자가 밑에 있을 때 가능합니다. 은혜를 받을 때 가능합니다.
결론
원수를 만들지 맙시다. 복수는 은혜가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습니다. 사람, 문제 모두를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우리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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