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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은사대로 섬겨라

by ysong 2022. 7. 7.

 

로마서 12:3~8절

은 기독교인들이나 일반인들은 기독교에는 수행과정이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불교에서 행하는 면벽참선, 묵음수행과 같은 종교적인 수행과정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불교나 힌두교, 도교에서 행하고 있는 종교적인 수행은 세상과 분리를 추구하지만 기독교의 수행과정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세상 속으로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로마서 12장을 통해 배우고 있는 말씀이 바로 기독교 수행과정입니다. 로마서는 1~11장과 값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받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2장부터 ~15장까지는 구원받은 성도의 수행과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21절은 영적예배자로 살아가기, 2절은 하나님을 뜻을 분별하면서 살아가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섬기면서 살아가기입니다. 교회에서, 삶의 현장에서,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수행과정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의 출애굽사건이 예표적으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들이 10계명을 잘 지켜서 출애굽을 했습니까? 아니죠.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과 은혜로 노력의 댓가없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백성은 10계명을 지키면서 살아야 하는 수행과정이 뒤따라옵니다.

 

불교를 비롯한 일반종교의 수행과정은 세상 밖으로 분리를 추구하고 있지만, 기독교는 세상 속에서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힘든 수행과정입니다. 금식을 하고 있는데 먹는 것이 없는 산속에서 하는 것과 음식 냄새가 나는 곳에서 금식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힘듭니까?

 

구원받은 사람은 당연히 1. 진정한 예배를 드리기, 2.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 3. 은사대로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먼저 자신을 과대(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3절의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을 품지 말고입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생각할 것은 무엇인가요? 자기 자신의 처지나 조건에 맞는 생각을 한다는 것인데, 구체적인 뜻은 무엇일까요? 제가 이번주 설교를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묵상한 말씀입니다.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것은 사회적 분수에 맞게 생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갑은 갑에 맞게 생각하고, 을은 을에 맞게 생각하는 것이나, 인도의 카스트제도(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공직자), 바이사(수공업자), 수드라(잡일))에 맞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는 겁니다. 성경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하나님은 예레미야가 태어나기 전에 알고 계셨고, 남자로 태어나게 해서 선지자로 사명을 감당하도록 세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의 처지와 형편, 장점과 단점 모두를 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마땅히 생각할 것입니다.

 

139:1~4 “1.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2.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아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것이 마땅히 생각할 것입니다.

 

139: 13~15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15.내가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겨지지 못하였나이다

 

나를 지음심이 기묘하고,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알게 된다는 것이 마땅히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고 그분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 마땅한 생각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은사(카리스마)=재능을 주셔서 이 땅에 마땅히 생각할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무런 은사가 없어, 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반대로 난 대단한 사람이야, 내 위에 아무도 없어, 난 잘난 맛에 살어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가장 많이 힘들어 하고 상처를 받는 영역은 바로 봉사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봉사의 자리에는 사람과의 관계가 있고, 직접 몸을 움직여야 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일을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와 다른 스타일의 사람을 만나면서, 알게 모르게 갈등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런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마땅히 생각할 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특히 봉사하는 곳에서는 아군과 적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다윗에게 배워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삼상 17장에서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우러 나아가는데 다윗의 형 엘리압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동생 다윗을 폄하하며 비난합니다.

 

26-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받는 치욕을 씻어내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준다구요? 저 할례도 받지 않은 블레셋 녀석이 무엇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군인들을 이렇게 모욕하는 것입니까?"

 

28-다윗이 군인들과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맏형 엘리압이 듣고, 다윗에게 화를 내며 꾸짖었다. "너는 어쩌자고 여기까지 내려왔느냐? 들판에 있는, 몇 마리도 안 되는 양은 누구에게 떠맡겨 놓았느냐? 이 건방지고 고집 센 녀석아, 네가 전쟁 구경을 하려고 내려온 것을, 누가 모를 줄 아느냐?"

 

형의 핀잔을 들었을 때, 그렇지 않아도 긴장 상태에 있던 다윗 입장에서 얼마나 화나는 일인가? 그러나 다윗은 끝내 형 엘리압을 상대하여 싸우지 않고 적 골리앗에게만 집중하며 나아갑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 모습에서 배워야 합니다.

섬김의 현장에서 진짜 싸워야 할 적인 골리앗 앞에서 형제지간인 다윗과 엘리압이 머리 터지게 싸우고 있는 꼴을 보이면 안됩니다.

 

사울은 다윗과 반대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사무엘상 18장을 보면 다윗이 전쟁에 나가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다윗을 보고 백성들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삼상 18: 7~8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8.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다윗의 신앙을 몰랐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자리만을 생각했습니다. 적을 물리친 승리를 함께 나누지 못했습니다. 봉사의 자리에 사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면 안됩니다.

 

우리가 경해야 할 것은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보다 나은데, 아무래도 내가 더 잘 알아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우리교회 성도 중에 제가 제일 부족합니다. 그런데 저를 목사로 세우신 것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거야는 것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기도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실수 덩어리입니다. 주님이 주는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비교의식이나 부럽거나 하는 것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자동차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자동차를 설계해서 만든 사람입니다. 우리에 대해 누가 잘 알까요? 우리의 창조주가 되신 하나님입니다. 그 분이 우리들에게 은사대로 섬길 수 있는 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마땅히 생각할 것만 생각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두 번째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서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은 무었을 뜻할까요?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죄를 위해 죽으심을 믿는, 부활하심을 믿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 아닙니다. 여기서 믿음은 그릇된 판단을 막으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영적 은사의 성격을 알고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비유하여 전개하고 있습니다. 4~5절의 말씀입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위해서는 바로 4~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신 몸의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4~5절의 말씀은 몸은 하나입니다.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 , 머리털, 여러 장기가 있습니다. 손이 아프면 손만 아픈 것이 아니라 온몸이 아픕니다. 그래서 하나입니다. 각자의 기능과 역할은 다릅니다.

 

몸의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지체를 갖고 있는 것을 몸의 다양성, 지체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하여 몸의 상호성을 지니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안에는 구원받은 받은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피부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다양성의 원리를 깨달으면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데 큰 도움을 받습니다. 지체마다 기능과 역할이 다릅니다. 주님은 많이 기능을 발휘한 지체만 귀하게 여기느냐? 아닙니다. 적은 기능을 해도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신체 중에 제일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눈썹)

 

마태복음 20장에 기록된 포도원과 품꾼들의 이야기를 알 것입니다. 9-1데라니온(노동자의 하루 품삯, 최소한의 생활비), 12, 오후 3, 오후 5시에 일용직노동자에게 일을 하도록 하여, 6시가 되어 품삯을 주기 시작했는데, 51데나라온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본 9시에 온 일용직노동자는 더 많이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똑같이 1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20:11 “원망하여 이뢰되왜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비교의식 때문에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공정성의 원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망했습니다.

원망하는 사람을 꾸짖으면서 똑같이 주는 것이 주인의 뜻이라고 말합니다. 주인의 관점은 사람들이 최소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긍휼을 베푸는 것이며 이런 곳이 바로 천국이라고 말씀합니다. 관대함의 원칙, 은혜의 원칙으로 살아가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비교의식이 아니라 관대함으로 살아가는 것을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대로 섬기면서 살아가기 위해서 세번째로 은사를 잘 관리하여 사용하라

6~8절에 기록된 말씀에 따르면 일곱 가지의 은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언, 섬기는 것, 가르치는 것, 위로하는 것, 구제하는 것, 다스리는 것, 긍휼을 베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섬김의 은사는 봉사하는 일에 남다른 은사를 받은 분들입니다. 봉사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유익을 주지 못하는 봉사도 있습니다. 운동장을 뛴다고 해서 다 경주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봉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 형제를 섬기고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닌 일도 있습니다. 경기 규칙대로 뛰어야 경주가 되듯이 교회 안에서 봉사할 때도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 원칙대로 봉사해야 비로서 봉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 가르치는 직분을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

 

우리 중에 구제 사업에 대단한 은사를 받은 분들이 있습니다. 돈이 많다고 다 구제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돈이 별로 없는데도 사랑을 베푸는 일이라면 앞장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로하는 은사가 있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특별히 격려하고 붙들어 세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 귀한 은사입니다.

 

예를 들어 좌절에 빠져 있는 어떤 사람을 위로하려고 세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똑같이 권면을 했지만 두 사람의 말은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은 말이 많이 하지도 않았는데 그 사람 때문에 주저앉았던 사람이 힘을 얻고 일어나는 것을 봅니다. 세 사랑이 똑같이 권면했지만 왜 한 사람만이 그와 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거둡니까?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성령의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위로의 사도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심한 박해와 어려움을 견디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끝없는 박해가 계속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이런 비참한 현실을 이기지 못해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베드로는 교회를 떠나기는 했지만 맘이 불편하게 살아가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얘기 했다고 합니다. “형제야 나를 보시오. 나는 닭 울기전에 세 번이나 배반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같은 죄인도 용서해 주셨습니다라고 위로하면 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이런 위로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받은 은사가 어떠하든 간에 불평하지 아니하고 순종할 수 있습니다. 은사가 빛나는 것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은사는 잘 관리하고 사용하라고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맞게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받은 은사대로 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주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요? 주님의 몸이요 나의 몸인 교회에서부터 해야 합니다. 그러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은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섬기하고 성령께서 지체 된 우리에게 사람따라, 믿음따라 합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은사는 특수한 소수에게만 허락하신 선물이 아닙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자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늠께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일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묻어 두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개발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수행과정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는 남양주성실교회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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