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2:1절
기쁜 소식이 있었는가 하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는가 하면 미워하고 싫어서 괴로운 순간도 있었습니다.
전세계는 폭탄테러, 홍수, 태풍, 열차, 비행기와 같은 각종 사건사고가 끝이지 않았습니다.
기쁜 소식보다는 무고한 생명이 잃는 슬픈 소식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소식을 듣게 되면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힘없는 사람이,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희생을 더 당해야 하는가? 하나님이 살아 계신데 이같은 불행에 침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라고 말입니다
선지자는 변호인과 같습니다. 사람의 입장을 변호하고,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해야 하는 중간자입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는 어떤 질문을 했을까요? 하나님께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을까요?
1. 질문
12:1절은 예레미야의 질문입니다. 왜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합니까? 왜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자는 평안합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인데, 악인들의 삶이 형통하고, 편안합니까? 질문의 요지입니다.
2~3절, 원칙이 아닌 악한 방법으로 살아가는 자들을 그대로 두니까, 그들의 삶의 열매들이 맺고 잘살게 되느것 아닙니까. 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하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멀기만 합니다. 왜 이런 사실을 아시면서 가만히 있기만 하십니까?
2. 하나님의 분명한 대답
예레미야의 질문에 12:17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순종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하게 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정한 때가 있는데, 반드시 심판한다. 바로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할 것이다. 그들은 죽임을 당할 것이다.
3. 예레미야의 기도를 통한 질문
14:7~9,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지 마시고 일하십시오. 하나님은 구원자이신데, 거류하는 자 같이, 여행자같이 행동하십니까? 놀라셔서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처럼 행동하십니까?
예레미야의 눈에 비친 하나님은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무능해 보이는 하나님. 그래서 하나님 버리지 말라고 하는 질문하는 예레미야.
4. 그렇다면 예레미야만 이러한 질문을 했나?
의인으로 알려진 욥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욥은 온전한 자입니다. 정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악에서 떠난 자입니다. 사람으로 이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죽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한탄하면서 욥은 생일을 저주합니다. 욥 3:1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3:3~,,11절
예레미야도 자신의 생일을 저주합니다.
고통의 현실에서 예레미야에게는 고난만 닥쳐오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닥친 고난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그가 출생과 생일을 저주하는 말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생일을 저주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원망하는 겁니다. 우리들도 가끔 힘든 일을 만나면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삶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가 어떻게 출생과 저주했는지 몰까요?
15:10절, 20:14~15절입니다.
타인을 저주합니다.
고난이 지속되니까 화가난 예레미야가 저주기도를 합니다. 신약에는 없는데 구약에서는 이같은 기도가 가끔 나옵니다. 18:18~23절입니다.
바스홀이 이렇게 하고 풀어주니까 바스홀에 향하여 저주를 합니다. 20:6절입니다.
아삽이라는 시인도 예레미야와 욥처럼 고민했습니다. 시편 73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박국도 비슷한 질문을 했습니다. 1:13절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이들에 질문에 하나님은 태도는 분명합니다. 욥의 질문에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로 대답했고, 시인의 질문에 성소에서 깨닫게 했고, 하박국의 질문에 의인이 없다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예레미야에게는 심판이 분명히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4. 그렇다면 우리의 질문은?
대접받고 싶고, 잘살고 싶고, 높아지고 싶은데, 상처를 줬다는 이유로 질문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들의 질문은 의인으로 가장하는 질문은 아닙니까? 바리새인과 같은 질문은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처럼 작은 소자를 위한, 사마리아여인과 같은 이웃을 위한, 낮아지기 위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한 질문을 해야 합니다.
5. 예레미야가 처한 환경
거짓된 사람은 어느 시대에든 존재합니다. 예레미야는 거짓선지자들과,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인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 내용은 평강과 복입니다. 잘되고 잘되고 성공한다는 이야기뿐입니다. 14:13~14절입니다.
심지어 권력도 갖고 있습니다. 성전의 총감독을 맡았습니다.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20:1 바스홀이라는 거짓선지자인데 성전의 총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바스홀이 예레미야를 잡아다가 때리고, 차고 채우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6. 당신은 어떤 상태인가?
교만한 사회입니다. 교만은 계명을 무시하는 겁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베띠의 비유를 배워야 합니다. 13장에 기록된 베티,,11절-교만 때문에 교제가 안되는데, 푹 섞여서 교제가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포로생활이라는 혹독한 시련을 통해 교만을 빼고 겸손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이스라엘백성의 상태입니다. 두 상태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18장 토기장이의 비유-진흙의 상태//19장 깨진 옹기의 비유-굳어진 상태 깨면 회복이 안됨.
예레미야가 예언을 하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백성은 진흙의 상태입니다. 다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듣지 않으면 그들은 웅기처럼 깨진자가 됩니다.
질문이 달라지길 바랍니다. 내 질문에서 머물지 말고 이웃이 던지는 수만은 질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딤후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라고 하신 것처럼 성도와 박해와 밀접합니다. 경건이 여러분들이 질문이 되길 바랍니다. 경건은 구별입니다. 일하는 것이 달라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 만나시길 바랍니다. 그 분을 만나야 달라집니다. 우레의 자신이 사랑의 사도로, 비겁자가 용기 있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두려워하는 자가 죽음도 무서워하지 않는 자가 됩니다.
경건, 예수 그리스도가 질문이 되시길 바랍니다.
'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 건너 불 끄는 신앙 (1) | 2022.07.20 |
---|---|
무화과 비유의 진실 (0) | 2022.07.12 |
하나님이 숨겨주는 자 (0) | 2022.06.27 |
의인이라는 착각 (0) | 2022.06.22 |
요시야왕의 개혁 (0) | 2022.06.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