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11절
오늘 예배는 한국교회가 종려주일을 지킵니다.
종려주일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감당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부터 주님의 고난의 주간이 시작됩니다.
한 주 동안 십자가를 목상하시면서 절제하시면서 경건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친 목적이 무엇이었을까요?
서로 어울리지 않은 행동에는 구원의 메시지를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루고자 하는 구원의 사역과 백성들이 원하는 구원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어서 구원을 이루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이 살아서 능력으로 구원을 이루길 바라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의 입성은 제자들에게조차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준비한 예수님의 의도된 연출은 무엇일까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서 성령님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은혜를 주실 줄 믿습니다.
간략하게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동쪽에 벳바게가 있고 서쪽에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 2명의 제자를 보냅니다.
맞은편 마을에 가면 나귀와 나귀 새끼가 매여 있을 것인데 매인 줄을 풀어서 가지고 와라고 합니다.
너희들이 나귀새끼를 풀려고 하면 주인이 물을 것이다.
그러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하면 보내 줄 것이다.
제자들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왔다.
제자와 백성들이 나귀새끼에 자기 옷을 얹어 안장으로 삼았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한다.
백성들은 길에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바리새인들은 못 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예루살렘은 소동했지만 특별한 기적이나 이적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저녁때가 되어 제자들을 데리고 예루살렘 성에서 나오십니다.
나오시면서 평화를 알지 못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울었다.
예수님의 행동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했던 행동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사야가 3년 반 동안 옷을 입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애굽이 이렇게 망할 것이니까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예레미야가 베티를 유브라데강에 묻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 이같이 겸손하게 하나님만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예언의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자신이 구약에서 예언했던 메시아인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매여 있는 나귀와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는 것은 야곱이 유다에게 예언한 유언의 성취로, 유다지파로 오시는 메시야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창세기 49:10~11절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유다지파로부터 오시는 메시야, 야곱이 예언한 메시아인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는 제물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멍에를 메지 않은 암소와 잡아 제물로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일에 특별한 용도로 사용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가랴가 예언한 모습을 성취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스가랴 9:9~10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전쟁을 승리한 평화의 왕이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합니다.
그 왕은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고, 겸손하신 분입니다.
겸손하지만 굉장한 능력자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나귀를 타고 입성할 정도로 겸손한 이유는 그분은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메시야로 왔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겉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 것도 구약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예후가 왕이 될 때 군인들이 자신들을 옷을 벗어 “그는 왕이다”라고 외쳤던 것처럼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음을 드러낸 것을 막지 않았습니다.
나귀를 끌고 오는 과정에서 주인이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했던 자신을 “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에 대해 주되심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르는 자들이 호산나, 다윗의 나라는 구약적인 신앙을 바탕을 둔 단어들입니다. 제발 우리를 구원하소서,,로마 정부 입장에서 금기된 말을 사용하면서까지 이들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메시야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환호와 찬송을 인정했습니다. 그들의 불순한 동기를 간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이 사실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완성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의도된 연출과 백성들의 열망을 그대도 드러냈습니다.
이같은 연출된 행동을 통해 그들의 시각에서, 그들의 관점에서 예수님이 메시야 임을 알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제자조차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예수님이 진정한 메시야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부활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이토록 자세히 알려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고백하게 된 것이 은혜입니다.
적용) 주가 쓰시기 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우리와 나귀는 닮은 점이 많아요?
무게-250kg정도로 몸집이 작습니다.
상당히 고집이 세다=당나귀 고집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집이 세지만 아주 소심한 동물입니다.
평소에 가던 길이 아닌 새로운 길로는 가려면 꼼짝도 안하는데 겁이 많고 연약해서입니다.
나귀새끼가 쓰시기 위해서는 매인 말뚝에서 풀려야합니다.
제자들이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말뚝에서 풀었습니다.
주가 쓰시기 위해서는 매인 것에서 풀려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매여 있습니까?
시기, 질투, 사람, 욕망, 미움, 다툼, 돈, 권력, 쾌락, 무절제에 매여 있지 않습니까?
이것으로부터 풀리는 자유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매인 말뚝에서 풀림을 당하게 됩니다.
묶였던 것이 풀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의지를 가지고 결단해야 합니다.
신앙은 지, 정, 의 3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주님의 구원사역을 알고, 성령님이 일하심을 알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의지를 가지고 결단하는 과정의 산물입니다.
매인 것에서 풀려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나귀처럼 주님을 주인으로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쓰시면 인생의 주인공이 됩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나귀새끼입니다. 그러나 주가 쓰시니까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쓸모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은 쓸모 있는 인생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쓰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어디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일까요??
이스라엘백성들은 호산나(제발 지금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고 원했던 구원은 무엇인가? 생존입니다.
그들은 고통, 가난,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예수님이 이루실 것을 원했습니다.
기꺼이 자신들의 옷을 길에 깔아 왕의 길을 예비하고, 다윗의 나라를 이룰 군사적 왕으로 오셔서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원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했던 구원은? 로마의 압제, 가난, 개인적인 삶, 종합적인 구원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의 궁극적인 문제는 생존입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부지런함을 강조한 말이지만 실상은 생존입니다.
물고기들이 유유자적 헤엄을 치는 것 같지만 생존활동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리를 해서 밥을 먹는 것도 생존활동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님을 처음 찾아 온 것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질병의 문제, 자녀의 문제,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마치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옆으로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생존의 문제로 출발합니다. 주님은 생존의 문제를 가지고 오는 이들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그치면 주님이 주시고자 했던 진짜를 만나지 못합니다.
문제가 해결되든 해결되지 않던 주님 곁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 떠납니다.
저녁에 모두 떠나고 예수님과 제자들만 성전에서 나옵니다.
팬은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팬과 제자의 출발점은 비슷합니다. 생존의 문제로 출발합니다.
차이점이라면 팬은 열성적으로 따르지만 헌신이 없습니다.
제자는 그 분에 맡기고, 가르침대로 살아 냄으로 생존을 넘어 영혼까지 구원해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생존과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유일한 분임을 알고, 믿습니다.
생존의 문제만 가지고 따르면 열성팬이 됩니다.
생존과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따르면 제자가 됩니다.
우리도 주가 쓰시는 사람들이 되기 원합니다.
매인 것에서 자유함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향햐 나아가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참 뜻을 헤아리고 실천하시는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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