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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하게 보는 구약성경

유종지미 인생

by ysong 2021. 1. 13.

열왕기하 2:11절

교회 앞으로 매일 비슷한 시간에 산책을 하시는 노부부가 있습니다.

그 부부는 손을 꼭 잡고 교회 앞을 지나갑니다.

뵐 때마다 건강하시라고, 행복해 보이신다고 말을 건네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예수님을 믿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을 믿었으면 좋겠지만,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소박한 행복을 만끽하는 것 같아서 좋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하다는 것은 인생은 끝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은 잘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마무리가 좋으면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영원히 하나님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꼭 준비해야 할 것이 바로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워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의 샘플로 삼으신 이스라엘이 그 사명을 감당했는지, 감당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는지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듯이 믿음의 선배들이 무엇을 실수하고 무엇을 잘했는지를 깨닫는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북이스라엘에서 두 왕조는 꼭 기억해야 하는데 오모리왕조(오아아예) 와 예후왕조(예후,여호아하스,요아스,여로보암)입니다. 오모리왕조는 48, 예후왕조는 102년 동안 지속된 왕조인데 가장 회개의 기회를 많이 주었지만 가장 타락한 왕조로, 기회를 상실한 왕조로,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기간입니다.

 

오모리왕조가 그렇게 타락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이세벨이라는 교활하고 정치적인 인물이 남편인 아합을 뒤에서 조정하고 자식들인 아하시야와 여호람을 섭정하여 이스라엘을 배교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이 죽으면서 오모리왕조도 함께 멸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세벨이 오모리왕조의 실질적인 실세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와에서부터 계시록의 음녀(제국을 가리킴)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의 역할과 중요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합은 22년 왕으로 있으면서 정치는 어느 정도 잘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하1:1절을 보면 아합이 죽자 배반했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모압은 아합이 왕으로 있는 동안 조공을 바쳤습니다. 아합왕은 국토도 넓히고, 아람이라는 대군과 싸워서 두 번이나 대승을 거두고 3번째 전쟁에서 전사하기는 했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전쟁만 계속됐던 남북관계도 개선했습니다. 서로 사돈지간을 맺으면서 서로 돕고 지낼 정도였습니다. 외형적인 업적을 따져보면 나쁜 평가를 내리기 어려워 보일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아합의 인생의 끝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또 아합의 대적으로, 하나님의 편으로 평생 외롭고, 기나긴 영적인 전쟁을 벌인 엘리야의 끝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악한자라고 죽음이 처참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73편을 보면 악인의 죽음을 보고 의인이 넘어질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1~5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열왕기를 성령의 감동으로 저술하고 있는 사가는 엘리야와 아합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같이 아합의 죽음과 엘리야의 죽음을 의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아합의 죽음

열왕기상 22장에 29~40절에서 죽음의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유다의 여호사밧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연합군을 조직하여 아람이라는 대국과 전쟁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아람왕 벧하닷이 북이스라엘에 패배하고 그 댓가로 길르앗라못이라는 땅을 아합왕에게 돌려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시쳇말로 똥 누러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른 것처럼 벧하닷이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가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북연합군이 침략을 했던 겁니다.

 

전쟁에 출전하면서 아합왕은 적군의 표적이 되지 않기 위해 변장을 했습니다. 여호사밧에게 자신의 왕복을 입히고 자신은 평범한 군복을 입었습니다.

 

아람왕은 군사들에게 무조건 아합왕만 죽이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아람군인들이 여호사밧이 왕인 줄 알고 여호사밧만 공격했습니다. 아주 위급한 상황에서 여호사밧이 소리를 질렀는데, 아람군사들이 아합왕이 아닌줄 알아차리게 되고 쫓기를 그만둡니다.

 

그 때 마침 어떤 아람의 군인이 활을 쐈는데, 그 화살이 변장을 한 아합왕의 갑옷 솔기를 맞혔습니다. 아합왕이 부상을 입자, 전쟁터에서 빠져 나오려고 하는데, 전쟁이 맹렬해서 나오지를 못했습니다. 아합왕은 화살을 맞은 곳에서 계속 피가 흘려서 과다출혈로 죽게 됩니다.

 

아합왕이 죽으니까 마치 아합왕이 죽은 것을 아는 것처럼 아람군대가 철수합니다. 아합왕을 장사지내고 아합왕이 탔던 병거를 못에서 씻었는데, 그의 피를 개들이 핥아먹었습니다. 왕상 22:38절입니다. 이는 엘리야가 예언한 대로 성취된 겁니다. 21:23~24절입니다.

 

그렇다면 이세벨의 죽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세벨은 통이 큰 여자입니다. 그는 남북을 집어삼키려는 원대한 꿈을 갖고 남편과 아들을 조정하고, 딸은 남유다 왕자 여호람에게 시집을 보내면서 계획을 차근차근 진행한 여인이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열왕기하 9:30~3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후가 혁명을 이르켜 아합의 아들인 여호람을 죽이고, 곧장 여름별장이 있는 이스르엘에 달려왔습니다. 이세벨이 창가에 앉아서 눈을 그리고, 머리를 꾸미면서 예후를 조롱했습니다.

예후가 창을 보면서 신하 중에는 내 편이 될 자가 없느냐고 하니 2~3명의 내시가 창에 얼굴을 내미는 겁니다. 예후가 그들에게 이세벨을 창으로 내어던지라고 하니까, 그들이 이세벨을 잡아서 창밖으로 집어 던집니다. 배신을 한 겁니다.

 

땅에 떨어진 이세벨의 피가 마차와 벽에 튀었습니다. 그런 이세벨을 예후가 마차로 시체를 밟아버립니다. 그렇게 한 후 집으로 들어가서 먹과 마신 후에 그래도 왕비인 이세벨의 장례를 치러주려고 시체를 찾았는데 개들이 먹고 두골과 발과 손밖에 없었습니다. 처참한 죽음이었습니다.

 

남북을 손아귀로 쥐려고 했던 이세벨의 꿈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열왕기에서 다른 왕들의 죽음을 이렇게까지 묘사하지 않는데 유독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한 목적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엘리야의 끝은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과 너무나 대조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나라에 들려 올려간 인물입니다.

인류역사상 에녹과 엘리야만이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2. 엘리야의 끝

엘리야는 아합과 비교해서 외롭고 힘든 생활을 했습니다. 엘리야는 시골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고보서 5:17,18절에 보면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18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비기 오지 않도록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징계를 알게 되었던 겁니다. 그래서 왕상17:1절에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엘리야는 성경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 역사의 법칙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백성들이 죄를 짓고 있는 것에 하나님이 진노하신 다는 것을 알고 걱정하고 슬퍼하는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만약 엘리야가 이같이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갑자가 신이 나타나서 내가 하나님인데 했다면 엘리야는 그 분이 여호와 하나님인지, 바알 하나님인지 헷갈렸을 겁니다. 엘리야는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누구인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했던 겁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평생 풍족한 삶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먹는 것이 늘 부족했습니다. 그를 먹여 살린 것 중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부름을 한 까마귀도 포함됩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숨어 지낼 때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으로 살았습니다. 가뭄이 심해서 물도 마르고 까마귀도 어렵다고(?) 해서 하나님은 이번에는 사람을 준비시켰습니다.

 

이방인으로 시돈에 살고 있는 사르밧 과부입니다. 당시 과부들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오죽하면 마지막으로 빵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부잣집에게 맡길 수도 있는데, 가난하고 가난한 과부집에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늘 부족했겠죠.

 

이번에는 천사를 시켜 먹게 합니다. 엘리야에게도 위기 찾아옵니다. 불을 내리는 큰 능력의 기적을 경험한 엘리야는 왕을 비롯하여 모든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정반대의 상황으로 치닫게 됩니다.

 

이런 상황을 보고 엘리야가 무기력증에 빠졌습니다. 아마도 성급한 기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낙심한 상태에 빠져버린 겁니다. 위대한 엘리야도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들은 더욱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북이스라엘의 중간지점에 있는 갈멜산에서 남유다 끝인 브엘세바까지 내려와서 혼자 광야에 들어갑니다. 하룻길을 걸어서 광야에 들어갔습니다. 그늘도 별로 없는 로뎀나무 밑에 앉았습니다. 죽기에 적당한 장소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곳에서 죽기를 각오하고 누워서 잠이 들었습니다. 로뎀나무는 낭만의 나무가 아닙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햇빛을 피하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비참한 신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광야의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햇빛은 저주를, 그늘은 은혜를 상징합니다. 로뎀나무는 빗자루같이 뻗어 있어서 그늘이 거의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로뎀나무 그늘에서나마 쉬려고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모습은 광야에서 가장 비참한 모습입니다. 한국에서는 로뎀나무를 좋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독교상담소나 수련원을 로뎀나무의 집이라고 짓는 것을 봅니다. 유대인들이 보면 웃을 겁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누운 엘리야에게 구운 떡과 한 병의 물을 갖다 줍니다. 엘리야가 이것을 먹고 또 죽기를 각오하고 잠을 자고 있습니다. 잠은 무기력증의 현상인가 봅니다. 그래서 천사가 다시 와서 깨워서 먹게 합니다.

 

천사가 자꾸 귀찮게 하니까 40일 동안 걸아서 시내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죽으려고 했던 겁니다. 시내산에서는 동굴에 들어가서 죽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조용히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다정한 말로 가르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마지막 사명을 받습니다.

 

엘리사라는 든든한 제자도 세워지게 되니까 하나님은 엘리야의 끝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데리고 가실 계획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엘리야는 길갈에서 나와 마지막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떠날 계획이었습니다.

 

당시 벧엘과 여리고에 선지자학교가 있었는데, 이들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계획이었습니다. 엘리야는 혼자 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던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엘리사의 반응입니다.

 

왕하 2:2절입니다. 벧엘에 있는 선지자학교에 갔습니다. 선지자생도들도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3절입니다.

 

다시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벧엘 머물기를 간청합니다. 그랬더니 엘리사의 반응이 4절인데 2절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벧엘과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6절도 2절과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지막 기회를 잡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봅니다. 엘리사나 선지자생도들이나 모두 엘리야가 하늘로 들려 올려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알고 있었던 선지자생도의 태도는 2:7절의 말씀처럼 멀리서 바라만 봤습니다. 선지자생도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생활의 실천이 없는 사람들은 은혜를 입지 못합니다. 행하는 일에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엘리사는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깁니다. 민망할 정도로 거부하는 엘리야의 말에도 뜻을 꿉히지 않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룻과 비슷합니다. 룻도 시어머니 나오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니까 1: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엘리사와 룻은 복을 받은 사람들인데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도 엘리사처럼 신앙의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면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엘리사와 선지자생도의 결과는 9절과 16~18절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사는 갑절을 능력을 받았지만 그들은 죽은 시체를 찾으려고 시간만 낭비하게 됩니다.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는 엘리사입니다. 엘리사는 매너리즘에 빠진 선지자생도의 태도와 달랐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는 섬기는 자세로 모든 일을 했습니다.

 

우리가 능력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능력을 받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고 싶어도 일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하는 자리에서 능력이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엘리야와 엘리사는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 말하는데, 불말과 불병거가 둘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일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처럼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갑니다.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동행하는 자의 삶입니다. 창세기 6:9이것이 노아의 족보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엘리야, 에녹, 노아는 의인인데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입니다. 동행은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겁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하는 행동입니다. 나의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동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걷는 것입니다. 시편 1:1절에 보면 길에 서는 겁니다. 그들은 세상의 요구, 자신의 요구가 아닌 하나님의 요구에 따라 행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과 엘리야의 끝은 너무나 대조적인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죽음도 세상 사람들의 죽음과 대조적인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소고한 엘리야를 하나님이 어떻게 위로 하시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계시록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울은 이런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면서 죽음을 의연하게 준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은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되어 원형경기장에서 사자밥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런데 동료를 위해 먼저 사자밥이 되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희생을 보면서 경건한 로마시민이 기독교국가로 개종했다고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 7: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처럼 오늘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능력을 종으로 살았던 엘리야와 자기욕망과 배교를 일삼은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을 통해 우리들은 어떤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난 후에 엘리사처럼 열심히 일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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