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2:12~14절
인생은 다음세대에게 바통을 이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사람에게는 그 사람만이 달려간 구간이 있고, 다음 구간은 다음사람이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각자에게 주어진 그 구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도 그 지도자에게 주어진 구간만 달려가도록 했습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이라면 모세와 엘리야를 뽑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민족의 지도자인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바통을 건네주고, 자기 구간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갔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바통을 건네줄 때, 공통점이 있습니다.
체력이나 영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맞은편 모압평지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눈이 흐려지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상황으로 말하자면 제주도에서 시작하여 걸어서 걸어서 고생고생해서 노량진까지 왔습니다.
노량진에서 보니까 시청이 훤히 보입니다.
이젠 한강을 건너면 됩니다. 게다가 모세는 충분히 건너갈 수 있는 체력과 지도력, 영력은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제 됐다, 여호수아에게 넘기고 너는 노량진에서 인생을 마감하라고 합니다.
니가 아닌 여호수아가 한강을 건너가서 시청에 들어 갈거야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모세가 얼마나 서원했을까요? 사람은 누구나 끝을 보고 싶어 합니다. 업적을 남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멈추라고 합니다. 또 지신을 볼 때 체력이나 영력이 충분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모세는 고집을 부리지 않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바통을 넘겼습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고 있는 2장을 보면 엘리야가 체력이나 영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길갈, 벧엘, 여리고를 순회하면서 선지자생도들을 돌아보는 모습을 보더라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불을 내리게 했던 엘리야는 요단강을 옷으로 쳐 갈라지게 할 정도로 능력도 여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의 구간은 여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엘리야도 서원하지 않았을까요?
사실 엘리야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사명을 마치지 않은 상태입니다.
아람에는 하사엘이 있고, 북이스라엘은 예후가 있습니다.
그들이 아합왕과 북이스라엘을 어떻게 징계할 지를 보고 싶었을 겁니다.
사역의 마지막을 보고 싶었을 겁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서원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할 때, 그는 순종으로 마지막 길을 떠납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바통을 건네줍니다. 하나님은 엘리사에게 갑절의 능력을 주어서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간만 열심히 달려가면 된다는 사실을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이런 면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철저하게 순종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결단을 내렸음을 알게 됩니다. 조금만 더 하면 이름을 남기고, 영광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그들은 순종으로 인생을 마감합니다. 참 본받아야 할 모범인 것 같습니다.
사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목회의 스타일이나 설교내용이 다릅니다.
엘리야는 그의 성격상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냈습니다. 심판의 하나님을 가르쳤습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징계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가뭄을 내리고, 불을 내리고, 바알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이를 통해 아합과 이스라엘백성에게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아니라, 아세라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가 하나님인데 그 분이 복을 주신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찾지 말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엘리야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하나님이다”인데, 자신의 이름에 걸맞게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이에 반해 엘리사는 갑절의 능력을 받았지만 그의 사역은 사람들을 돌보고 긍휼을 베푸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이를 통해 구원하는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개인이든, 공중이든 어려운 사정을 측은히 여겨서 건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마치 엘리사라는 이름의 뜻도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것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사역의 기간도 엘리야는 25년 정도 했다면 엘리사는 50년 넘게 사역을 감당하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주변에서부터 차근차근하게 가르쳐주는 일을 감당합니다.
마치 신약성경에 기록된 세례요한과 예수님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성정으로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말씀을 가르치고 병자들을 고치시는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5~7장은 말씀을 가르치는 산상수훈이 기록되어 있고 8~9장은 10개의 치유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백성들이 갖추어야 할 마음과 행동지침을 가르치고 있다면 10가지의 치유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구원이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자가 참 제자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기적을 통해 참된 구원자는 하나님이고, 그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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