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8~15절
동기가 순수하면 모든 기도는 들어주어야 한다고 오해입니다.
응답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면 안됩니다. 바울은 실패했지만 우리는 실패하면 안됩니다.
순수하지 않는 동기들이 많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안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합니다.
안전한 내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기다려봐, 너는 오늘 충실히 살고 있어, 내일은 내가 준비해 두었으니까”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거절하기도 하고, 기도하기 전에 공급하기도 합니다.
모세가 기도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신명기 3:25~26 “구하옵나니 나를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쪽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여호와께서 너희 때문에 내게 진노하사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내게 이르시기를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반대로 응답하기도 합니다. 이사야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그렇다면 기도할 필요가 없겠네요?
아닙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줄 것을 손에 들고, 달라고 해봐, 뽀뽀해봐 ,참여의 기쁨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입장에서 “나의 노력으로 됐지”라며 오해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도움을 주고 싶은데, 학생들이 이런 말을 하면 부모님들 기분이 어떠신가요? 아 짜증나? 알아서 한다고요? 됐어 그냥 놔?
기도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움을 주고 싶은데, 알아서 한다고요라고 말한다면 하나님은 상당히 기분이 안좋습니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기도하면 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기도와 염려와 공통점은 걱정하는 것입니다. 차이점은 함께 걱정하는 것과 혼자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이 평강과 평화를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실패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동안 기도하고, 실행에 옮겼지만 안들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방문 할 것입니다. 그날이 오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바울과 같은 기도의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성도들은 어떤 관계인가?
성도들은 서로 기도해 주는 관계입니다. 9절입니다.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얼굴도 모릅니다. 본인이 개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된 가족으로 생각하고 기도했습니다. 서로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해 보세요. 은혜가 있을 겁니다. 응답이 있을 겁니다.
성도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면서 위로하는 관계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을 보고 싶은 이유 중에 하나가 신령한 은사를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는 은사집회를 말하지 않습니다. 넘어뜨리고, 방언 집회가 아닙니다.
15절과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 교인들과 특별히 함께 나누기를 원했던 신령한 은사는 한마디로 복음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하나님의, 기가 막히고 신령한 은혜의 복음을 나누기를 원합니다.
12절에 피차 안위함을 얻기 위한 신령한 은사입니다. 은혜를 나누면서 서로 위로가 되는 복음을 나눔입니다.
신령한 은사를 15:29에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주고 받는 위로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게 된 생명에 관한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새생명을 주신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로를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는 지금도 복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변화된 이야기, 성경말씀의 능력을 나눕시다.
성도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14절입니다. 성경은 채무자로 살아가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빚은 값어야합니다. 자신의 자존감의 회복을 위해서입니다.
인생의 빚도 갚아야 합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박사가 있습니다. 그가 아프리카 람바네레로 떠나가기 직전에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가 좋은 의료인의 조건, 또 여러 개의 학위, 보장된 미래와 출세를 포기하고 떠나간다는 것이 그 때만 해도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당신은 이런 결단을 하셨습니까? 앨버트 슈바이처박사는 조용히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빚 갚기 위해 서입니다.” “제가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저라는 인생은 온통 빚으로 만들어졌다? 이것을 제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저는 온통 빚지고 산 것입니다. 이제 빚 갚는 생애를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습니다. 저도 그렇고, 여러분들도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분이 있습니다. 인생은 빚을 졌기 때문에 빚은 갚아가는 과정입니다. 누구나 인생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사명의 빚도 갚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라는 정체성을 갖고, 이방인에게 빚진자로 살았습니다.
기도와 현실은 차이가 있습니다. 실패한 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좌절하지 맙시다. 기도를 쉬지 맙시다. 내 마음이 낙심될 때 기도합시다. "내 맘이 낙심되며 근심에 눌릴 때 주께서 내게 오사 위로해 주시네, 가는 길 캄캄하고 괴로움 많으나 주께서 함께하며 내 짐을 지시네 그 은혜가 족하네 그 은혜가 족하네 이 괴로운 세상 지날 때 그 은혜가 족하네." 찬송가300장을 불러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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