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3:1-6절
교회마다 칭찬이 있고, 책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칭찬이 10이라면 책망은 4개 정도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 책망거리가 잘 보일 텐데, 책망은 아끼고 칭찬을 많이 하십니다.
우리들은 반대입니다. 우리들은 책망이 10이라면 칭찬이 4개밖에 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칭찬을 많이 하고, 격려의 말을 많이 하시길 바랍니다.
주변의 사람에 관한을 말할 때, 가장 듣기 싫은 말 중에 하나는 “저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는 평가일겁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고 안다면 가까이 하기를 꺼리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데교회는 살았으나 죽은 교회이고, 행위의 온전함을 찾지 못할 정도로 죽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교회입니다.
겉과 속이 다른 교회가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은 사데교회가 살았으나 죽은 교회가 된 영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요한계시록 2장에 기록된 4개 교회는 외부적인 박해와 이단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핍박과 공격에 맞서 이기도 하고, 저서 용납하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3장에 기록된 교회는 외부적인 박해나 이단의 공격이 없습니다.
안으로부터 붕괴되는 것을 봅니다.
긴장의 끈을 놓게 하는 사단의 공격에 무지했습니다.
좋은 환경, 조건도 죄를 지을 수 있는 무서운 환경이라는 겁니다.
환경이 좋다고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건물이 좋아졌다고 신앙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 산다고 잘 믿는 것은 아닙니다.
편안해졌다고 믿음이 반드시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형통하고, 고난이나 어려움이 없다는 것에 쉽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편안함에 대한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신앙이 어려서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정당한 신앙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사단이 공격할 필요가 없어서일 경우도 있습니다.
이단이 공격할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놔두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데교회는 이단이 공격할만큼 열정이나 진지함이 없는 교회였습니다.
80~90년 부흥을 경험한 한국교회가 사데교회를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합니다.
사데교회는 살았다고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교회입니다.
살았다는 표현에서 사데교회의 과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데교회는 한 때 주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신앙의 결실을 경험했습니다.
많은 부를 지닌 교인들과, 유명 인사들과, 화려한 외형적 교회 건물를 세웠습니다.
그 열매로 교회는 평온하여 어려움이 없는 상태입니다.
스스로는 살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좋은 환경입니다.
왜냐하면 사데 교회는 황제 숭배의 강요로 인한 박해가 없었습니다.
니골라당이나, 이세벨주의의 간계나, 또한 유대주의의 악한 간계도 없었습니다.
정말 평안한 것같이 보이기 때문에 스스로 살아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데교회는 죽었다고 합니다.
영적으로 잠든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자극이 와도 반응하지 않고, 무감각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의지나 의욕이 발현되지 않는 무기력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부흥의 열정이 식어버려 무기력함에 빠진 교회들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행위가 있기는 한데 온전한 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행위가 완성에 이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정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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