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41~45절
하나님이 직접 개개인에게 준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면서 살려고 주신 계명입니다.
십계명을 설교하면서 저의 언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1계명은 나와 너 사이에 끼어 있으면 안 된다. 우상을 만들어 섬기면 안 된다.
2계명은 나를 대신하는 가짜를 만들면 안 된다.
3계명은 내 이름에 먹칠하면서 살면 안 된다.
4계명은 자주 내 곁에 앉아서 편안히 쉼을 가져라.
5계명은 부모에게 잘해라.
6계명부터는 어떻게 이웃을 사랑할 것인가를 알려준 계명입니다.
6계명은 이웃을 살려주라.
7계명은 이웃의 순결과 가정을 복되게 하라.
8계명은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9계명은 사실이면서 진실을 말하는 증인으로 살아라.
10계명은 욕심도 바른 방향을 정하면 자족하면서 살 수 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십계명을 마치면서 묵상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무엇으로 드러날까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실체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이유를 본문에서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섬기다 죽기 위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사랑에 대한 표현은 섬김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그래서 사랑의 공동체는 섬김이 가득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흘러가도록 하는 운동이 섬김입니다.
받아서 나누는 일입니다.
나누는데, 흘러가도록 하는데 전혀 아깝지 않고 기쁨과 감사가 넘칩니다.
고인 물은 썩게 되어 있습니다.
매일매일 받은 은혜를 흘러가도록 하는 ‘맑은 시냇물 운동’ ‘깊은 산골 옹달샘’운동을 하셔야 합니다.
받는 것도 좋지만 주는 것이 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의 표현하면서 섬기려고 하는데, 섬김을 방해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4가지 사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첫 번째는 불평입니다.
십계명을 받은 이스라엘백성은 광야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섬김의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실패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바로 불평이었다는 것을 민수기는 증명합니다.
민수기 11:1~3절부터 시작된 불평은 10번이나 등장하게 됩니다.
결정적인 불평 사건은 민수기 13~14정에 기록된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 있었던 불평이었습니다.
불평은 사랑의 섬김을 방해합니다.
불평은 내 마음에 안들기 때문에 시작됩니다.
내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불평보다는 감사와 찬양으로, 사랑의 섬김으로 바뀝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둘째는 교만입니다.
본문의 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걸어가고 있습니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각이 다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행보가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길’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메시야의 왕국을 이룰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 나라가 완성되면 자신들은 국가의 중요한 요직을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찾아가서 자신들이 큰일에 쓰임 받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10명의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냈습니다.
너희의 자리가 아니니까 나서지 말라는 겁니다.
자신들도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백성들을 다스리고 싶다는 의도입니다.
신학자 헨리 나우웬은 이런 제자들의 상태를 통찰력 있는 말로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이 되기가 더 쉽고, 사람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을 지배하기가 더 쉬운 것 같다.” 인간은 하나님도 지배하려고 한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이 자기 말대로 해 주시기를 더 바란다. 인간은 높아지려고 하는 끊임없는 욕망덩어리이다.“
대통령으로부터 모든 공무원은 백성을 섬기는 직장입니다.
그런데 높이 올라갔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출세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니까 백성들을 섬기지 않습니다.
높아졌다는 교만은 섬김을 방해합니다.
반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수난을 예고했듯이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에게 조롱당할 것입니다.
온갖 수모를 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관심은 섬김으로 인류를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원리와 다른 법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42절-세상의 법칙입니다.
내가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위로 올라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권세를 가지고 부리는데 관심을 갖습니다.
43절- 다른 법칙을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너희들이 도달하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 나라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살고 싶다면 그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나라에서 관심은 어떻게 섬길 것인가이다.
44절-그 나라에서는 먼저 되려고 밤잠을 자지 못하고, 마음 쓸 필요가 없다.
너희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하는 것을 배워서 종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법칙이라는 겁니다.
45절- 내가 이 땅에 온 목적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오지 않았다.
첫째가 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의 종노릇을 각오하고 섬김의 삶을 살면, 높아지려는 마음이 사라진다.
높아지려고 종노릇을 한 것이 아닐 때, 비로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
높아지려고 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제자들에게 그 나라에 어울리는 삶에 관심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그 전에 제자들의 관심은 올라감, 높은 자리, 부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내려감, 섬김, 구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랑의 섬김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섬김도 나를 넘어 이웃, 이웃에 이웃으로 점점 넓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높아지려는 마음, 교만은 사랑의 섬김을 방해합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세 번째는 잘난체입니다.
순수하지 않으면 섬김에 방해가 됩니다.
어느 교회에 실제로 있는 일입니다.
사회적으로 직장도 좋고, 생활 형편이 좋으신 분이 교회를 섬깁니다.
그런데 그분으로 인해 목사님과 다른 교우들이 불편합니다.
왜 그럴까요?
자신은 실력이 있어서 쓰임 받는다고 생각하기에 그분의 섬김은 자랑이 됩니다.
자신이 이룬 업적이 됩니다. 우쭐거리게 됩니다.
이런 분들에게 디모데후서 2:20~21절(신약 344쪽)는 답을 주고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금 그릇이어야 쓰임 받는다는 생각에, 금 그릇이 되는 것에 목표를 두지 말라는 겁니다.
은 그릇이어야 쓰임 받는다는 생각에, 은 그릇이 되지 못한 것에 후회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의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깨끗한 그릇입니다. 순종의 그릇입니다.
순수한 마음입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면 우쭐거리지 않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섬김의 대가로 칭찬을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섬김을 방해하는 네 번째는 비교의식입니다.
나만 힘들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섬기는 현장에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38~42절(111쪽)에 등장하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예입니다.
왜 이런 서운함이 생기게 될까요?
1) 기질과 성격의 차이가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자매인데 마르다와 마리아는 기질과 성격이 다릅니다.
마르다에 기록을 종합해 볼 때(오빠 나사로가 죽었을 때(요 11장), 예수님을 위해 잔치할 때(요12장), 분주하고 사교적입니다.
부지런히 활동하는 성격입니다.
열정적입니다.
속마음을 솔직히 표현하는 편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하게 보이는 외향적입니다.
반면 마리아는 차분하고 감수성이 예민합니다. 조용하며 사색적입니다.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하지 않는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두 자매의 공통점은 모두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말씀을 사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표현이 각각 다르게 나타날 뿐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과 12명의 제자들에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줌으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영적인 교감을 통하여, 각각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을 섬겼습니다.
누가 먼저 마음이 상할까요?
일이 많아 분주한 사람이 먼저 마음이 상합니다.
외형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입니다.
보통 내면적인 사람이 상처를 먼저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마르다와 마리아를 비교해 볼 때 마르다가 먼저 마음이 상합니다.
마르다도 빨라가서 말씀을 듣고 싶고, 말씀을 들으려고 영접한 건데, 동생 마리아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고 말씀만 듣고 있으니까 밉상스럽게 보였습니다.
자신도 예수님에게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기를 원했지만 대접하는 일 때문에 못하고 있는데, 동생이 도와주면 빨리 마치고 자신도 말씀을 들을 수 있는데, 그것을 하지 못하니까 마음에 화가 치밀었던 것입니다.
섬김의 현장에서 마르다와 마리아가 있습니다.
기질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표현의 차이일 뿐입니다.
비교는 아니 서운함은 사랑의 섬김을 방해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섬김으로 표현됩니다.
저도 여러분을 섬기기 위해 말씀을 맡은 자로 최선을 다합니다.
그리고 섬김을 방해하는 4가지를 자주 묵상합니다.
서로 섬김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공동체를 만들어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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