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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비유

가라씨를 남겨 두라고 하신 이유

by ysong 2024. 1. 23.

마태복음 13:36~43

지난주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나누었습니다.

부와 대한 바른 생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한 부자는 부자이지만 거지와 같은 가치관으로 살았습니다.

한 부자는 부를 사치스러운 명품으로 치장하는 데 낭비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긍휼하심을 바라는 진정한 부자로 살았습니다.

 

몇 주 전 1~9절의 말씀으로 씨 뿌리는 자의 넉넉함을 봤습니다.

천국은 낭비로 이룬 결실로 확장된다는 천국의 미래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씨뿌리는 자가 길가, 돌밭, 가시덤불에 뿌려져도 묵묵히 뿌립니다.

많이 뿌립니다.

가능성이 없는 그곳에서도 뿌립니다.

제대로만 뿌려지면 백배의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속상해하지 않습니다. 낙망하지 않습니다. 소망을 갖고 뿌립니다.

 

반대로 원수도 잠자지 않고 가라지를 뿌립니다.

곡식이 자라는 좋은 밭에 가라지를 뿌립니다.

원수는 가라지를 뿌려 곡식이 온전히 자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처음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너무나 흡사해서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가라지 비유를 통해 이 땅에서 이뤄가고 있는 천국인 교회의 현실을 알려주고, 영적인 세계를 알려주고, 서로 정죄하지 말고, 심판의 때까지 기다리고, 주님께 맡길 것을 교훈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려주신 대상은 누군가요?

13:2절에 등장하는 인물과 동일합니다.

제자와 무리가 썩인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리지 비유를 24~30절에 들려주셨습니다.

본문은 무리가 떠나고 어느 집에 들어가 제자들에게 비유를 해석하고 적용한 내용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24~30절이고, 해석은 37~40, 굳이 구분하자면 41~43절은 적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의 내용입니다.

천국에 대한 설명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잘 때에 원수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렸습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가 되어야 가라지가 보입니다.

밭에서 가라지를 본 종들이 주인에게 묻습니다.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왜 자란 겁니까?

주인이 대답합니다.

원수가 그랬다고 합니다.

종들이 주인에게 가라지를 뽑겠다고 합니다.

여기에 종들은 신실합니다.

주인이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지 말라고 합니다.

주인은 종들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것을 염려했습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먼저 가리지를 거두어 단으로 묶어 불사르라고 합니다.

 

제자들에게 해석한 내용입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입니다. 예수님입니다.

밭은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있습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입니다. 교회입니다.

원수는 마귀입니다.

추수 때는 세상 끝입니다.

악한 것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가리지를 뿌렸습니다.

종말의 그림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가라지 비유를 제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교훈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인의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히 함께하지 않지만, 추수 때까지 함께 공존합니다.

너희들이 앞으로 사역하는 공동체 안에도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곡식과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지상의 모든 교회 중 완전한 교회는 없는 까닭입니다.

 

성령이 임한 한 사람 안에도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빛과 그림자가 같이 있습니다.

선한 역사가 일어나면 악한 일도 일어나려고 합니다.

 

나는 곡식이고 상대방은 가라지이어야 하는가?

어떤 때는 내가 가라지 역할을 할 때가 있습니다.

가라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나만 선하고, 정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사울 왕은 처음에 곡식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된 이후 욕심에 사로잡혀 점점 가라지로 변했습니다.

 

반대로 사도행전에 등장한 사울은 처음에 가라지처럼 보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를 잡아 옥에 가두고 핍박한 가라지처럼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한 가라지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점점 그는 사울에서 바울로 변하면서 곡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누가 곡식이고, 누가 가라지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은 늘 곡식이고, 상대방은 늘 가라지라고 판단합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세리 중에 누가 곡식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바리새인은 곡식이고 세리와 죄인은 가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가룟 유다는 자신이 가라지라고 생각했을까요?

다른 제자들도 회계를 맡고 있는 가룟 유다를 가라지라고 생각했을까요?

스스로 곡식이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까지 정죄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이단들은 기존 교회를 가라지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가리지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아직 곡식과 가리지를 가릴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그래서 원래 곡식인 사람은 수확 때까지 견뎌내어야 합니다.

가라지인 자들은 곡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밭에서 곡식이었던 것은 곡식이고, 가라지였던 것은 가라지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밭 교회에서는 곡식이었던 것이 때로는 가라지가 되기도 하고, 가라지였던 것이 때로는 곡식이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어떤 가라지라도 곡식이 됩니다.

내 눈에 보이는 가라지는 가라지가 아닐 수 있습니다.

인간 잣대로 가리지를 뽑기 시작하면 피바다가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웠지만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습니까?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고 복음의 씨를 계속 뿌릴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완전무결한 교회를 추구한 운동들이 있었습니다.

완전무결을 추구한 운동은 한시적으로 끝났습니다.

경건 운동, 교회 재건 운동 등 한시적으로 끝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처음은 좋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서로 옳고 그름에 판단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랑이 식어가면서 냉랭한 공동체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종들에게 그때그때 가리지를 제거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29절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알곡이 뽑힐 것을 염려했습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얽혀 있기에 뽑다가 알곡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가라지를 잠시 잠깐 허용하신다는 것은 나 때문입니다.

그때그때 뽑으면 나도 함께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들과 연결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참되 성도들을 위해서 참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알곡 신자를 더 염려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의 종은 반응은 다릅니다.

가라지를 보면 제거하려고 합니다.

가라지를 제거하려고 했던 교회에서는 선한 어린양들이 다칩니다.

가라지를 제거하겠다고 정의의 이름으로 싸우면, 믿음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믿음을 잃고 떠난 자가 많아집니다.

주님은 반응은 예나 지금이나 가만두어라입니다.

 

한때 바울이 속한 가말리엘학파가 있습니다.

가말리엘이 예수운동에 대해 평가한 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38~39절입니다.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하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으로부터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면 너희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영적인 분별력 있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가라지를 뽑으려고 하다가 나도 상처를 받습니다.

 

그런데 가라지처럼 보이는 사람이 곡식처럼 행동하면 상처가 되지 않습니까?

악인이 잘나가는 것을 보면 마음이 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만 있으신가라고 질문이 생깁니다.

하박국도 질문했고, 시편 73편을 쓴 시인도 질문했고, 예레미야도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법을 훈련시켰고, 성전에 들어가야 깨닫도록 했고, 마지막 때에 임할 때 알게 하셨습니다.

가라지가 곡식의 행사를 해도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나를 훈련 시키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비유는 영적인 세계를 알려줍니다.

영적인 세계에 민감해야 합니다.

원수는 잠을 자지 않습니다.

어둠의 일이 실제가 존재합니다.

원수는 내 안에 있는 욕망, 두려움을 부추깁니다.

거짓 화평, 헛된 욕망을 좇게 합니다.

악마적 힘,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제3의 힘이 작용합니다.

인식하고 사는 것이 필요합니다.

원수는 뿔이 달리지도 않았고, 가장 진짜처럼 행동합니다.

가장 진짜처럼 보인 바리새인이 주님의 일을 방해하는 원수입니다.

 

심판의 때가 분명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38절의 말씀처럼 좋은 씨입니다.

천국의 아들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은 자들입니다.

구주로 영접한 자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인가?

주님인가? 나인가?

각자가 알고 있습니다.

나는 알곡인가 가라지인가?

 

주님은 곡식과 가라지 비유를 통해 악인 100명이 심판받는 것보다 의인 1명이 열매 맺는 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지금은 편을 가르고 정죄하는 심판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은혜의 때이고 복음을 뿌리는 때입니다.

 

적용) 더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가라지는 빨리 자라고 깊게 뿌리를 내립니다.

추수 때가 되어도 고개를 듭니다.

달린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곡식은 익으면 고개를 숙입니다.

알곡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알곡은 삶의 표증이 따라옵니다.

예수를 향해 자라갑니다.

점점 거룩해지려고 합니다.

더하는 인생이 됩니다.

베드로후서 1:4~7절입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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