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수기 22:1~20절
이스라엘백성들이 옛날에 겪었던 사건으로만 민수기를 보지 않길 바랍니다.
지금 나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기를 바랍니다.
각자 보이는 말씀을 갖고 광야와 같은 인생에서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경험하시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고,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경이 옛날이야기를 하는 동화나 신화와 다른 이유입니다.
광야를 통과한 이스라엘백성은 가나안 땅 여리고 맞은편 요단강 동편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단동편은 지금 요르단에 속한 곳입니다.
요단강만 건너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자리에서 모세가 다음세대를 위한 유언과 같은 3편의 설교를 들려줍니다.
그 설교를 요약한 말씀이 신명기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마지막 통과할 관문이 있어 보입니다.
22~25장까지 다르고 있는 모압 왕 발락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사건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압 왕 발락이 브올의 아들 발람을 초청하는 이야기입니다.
발람이 어떤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유혹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승리한 소식을 지난주에 살펴봤습니다.
아모리 왕 시혼을 물리치고, 바산 왕 옥을 처서 그 땅을 점령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었던 모압 왕 발락이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남이 안 되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주변이 그렇게 되니까, 자신에게도 어떤 위협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 많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의 숫자가 많아서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숫자가 많은 것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발락은 두려움을 이스라엘이 소가 밭의 풀을 뜯어먹는 것처럼 자신들을 집어 삼킬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이 갖고 있는 두려움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혼자 가공한 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모압 왕 발락을 해하려는 흔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9절에 따르면 모세는 당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압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 그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았고, 롯의 후손에 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형의 후손인 에둠과 싸우지 말라고 했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과도 싸우지 말라고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깨닫지 못한 모압 왕 발락은 스스로 무슨 방책을 세워야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가 생각해낸 방책이 바로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백성을 저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초청하게 된 배경입니다.
4절 이후부터는 발락이 발람을 초청하는 이야기를 비교적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에서까지 언급된 발람은 누구인가?
발람은 메소포타미아 브돌 출신입니다.
브돌은 아브라함이 떠났던 하란과 가까운 곳이며, 라반이 살았던 땅입니다.
모압에서 6백km 떨어진 곳이기도 합니다.
발람에 대해서는 두 의견으로 갈립니다.
복채를 받고 점을 처 주는 술사라는 의견입니다.
마술과 주술로 성공한 영매로 보는 견해입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모압 왕 발락이 복채를 많이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견해는 위선적인 선지자라는 의견입니다.
발람을 요한계시록에서 거짓 선지자의 대명사로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의 유혹과 물질의 유혹에 넘어간 타락한 선지자란 것입니다.
벧후 2:15절~16절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베드로사도는 발람을 바른 길에 떠난 자,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 미친 행동을 하는 자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11절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삯을 위하여 어그러진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옆길로 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곧장 따라가지 않고 곁길로 샌 사람입니다.
점쟁이들이 하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선지자로 선지자 노릇을 하겠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요한계시록 2:14절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을 보면 두 번째 견해가 타당해 보입니다.
발람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전한 사람이었는데, 성공하면서 점차 돈과 욕망을 사로잡혀 타락한 선지자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유명한 술사인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을 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술사로 볼 수도 있습니다.
22~24장, 25정에는 발람의 이름은 없지만 그의 술책으로 이스라엘백성이 유혹에 넘어간 이야기까지 포함하면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거짓선지자의 피해가 얼마나 크고 그에 따른 광야 마지막 시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름 할 수 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초정한 이유는 자기 대신 복을 빌고, 자기 대신 저주를 빌어 달라는 것입니다.(6절)
발락의 명을 받들어 모압 장로와 미디안 장로들이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 왔습니다.
이스라엘을 백성을 저주해 달라고 요청한 뜻을 전합니다.
발람이 참된 선지자라면 어떻게 행동했어야 할까요?
무슨 말이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넜다. 광야 40년의 훈련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법을 배웠다. 나는 그들을 저주할 수 없다. 돌아가라. 이렇게 단호하게 대답을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발람은 우리 집에서 하룻 밤 자라, 내가 하나님께 물어서 알아보겠다고 여지를 남기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행동을 했을까요? 그들이 가지고 온 복채에 마음이 조금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함께 가지 말라,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저주를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기적과 같은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저주를 이긴 예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모압의 장로들이 돌아가서 왕에게 고합니다.
발람이 함께 오기를 거절했습니다. 모압의 장로들이 발락에게 보고한 내용에는 나머지 2 가지 사실이 빠져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 복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장로들이 오해하게 된 것은 발람의 이중적인 태도 때문일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같은데 거래의 상대방인 발락의 희망의 싹을 잘라버리지는 않게 모호한 태도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들의 보고를 들은 발락은 발람에게 줄 더 많은 복채를 준비하게 됩니다.
발람이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줄을 알고 더 높은 고관들을 보낸 것입니다.
백지수표와 함께 복채도 이전보다 더 많이 보낸 것입니다.
복채를 올려줘야겠다. 원하는 것을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나요?
그래서 그런지 고관들이 두 번째로 찾아왔을 때 발람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18~19절입니다.
18절에 물질에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감하지 않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룻 밤 유숙하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는 들어야 하는데 욕심이 있어서 가고는 싶습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마음이 넘어갔던 것입니다.
단호하게 돌려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이 빼앗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서 갈 수는 없고, 그렇다고 굴러들어온 돈을 물리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발람이 하나님께서 허락해 달라고 떼를 쓴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럴까 저럴까 하는 사람이 자꾸 가겠다고 하면 가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붙여서 가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기뻐서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떼를 쓰니까 가라고 하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주는 사건이 바로 발람과 나귀의 사건입니다.
나귀사건은 발람이 가는데 하나님의 진노를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손길로 발람이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탕자인 자식이 유산을 달라고 하니까 돈을 주어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나귀는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두려워하는데, 발람은 보지 못합니다.
한나는 기도하는데 엘리제사장은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귀가 발람에게 말하는 사건이 나온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하니까 나귀와 말하게 됩니다.
적용) 발람이 무엇 때문에 따라갔나?
바람이 어디서 넘어갔나?
17절입니다.
무돈, 권력,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것에 넘어갔습니다.
직장인들이 이직하는 경우도 돈과 지위가 아닙니까?
목사들이 넘어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더 좋은 조건의 교회, 더 많은 성도가 있는 교회, 명예를 가질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까?
깨어 경성해 있지 않으면 넘어갑니다.
우상이 복잡해지면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우상이 자기의 신념, 가치관 이념이 되면 상당히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자신에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가 없으면 모두가 발람처럼 넘어집니다.
1)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끝까지 쫓을 수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내적인 힘이 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 없다고 합니다.
2) 하나님의 뜻을 무엇인지를 온전히 알 때 끝까지 쫓을 수 있습니다.
종교생활에 익숙해지면 하나님께 묻지 않고 결행을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귀만도 못하는 사람이 됩니다.
발람이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하면서, 아니 전하의 최고의 술사라고 하면서 나귀만도 못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나귀에게 책망을 듣는 존재가 됩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서 나귀가 보는 천사도 보지 못하고 나중에 보는 존재가 되었구나!
봐도 못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욕망에 따라 움직이니까 겪게 되는 일입니다.
사람이 정신이 없어서 나귀만도 못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발람이 겉으로 표현한 것이 속마음에 이르면 됩니다.
18절의 말씀이 진짜이면 됩니다.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다는 정신입니다.
있는 그대로 말씀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단호하게 뿌리치면 됩니다.
내가 마음을 빼앗긴 지점이 어디인가를 생각하고 오늘의 말씀을 적용하는 한 주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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