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0:1~7절
아브라함의 신앙이 수준이 상당히 깊어 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막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기근을 만나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는데, 이번에도 동일하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들어와 25년 세월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을 했지만 여전히 실수하는 그의 연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을 자세히 기록한 목적이 무엇인가?
1~2절-이사를 가서 그날에 거주합니다.
소돔과 멸망을 보고 자리를 옮겨 서쪽으로 이사를 간 것으로 추축됩니다.
소돔의 멸망을 보고 아브라함의 마음에 두려움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사를 간 곳에서 또 다시 두려움이 생깁니다.
다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11절에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고 한 아브라함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두려움이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험을 하면서 신앙이 많이 성장했는데 두려움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소돔과 고모라의 사건과 사고를 보고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도 잘못하면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찾아오니까 믿음이 약해졌던 것입니다.
결국 그랄에 이르러서는 세상과 타협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으로 드러났던 것입니다.
사라가 얼마나 예뻤을까요?
사라의 나이가 89세입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길기 때문에 현재의 나이로 환산하여 사라의 신체나이를 45세정도 볼 수 있다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을 볼 때 약간 억지스러운 해석으로 보입니다.
그랄 왕 아비멜렉(나의 아버지는 왕이다)은 왕의 칭호입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한 것은 사라가 아름다워서가 아닙니다.
12장은 사라가 아름다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0장은 사라의 미모에 대한 말이 없습니다.
3~4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사라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볼 때 외모 때문에 취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거부이고 성읍인 그랄에서 진을 치고 산다고 생각해 보면 사라를 취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랄은 작은 성읍입니다. 아브라함의 식솔은 1~2천명 정도 됩니다. 아비멜렉에게 아브라함은 위협이 되는 존재이므로 가급적 정략결혼을 함으로 평화를 취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이같은 정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취한 것은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9절-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을 책망을 합니다.
이방인의 입술로 하나님의 백성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내년 이 맘 때라는 사라를 통해 자손을 주겠다고 구체적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11~13절-아브라함의 답변에서 연약해진 신앙의 생태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두려움이 없어서 나를 죽일까 걱정했다는 것입니다.
실상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식을 낳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비겁함을 꾸짖지 않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경험을 되살려서 담대하게 아내라고 하고 나를 의지하고 맞서야지라면서 책망할 수 있을 텐데, 도리어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책망합니다.
그랄 왕이 아브라함에게 합당치 못한 일을 했느냐고 꾸짖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지자로 합니다. 선지자는 내 백성이다는 의미입니다. 무조건 편드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 좋지만 하나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섬세하게 일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아비멜렉에게 현몽하여 경고합니다.
벌을 내려서 나라가 망하게 한다고 위협합니다.
하나님이 직접개입하십니다.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기 전에 현몽할 수 있는데,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연약함을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318명으로 롯을 구할 정도로 용감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비급하고 연약합니다.
하나님이 연약함을 그대로 용납해 주셨다는 것인데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사랑하신 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부족한 그대로 받아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여주시는 것을 볼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감격했을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용납했다는 사실 때문에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부족함을 깨달을 때 내 보습 이내로 받아 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도 부족한 모습을 보일 때 그대로 받아 주셔야 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생사 여부가 하나님의 거룩한 뜻 가운데 나온다는 것입니다.
험난한 길에서도 늘 보호하고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실수해도 버리지 않고 오랜 세월 동안 믿음의 조상으로 빚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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