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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님

by ysong 2020. 12. 9.

마가복음 2 13~17

기독교의 핵심은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알 고 있습니까? 간혹 성도라고 하시는 분들 중에도 예수님을 4대성인(부처, 마호메트, 공자) 중 한 분으로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못했다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이 땅에는 사는 성인, 군자라고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을 읽어보시면, 요한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고, 완전한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내용이 거짓이라면 인류 최대의 사기사건이 됩니다. 이 내용이 진실이라면 이처럼 인류 역사상 이렇게 엄청난 사건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2천년 동안 수억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지금도 수억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감격적인 사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인간되었는데, 어느 왕의 아들이나, 고위급 아들로, 세계의 갑부의 아들로 오지 않고 가장 낮고 천한 자리로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짐을 생각할 때, 우리의 삶의 자리와 비교해 보면 우리들은 예수님의 삶의 자리에 동참한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 앉아 본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부목사시절 단칸방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성도의 가정에 심방을 가서 예배를 드리면, 말할 수 없는 은혜가 있어서, 목사가 되길 잘했다고 생각했던 적은 있었습니다. 대학을 다닐 때 학교 근처에 있었던 사당동 달동네, 봉천동 달동네에 가보기는 했지만 예수님처럼 낮은 자리에 내려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은 눅 2:13~14절에 기록된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 중에 평화를 끼치는 자가 출생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낮은 자리로 오셨는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위로하기 위해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는지를 살펴보고 은혜의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첫 번째는 무명인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때가 차서 하나님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때가 차서 보내시는 분이라고는 미끼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너무 가난하고 영향력이 없는 무명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좀 산다고 하시는 부모들은 자녀들을 장가나 시집을 보내더라도 집을 장만해 주거나, 처음 시작하는데 어렵지 않도록 도움을 주곤 합니다. 그런데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 하나님은 당시 최고의 가문이나 왕족을 선택하셔서 태어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도 그것이 예수님을 세상에 알리는데 더 유리하고 빠른 지름길일 수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도 초라한 부모를 선택했습니다. 그것도 약혼만 하고 부부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는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잘 살지도 못했습니다. 마치 갈 4:4절에 때가 차매라는 말씀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준비된 모습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부모들보다 더 준비하시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가난한지를 짐작하게 해 주는 말씀은 눅 2:24절입니다.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는 말씀입니다. 레위기 12:8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산비둘기나 집비둘기는 어린양을 바치기 힘든 여인들이 아들과 딸을 낳고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한 제물이었습니다. 그만큼 가난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가나한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했을까요? 가난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가난한 부모를 원망하지 못하도록, 가난 때문에 위축되지 않도록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비둘기밖에 바칠 수 없는 요셉과 마리아를 선택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것이 없어 고민하는 부모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하나님은 가나한 부모를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두 번째는 태어난 장소와 환경입니다. 우리는 아이가 비행기, 택시에서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비행기에서 태어나면 평생 동안 비행기를 탈 수 있는 특권을 준다는 말도 듣습니다. 하지만 마굿간에 태어나서 아이를 구유=여물통에 눕혔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합니다. 짐승의 똥오줌 냄새가 진동하는 구유간에서의 탄생은 결코 미화된 목가적인 풍경이 아닙니다.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준비를 못했을까요? 여관방 하나도 준비하시지 못하는 하나님, 산모도 미리 대비시켜 놓아야 하지 않았을까요. 때가 차서 시간이 되었는데 준비된 것은 없었을 때, 아마도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하지 않았을까요. “아이의 위생을 생각하셔 최소한의 장소를 미리 준비해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무균시설도 없고,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도록 하는 유리벽도 없는 마굿간만 준비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곳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비위생적인 장소였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아들을 구유에 눕히도록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눈이 오면 우산을 준비시켜 주고, 추우면 두꺼운 옷을 입히는 게 부모의 마음인데, 하나님은 너무 무관심한 모습은 아닙니까? 천사들이 선포한 기쁜 소식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환경에서 예수님은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우리들과 예수님은 공통점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조산원, 잘 꾸며진 시설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간적인 차이는 있지만 괜찮은 중간 가문입니다. 그래서 밑바닥을 선택하신 예수님을 보면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낮음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서입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환경에 허락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런 환경에 처한 사람, 머리 둘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과 함께 하라고 그렇게 낮아지도록 했던 것은 아닐까요. 가장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가장 비위생적인 환경에 예수님을 눕히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 하시기에 그 자리를 허락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세 번째는 축하객의 신분입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제일 먼저 찾아온 축하객은 목자였습니다. 2:20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목동을 생각하면 낭만적인 직업으로 보입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시를 짓고, 긴 지팡이를 들고 넓은 들판의 주인인양 풀을 먹이는 목동이 생각납니다. 하지만 당시 목자들은 사회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어느 정도로 취급을 당하느냐면 법적인 증인이 될 수 없는 신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왕중의 왕이 오셨는데 그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들에서 양치는 비천한 목자들이었습니다. 다만 예외적인 것이 있었다면 별을 보며 미래를 예언하는 동방의 박사들의 반가운 방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문은 당시 정치 권력자인 헤롯의 불혈같은 진노에 맞닥뜨립니다. 수많은 어린 생명의 살육이라는 끔찍하고 암울한 사건을 동반했습니다.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예언자의 예언이 있었는데 찾아온 사람은 너무나 비참한 신분의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최소한 왕 중의 왕이 탄생했으니 바리새인과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찾아오도록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정치적으로 유력자가 찾아와서 경배하도록 하지 않았을까요. 그래야 왕중의 왕의 탄생에 걸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렇게 초라하고 비천한 축하객만 준비해 놓으셨을까요.

 

또 하나님은 몇 사람만이 어린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했을까요. 요셉과 마리아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산헐이 맑아지는 30일 지난후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에 찾아갔습니다. 2:22~23 “22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그 곳에서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5절에 시므온입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자입니다. 그러나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런 태도로 살기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었습니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는 제물 장사를 하고, 로마정부와 밀약을 맺고 타락한 종교 지도자가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산다는 것은 어쩌면 시므온은 왕따이었을 겁니다. 그런 시므온만이 예수님을 알아 봤습니다.

 

최소한 예수님이 큰 사람으로 활동하기에는 대제사장이나 로마정부의 총독정도가 알아봐야 영향력 있는 위치에서 활동하기 유리 할 텐데요. 자녀들이 높은 자리, 출세한 자리에 가기 위해서 유력한 사람들을 만나도록 하지 않습니까. 그들과 사귀는 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 영향력 있는 자리에 빨리 갈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는데 유리하지 않느냐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또 한 분은 나이 많은 안나라는 선지자입니다. 2:36~37“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결혼을 해서 남편 7년을 살았는데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그 후 84년 혼자 살면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마치 나이 많아 교회에서 기도하는 권사님처럼 그는 인기 있고 능력 있는 분이 아니었을 겁니다. 안나만이 어린 예수님을 알아보록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하층민인 목자, 의롭고 경건하지만 외롭게 주님의 길을 걸었던 시므온, 평생 기도로 살아온 안나 선지자들만 알아보도록 하셨을까요. 예수님이 신분은 낮지만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기도와 주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과 함께 하겠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성전을 지키며 기도하는 우리들과 함께 하겠다는 하나님의 표현입니다. 의롭게 살려고 고민하는 우리들과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네 번째는 애굽으로 피신시킨 사건입니다. 태어나면서 생명에 위협을 받았습니다. 2:13~14“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하나님은 북쪽인 레바논과 앗수르는 풍족한 땅인 줄 알고 있습니다. 강유역이어서 넓은 초원이 있습니다. 아들을 생각했다면 그런 곳으로 피신을 시키시지 않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북쪽이 아닌 사막을 지나야 하는 애굽에서 피신하도록 하셨을까요. 애굽을 가기 위해서는 촉박한 사막을 지나가야 하는데 말입니다.

 

지금도 요셉과 마리아가 지나갔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막의 길은 지구상의 오지로 남아 있습니다. 개발이 전혀 되지 않은 척박한 곳이었습니다. 40일밖에 안되는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사막은 산모가 가기엔 너무나 거친 길이었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면 강과 초원이 있고, 날씨도 선선한 북쪽으로 가도록 했을 것입니다. 자식을 그렇게 까지 고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달랐습니다. 예수님을 낮아지셔도 너무 낮아지시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다섯 번째는 살아온 고향인 갈릴리 촌동네 나사렛입니다. 2:23절입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돌아와서 어디서 살아가야 할까요. 사람이 출세하기 위해서는 도시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말에도 말은 제주도에, 사람은 한양에 보내야 한다는 말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종교,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예수님을 영향력 있는 곳인 예루살렘 살도록 하는 것이 이후 활동하기에 유리할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갈릴리(경기도-지역) 촌동네 나사렛이었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살 동네가 되지 못합니다. 그곳은 민족을 이끌만한 큰 인물이 나올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46절에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할 정도입니다. 인물이 나올 곳이 못됩니다. 갈릴리 사는 것만 해도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이방 갈릴리 불릴 정도로 출세와 거리가 먼 지역이었습니다. 그곳사람들은 독특한 사투리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들에게 사투리 쓰면 안되라고 가르쳤을 겁니다.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는 지역입니다. 누가복음 13:1절 소외된 지역, 못사는 지역입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내보내려고 했을 겁니다. 그런 지역에서 예수님은 자라나도록 하셨습니다. 중심지가 아닌 이방 갈릴리에서 가장 낙후된 나사렛에서 예수님을 자라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낮아지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삶의 여정은 낮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다섯 번째는 세례요한의 세례입니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요한은 낙타 털옷과 석청을 먹었습니다. 운둔하는 가문입니다, 지나친 경건주의자입니다. 그는 제도권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은 혁명의 투사로 생각될 정도의 인상입니다. 요한의 영적인 세력이 커지자 군인들까지 몰려들었습니다.

 

큰일을 하려면 제사장에게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제도권 안에서 활동을 해야 영향력 있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들이 영향력을 받는 것과 비슷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공생애를 시작하기 앞서 사막에서 40일 금식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사막으로 갔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악한 영은 사막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탄이 살고 있기 때문에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했습니다. 전혀 가치가 없는 땅, 개발하지 않는 땅, , 나무도 없는 땅입니다. 인생의 길에서 큰 실패한 사람들이 피신한 곳입니다. 살인자 모세가 피신한 곳이 사막이었습니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은 사막을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40일간 금식하면서 가장 낮은 자리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의 여섯 번째는 제자의 직업입니다. 예수님은 본격적인 사역을 위해 갈릴리 해변가에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사실 그들을 부르면 안됩니다. 좋은 제자를 스카우트 해야 스승의 능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좋은 야구팀은 높은 연봉을 주고 좋은 서수를 스카우트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른 제자들인 어부들은 잘못된 운명, 신분 상승에 대한 열등감, 비전, 꿈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찬은 자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볼 때는 두려움을 가졌는데 제자들을 보면 하잖게 여겼을 겁니다. 제자들을 보니까 반란을 꾸미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을 겁니다. 그들은 무식하고 하층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세리를 제자로 부른 것은 치명적인 문제였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세리들은 로마 당국에 1만원 내고, 이스라엘백성에게 1백만원, 천만원을 거둬들인 매국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지옥의 제일 밑에 잇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세리 주변에는 주먹을 쓴다는 죄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복음은 모두에게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일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을 제자들로 선택했습니다. 죄인들의 친구, 먹기를 탐하는 자로 불릴 정도로 낮은 자리에 처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낮은 자리에 있록 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이론이 아닙니다. 너무나 현실적인 낮아지심이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억울한 사람이 있습니다. 태어나면서 억울한 사람이 있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낮아지셨는네, 이까지것 하면서 일어설 수 있게 됩니다.

요즘 다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힘들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까. 주님의 삶 자체가 위로가 됩니다. 낮은 자리에서 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마굿간 예수님, 사막을 지나는 예수님, 갈릴리 어부를 부르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낮아지심의 무엇인지를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이 땅에서 고생, 고통, 힘들고, 낙심하고 있는 너를 위해 어떻게 와야 할 것인가 그래서 그 모습으로 왔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고통, 지금의 고난, 지금의 환경, 지금의 처지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우리들을 위로하기 위해, 우리들과 함께 하기 위해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겁니다. 우리들 때문에, 가장 비참한 자리에, 가장 외진 곳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로 오신 예수님의 걸어가신 삶을 묵상하시면서 일주일을 승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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