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22~29절
오병이어 기적 이후에 세 방향으로 흩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자들은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을 만남으로, 백성들 중 흩어짐 일부가 가버나옴까지 찾아왔습니다.
24절-백성들의 열심은 무엇이 문제인가?
백성들은 예수님도 안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알게되었습니다.
전날에 배가 한 척 밖에 없었는데, 자기들의 배를 가지고 와서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25절-예수님을 만난 백성들이 예수님을 랍비로 부릅니다.
14절에서 기적을 체험하고 그 선지자(메시야)로 불렀는데,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언제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의 생각이 들어 있습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릴 버리고 오셨습니까(섭섭한 마음)?이 담겨져 있습니다.
26절-예수님은 이들의 질문에 차갑게 대답을 하십니다.
대화의 논리에 따르면 걸어서 왔지, 중간에 배를 타고 왔지라고 해야 하는데, 예수님은 나를 찾는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냐,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지적하면서 그들을 거절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찾는 이유가 표적이냐 떡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떡은 열심인 동기와 목적이 물질이며 감추어진 욕망을 상징합니다.
먹고-배부르고-계속 배부르기 위해 예수님을 찾음-왕으로 삼음-계속적인 배부름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물질-현재는 심리적인 안정, 평안-왕이신 예수님을 찾고 있으며,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다.
표적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을 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주님이 다스리기 시작함을 경험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떡 속에 담긴 의미가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일시적인 배부름이 아닌 영생하도록 하는 약식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출발은 생존이지만 예수님을 만나면서 영생의 문제를 풀어줄 분으로 알고 의지하게 됩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생존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생존본능 뿐만 아니라영생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27절-영생하도록 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
내가 이 양식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이 인정한 진품이다.
논리상 진행되는 질문은 주님 어떻게 영생하도록 하는 음식을 얻을 수 있습니까?이어야 하는데, 28절은 하나님의 일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대화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질문이 이상한데 왜 그랬을까요?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행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가복음 10:17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의 이야기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10계명을 지킴, 부자임음을 알고 재산을 처리하여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주님을 따르라고 했을 때 부자 청년은 근심하면서 돌아감, 그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임을 알고도 주님이 일부러 하심,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은 사람에게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만 하실 수 있고, 나를 따르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9절-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것은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관한 말씀입니다.
30절-표적은 무엇인가?
모세는 하늘에 주는 만나를 주었습니다.
이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사는 방법을 훈련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참떡입니다. 참떡은 영원히 배부릅니다.
먹는다는 것=살기 위행 일하는 것=사랑하는 일입니다.
35절-예수님을 바르게 믿으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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