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6:10~14절
시대마다 추구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있습니다. 군자사상, 선비사상, 초인, 기사도, 화랑도, 무사도에서 추구하는 인간상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있습니다. 의인입니다. 로마서는 어떻게 죄인이 의인이 되느냐에 대한 방법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되는 과정, 구원의 서정은 창세전 선택-소명-칭의(거듭남, 칭의, 중생-시간적 순서가 아닌 논리적 순서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와 성화(수행과정) 개인적 종말(영-낙원, 육-땅) 재림으로 이뤄지는 영화(영광스럽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칭의는 법적인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성화는 실제 의인이 되는 과정입니다.
제가 자주 이 예를 들어서 설명하는데요, 베트남 아기씨가 한국 남자와 결혼하면 이민국에서 베트남 아기씨에게 “당신은 한국사람입니다”라고 땅땅땅 선언합니다. 그러면 법적으로 한국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과 결혼하면(믿으면) 하나님의 법정에서 “너는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다”라고 땅땅땅 선언합니다. 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의인이 된 것이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트남아가씨가 결혼해서 한국사람이 되었지만, 말이나 문화가 미숙합니다. 한국에서 살기 위해서 매일매일 배웁니다. 능숙하게 말을 하고, 살아가기 위해서 문화단체에서, 구청에서, 학교에서 배웁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연합을 이루고, 성령님의 지도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수행과정입니다. 기독교의 수행과정은 혹독하고 실제적입니다.
삶에서 이루어 가는 수행과정이기 때문입니다. 2주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른 화평을 누려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머물러 있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기도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깨려고 하는 어떤 환난이 와도 즐거워하여,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화평은 깨질 수 없다. 원수되었을 때도 죄인되었을 때도 우리를 사랑해서 죽으셨는데 하물며 자녀된 우리들을 더 사랑하지 않겠느냐라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매일 일상적인 생활을 반복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분주하게 사람들을 만나며 일하고, 퇴근하고, 잠을 자는 일상적인 일이 반복됩니다. 학생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 잠을 자는 일상적인 일을 반복합니다.
여기에 무슨 특별한 생활이 없는데 이런 생활 속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히 살아야 하는데, 매일매일의 생활이 평이하다고 하더라도 매일 더 깨달아서 높은 경지로 자꾸자꾸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의 생활환경이 늘 비슷하지만 자기의 깨달음과 생각하는 것과 마음 상태는 자꾸 고결하고 아름다운 곳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큰 풍파 없이 먹고 입고 사는 것에 지장이 없으면 복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냥 지냅니다. 그렇게 건강이나 잘 유지하면서 지낸다면 그것은 아무 성취가 없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은 죽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하면 안됩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서 살거나, 죄를 지면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죄를 많이 지어서 용서를 받으면 그것이 더 큰 은혜가 있는 것 아닙니까? 특별사면으로 살인죄를 용서받는 것이 벌금을 탕감 받는 것보다 은혜롭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내맘대로 살다가 나중에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더 극적이고 은혜롭다는 겁니다. 저도 여기에 좀 가까운 것 같습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1절을 볼까요? 2절을 볼까요?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들입니다. 죄와 함께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죄와 이혼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을 이뤘습니다.
여기에 성화 과정에서 두 번째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입니다. 연합을 설명하면서 택한 단어가 3, 4절에 나오는 “합하여” 영어로 into(들어가다, 속으로, 안으로 )이고 헬라오로 에이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으로 들어가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했습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셨는데, 나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나는 그것에서 살지도 않았는데 예수님의 죽은 사건은 나의 죽음의 사건이고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입니다.
예) 도의가 태어기 전에는 부모님이 만나서 결혼을 했다는 사실, 그것은 나와 무관한 것으로, 나와는 관계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태어나보니까 위기에 순간에 싸워서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었구나, 두 분이 결혼해서 내가 태어나게 되었구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네가 내 자식으로 태어나서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었지만 내가 이 땅에 엄마, 아빠의 자녀로 태어나서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자녀가 되어 보니까 2000년 전의 사건은 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나도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나도 살게 되었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고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침례가 실감납니다. 물속에 들어가는 것은 죽은 것이고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다시 살았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3~9절을 읽으면서 간단하게 요약-바울이 예수님과의 신비한 연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버전입니다. 4절 장사되었다=완전히 죽었다=거할 수 없다=머물 수 없다=집 짓고 살 수 없다.
예수님버전은 쉽습니다. 대가는 쉽다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6
1절-양이 있는데 문을 통해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정상인데, 다른 데로 넘어서 우리 안에 들어는 양들이 있습니다.
3절-우리는 못된 짐으로부터 보호하는 공간입니다. 목자들이 낮에는 푸른 초장에서 풀을 먹이고 저녁때가 되면 공동으로 양들을 보호라는 우리 안으로 들여보냅니다. 그런 후에 목자들은 자기 집에 가서 쉬고 문지가 밤새 문을 지킵니다.
4절-다음날 아침이 되면 목자가 나와서 자기의 양들을 부릅니다. 그러면 양들은 주인의 목소리를 듣고 나옵니다. 이 양들의 앞에서 이끌고 푸른 초장으로 인도합니다.
5절-타인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9절-일상적인 생활이지면 점점 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신비한 연합을 이루는 성도의 태도
1.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의 3요소-지,정, 의(알고,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을 때 나도 죽었다는 사실, 죄에 죽어서 다시는 죄와 함께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입양아의 고민이 뭘까? 완전한 자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고민합니다. 파양되면 어쩌나? 버림받으면 어쩌나? 제대로 된 부모 자녀 사이를 만들어 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습니다.
혼나도 바로 잊어버릴 정도로 가야 합니다. 양부모가 혼 낼 때도 부모에게 혼난다고 생각할 정도의 관계가 형성되면 됩니다. 양부모가 혼내는구나? 나를 미워하는구나? 나를 이제 싫어하나? 이럼 더 가야합니다.
하나님과 나는, 양하나님? 양예수? 아니 하나님이고,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끊어버리실까?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끊을 수 없습니다.
2. 11절입니다. 살아 있는 자로 여기야 합니다.
우리는 법적으로 의인이지만 죄를 지어서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죄에서 대해서 죽은 자요, 하나님과 산자로 여기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법적으로 의인이지만 완성은 오래 걸립니다. 죄와 갈등하면서 살게 됩니다.
지난주 새벽예배에 요셉에 관한 사건을 다루고 있는 창세기 39부터 41장까지 보면서 반복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창세기 39: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노예로 팔릴 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노예로 팔렸습니다. 옷이 벗겨지고, 차꼬를 채워진 채로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노예로 팔려서 보디발의 집의 종으로 살게 되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함께 하여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39: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급한 나머지 보디발의 아내가 옷을 잡고 늘어져서 옷을 벗어버리고 달았는데, 보디발의 아내가 그것을 악용하여 놓고 요셉이 자기를 동침하려고 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서 죄인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형통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 하나님과 함께 하여 형통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하나님이 꿈을 주신 자야,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야”라고 생각하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좌절하지 않는 마음, 자살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삶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 겁니다.
민수기 21장에 이스라엘백성이 원망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가데스바냐에서 출발하여 올라가는데 길도 불편하고 물도 없고, 음식으로 불만이 생기면서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화가난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어 물게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백성들이 모세에게 찾아와 자신들이 범좌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까 모세가 뱀들을 떠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불 뱀의 모양의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고 합니다. 물린 자들이 그것을 보면 산다고 말씀하십니다.
상황은 발이 퉁퉁 붓고, 숨은 쉬어지지 않습니다. 상황을 보면 곧 죽을 것 같습니다. 그때 말씀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장대에 매달린 놋 뱀을 본 자들은 살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어서 낙담하고 절망할 때, 죄에 대해서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여기는 겁니다. 믿음의 눈으로 놋 뱀을 바라보는 겁니다.
3. 13절입니다. 자신을 의에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라
죄에게 드리며 죄는 우리를 이용하여 죽이는데 사용합니다. 죄가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죽이는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죄에게 주면 죄가 우리의 입술을 이용하여 나쁜 말로 사람들을 이간시키고, 거짓말하게 하고, 좌절시키는 일을 합니다. 욕심을 죄에게 주면 탐심으로 가득하게 하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더 많이 가지기 위해 사람들을 죽이는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착취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쓰시도록 우리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거룩은 구별과 연합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백성들이 성막을 짓기 위해 각종 장신구들을 드립니다. 당시 그들이 드린 장신구들은 이집트에 사용된 신상의 모양을 새긴 것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속하게 되니까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소속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기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무엇을 이루게 됩니까 19절입니다. 거룩하게 합니다. 거룩은 사람들과 관계에서 구별된다는 겁니다. 구별된 가치관, 구별된 세계관, 구별된 인생관, 구별된 삶의 태도로 바꾸신다는 겁니다.
결론
죄에 대한 갈등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은 아무리 많은 죄를 지어도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 믿게 전의 “옛사람은 죽었다. 새사람이 살았다.” 죄 가운데 머물 수 없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한 연합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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