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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완성)

증언하라

by ysong 2020. 11. 25.

요한계시록 11:3~14

많은 성도들은 요한계시록하면 생각하는 첫 단어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많은 상징어, 다양한 해석, 이단시비 등으로 인해 교회에서 가르치지 않은 결과이기도 합니다.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요한계시록을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막상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은 부족함을 느끼기도 했고, 더 많이 공부하고, 묵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참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요한계시록은 장차 성취될 미래에 관한 것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필요한 위로의 말씀, 격려의 말씀, 소망의 말씀으로 가득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을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 , 대접 심판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요한에게 심판의 진행을 보여주시다가 다른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형식은 익숙한 기술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5장에서 아담의 족보를 기록할 때 사용한 방식이기도 합니다.

몇 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죽었다고 기록하다가 노아에 이르러서는 인류의 타락의 이야기가 나오고 홍수 심판이 이르게 되고, 노아가 죽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삽입장면, 막간, 괄호의 내용입니다.

6째 인을 떼고 7째 인을 떼기 전에 그랬고요(7)

6번째 나팔을 불고 7번째 나팔을 불기 전에 그랬습니다.(10~11:14)

7번째 나팔을 불고 최종 심판이 임하기 전에 그랬습니다.(12~14)

 

이는 고난의 현실에게 실제적으로 필요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방식입니다.

극심한 고난의 현장에 잇는 아시아의 교회들에게 7장에서는 승리한 교회, 천상의 성도를 보여주었고, 10장에서는 사도요한에게 말씀을 먹이는 사명을 끝까지 감당할 것을 부탁했고, 11장에서는 교회와 성도들이 정한 때까지 증인의 역할을 감당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10~11:14절은 3개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사도요한이 먹은 말씀은 단과 쓴맛이 납니다.

2) 성전의 측량하는 곳과 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3)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다가 죽고 부활하여 승천하는 환상의 장면입니다.

그림은 각각 다르지만 한 가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난의 현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끝내 견디는 자에게 주어진 승리의 확신입니다.

 

증인이란 법정에서 증언을 하는 사람입니다.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은 어떤 사안의 진위가 다투어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로마 황제가 주인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인가 하는 사안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은 예수의 주 되심을 삶으로 증언할 증인들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3- 두 증인이 권세를 가졌는데 굵은 베옷을 입고 천이백육십일 동안 예언을 합니다.

두 증인은 누구일까?

과거적 인물로 보는 견해는 베드로와 야고보 또는 사도 바울과 베드로로 봤습니다. 

미래적인 인물로 보는 견해는 마지막 때에 등장할 탁월한 영적 지도자로 봤습니다.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모세와 엘리야를 연상시킬 능력의 종들이 나타날 것 본 것입니다. 

신천지는 이런 해석을 바탕으로 이만희교주가 이긴자이며 두 증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도 요한과 모든 성도들을 상징한다고 보면서 복음을 받은 교회와 성도들로 봅니다. 

타당한 견해로 보입니다. 

 

4절에 두 증인에 대한 묘사가 있습니다.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입니다.

스가랴 4장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가랴에 등장하는 두 감람나무는 스롭바벨과 여호수아를 가리킵니다.

고로 두 감람나무는 예수를 증언하는 모든 성도를 가리킵니다.

두 촛대는 1장에서 촛대는 교회에 대한 상징입니다.

증언하는 교회입니다.

 

왜 두 증인인가?

숫자로 두 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 2는 법정에서 증언하는 증인의 수입니다.

완전한 증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 증인이 가진 권세는 5~6절에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두나미스가 아니라 엑수시아입니다.

이 권세를 복음에서 나오는 권세입니다.

엑크~~로부터, 우시아~~본질

본질로부터 나오는 권세입니다.

진짜 권세는 외적 능력이 아니라 본질로부터 나오는 권세입니다.

본질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십자가와 부활의 권세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우상을 무너뜨리는 권세입니다.

애굽의 신과 바알을 물리쳐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권세입니다.

악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권세입니다.

 

굵은 베옷를 입고 전하는 권세입니다.

회개의 옷, 참회의 옷을 입고 전하는 복음입니다.

예언하는 권세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의 사명에 따른 권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미치는 회개의 복음입니다.

 

정한 때가 있는데 42개월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세상을 짓밟는 기간 동안, 교회가 고난을 받는 동안, 동시에 교회에 권세를 주셨습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도록 하는 복음 선포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권세를 가진 성도와 교회가 전하는 복음에 대한 반응이 7~10절입니다. 

- 싫어합니다. 심지어 더불어 싸워 죽도록 합니다.(7)

- 큰 성은 바벨론, 소돔, 애굽, 예루살렘인데 음란, 우상숭배로 가득합니다.(8)

- 장례를 치루지 않음으로 끝까지 치욕적인 대우를 합니다.(9)

- 자신들을 괴롭게 한다고 여깁니다.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10)

 

땅에 거하는 자=하나님 없는 백성들이 증인을 이토록 미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증인이 머물러 있는 곳이 성전의 바깥마당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받도록 한시적으로 허락한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추구하는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주류는 땅의 사람들입니다.

땅의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추구합니다.

땅의 사람들에게 틀렸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무가치한 것을 붙들고 산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임하는 심판을 선포하니까 싫어하고, 죽도록 미워하는 것입니다.

땅의 사람들은 하늘의 것, 영원의 것, 생명에 대한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고난을 감수하고 증인의 삶으로 살기로 결단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이 장차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진 이들입니다.

 

짐승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그러나 부활합니다.

이런 성도와 교회의 모습에 또 다른 긍정적 반응이 11~13절입니다. 

죽었던 증인이 삼일 반 후에 생기가 들어가 부활합니다.

에스겔서의 마른 뼈 환상을 연상케 합니다. 

3년 반=삼일 반은 짧은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깐의 고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두 증인의 사역의 열매가 있습니다.(13절)

두 증인의 목숨을 건 사역으로 인해 소수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진의가 다툼이 있기 때문에 증인이 필요합니다.

증인은 사건의 진위를 판별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예수가 주인인가, 로마 황제가 주인인가?에 대한 증인입니다.

로마 황제가 주 도심을 거부하는 것이어서 항상 고난에 직면하게 됩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예수의 주 되심을 삶으로 증언할 증인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젠 예수를 증언하는 일이 부끄러움 일이 되었기 때문에 신실한 증인이 필요로 합니다.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고난이 따르는데,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가치라는 단어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가치가 있다고 생각이 들면 힘들어도 참을 수 있고, 견딜 수 있습니다.

장로님이 기독언론인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까 힘들어도 보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말씀을 바르게 가르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까 성경을 연구하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려고 합니다.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서 손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힘들지만 참고 견디는 것 아닙니까?

어려움에 있는 이웃을 돕기 위해 시간과 돈을 써도 가치 있다고 생각하니까 기꺼히 봉사하는 것 아닐까요?

대구가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많은 의사와 간호사가 대구로 달려간 것도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해서 결정한 것 아닐까요?

 

성도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고난을 이겨내는 것 아닙니까?

주님의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이렇게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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