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4:50~53절
50절의 믿고와 53절의 믿음은 다릅니다.
믿음은 생명의 씨앗처럼 자란 것입니다.
긴가민가하는 믿음이지만 말씀에 의지했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질에 있습니다.
믿고(달달 떠는 믿음으로 옮겼는데 죽을 것 같은데 안죽어요)-믿고 행동하면 새로운 믿음으로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고 주관자임을 믿는 그런 믿음입니다.
첫 번째 표적에서 제자들이 믿는 것과 두 번째 표적 오늘 왕의 신하의 믿음은 차이가 있습니다.
2:11절과 같은 표적 같은데, 첫 번째 제자들은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습니다.
이 표적을 보고 제자들이 믿게 되는데, 이 믿음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대화 중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릅니다.
가르치는 선생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4:53절-인생을 건 왕의 신하는 표적이 일어날 때, 제자들과 다릅니다.
자기를 던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던지고 순종하고 믿는 믿음은 예수님을 자기 생의 구세주로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진영이 다른 것입니다.
요한은 무엇을 믿느냐?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생명을 잃은 믿음이냐?
씨앗이냐? 구세주로 믿는 믿음이냐?
영광을 보고 달려가는 믿음이냐?라고 묻습니다.
자기 확실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나를 맡기는 믿음, 이 작은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요즘은 이런 기적이 기도응답으로 이뤄집니다.
욕심으로 구해도 좋아요-많이 하는 게 중요-욕심으로 구하면 욕심임을 깨닫게 하심-욕심이 빠지고 순순한 기도를 하게 하심-기적을 맛보게 하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부모의 간구를 귀하게 보십니다.
54절-두 번째 표적으로 집어넣은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많은 표적 중에서 7번 표적만 기록했는데, 신하의 아들을 구한 사건이 두번째 표적입니다.
당시 왕은 헤롯 아그립바입니다(에둠 족속).
왕의 신하는 이방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두번째 표적은 이방인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기록한 것입니다.
유대인만 사랑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방인도 사랑하시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를 사랑하신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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