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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떠나가지 마세요

by ysong 2023. 11. 20.

히브리서 1:1~3

오늘부터 히브리서를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히브리서는 조금 어렵습니다.

비교종교학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부흥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말씀을 듣고 오천명이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팔아서 함께 교제를 나누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심한 박해와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계속되는 박해로 인해 신앙을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습니다.

 

히브리서는 왜 진리를 버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왜 참 신앙을 버리고 종교인이 되려고 하느냐?

참 진리가 여기 있는데 왜 떠나려고 하느냐?

기독교와 유대교를 비교하면서 참 진리를 따를 것을 부탁합니다.

눈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참 진리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은 선지자보다, 천사, 모세, 여호수아, 아론보다 위대한 멜리세덱과 같은 분이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성전보다 크며, 염소와 송아지 피보다 더 나은 보배로운 피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러니 피하기를 폐하지 마십시오.

징계받을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을 보십시오.

주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구약의 제사, 제사장, 율법을 밝히 드러내 보이는 말씀이 가득한 곳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저자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모릅니다.

많은 학자들은 바울로 보기도 합니다.

바울이 유대인으로 예수를 믿었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논문처럼 탁탁합니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계시해 주었습니다.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아들은 어떤 분인가를 7가지로 설명합니다.

성속자, 창조자, 영광의 공채(빛나는 분), 하나님의 형상(원형을 그래로 본따서 새겨진 형상)

만물의 주관자(다스리는 분), 죄를 정결하게 하신 분이며, 만물의 통치자(우편에서 다스리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1:4~5

졸린 이 아침에 탁탁한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입장도 쉽지는 않습니다.

어떻게 하겠어요.

어려운 말씀이든 쉬운 말씀이든 다 살피는 것이 저의 의무이며 책임이기도합니다.

 

히브리서의 목적은 예수를 알게 하는데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묵상하는 사람에 의해 이어졌습니다.

예수를 아는 만큼 믿게 되고, 깨닫는 만큼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사실을 깊이 마음속에 두고 있습니다.

그 바탕으로 예수님의 탁월성과 우월성, 독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주제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라는 주제가 좀 어색하게 들릴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천사의 위치와 사역에 관하여 매우 관심이 많았습니다.

천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보자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까지 믿었습니다.

천사 숭배 사상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골로새서 2:18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사실 천사들도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일꾼들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을 합니다.

지금도 천사를 보내서 돕습니다.

인간을 돕도록 보낸 존재입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니까 좋게 평가해서 천사 정도로 생각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인간이고 신은 신이 아닌가?

어떻게 신이 죽을 수 있는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잠깐 빌려서 오셨다가 죽기 전에 하늘로 올라가셨다와 같은 잘못된 주장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은 천사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일곱 개의 인용문을 들어서 설명했습니다.

아들과 종을 비교할 수 있느냐?

1) 5-시편 2:7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낳았으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통치할 왕과 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칭은 오직 예수께 적용되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 5~13

5절 하반절은 사무엘하 7:1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족보는 영원하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아들 예수님께 확대시켜 적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문은 번성하고 흥왕하여 큰 나라를 이루게 되고 영원히 존속하게 될 것입니다.

3) 6-신명기 32:43

예수는 구원자 하나님이시다라고 증거하는 데 있습니다.

4) 7-104:4

예수님은 천사를 자기의 도구로 사용하시고 있는 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5) 8~9-시편 45:6~7

예수님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영원하시다는 것을 강보

천사는 바람과 불꽃같이 잠정적이지만(104:4), 예수님과 그의 왕권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6)10~12-시편 102:25~27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것들이 시작이 잇고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십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영원히 건너지 못할 차이가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피조물은 가변적이지만 창조주는 불변하십니다.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 창조주이시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영존하실 뿐만 아니라 불변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두 변하여도 예수님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며 언약에 대해서는 성실하시며 충실하시며 그의 자녀에 대해서는 시종 일관성을 가지고 대하시는 분이십니다.

7) 13-110:1

온 세상이 결국 예수께 머리를 수그리고 복종하게 될 것이리고 선언합니다.

 

크게 3가지로 비교하여 우월하심을 드러냄

1) 아들-사역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천사의 역할은 사역자

2) 영원함, 영존성(8~10)-천사는 피조물, 천사는 죽지 않는다, 맞지 않으면 멸절당하심

3) 통치, 다스리는 권한(13)-특정한 일을 맡아서 섬기도록 함

천사-구약에 많은 활동.

신약에도 많은 활동이 없습니다.

성령이 말씀이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이 생각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도록 합니다.

아들의 탁월함이 천사가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18

1장에서 예수님은 천사보다 우월하시며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상속자입니다.

피조물인 천사와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천사와 비교되는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니 그보다 낮은 것처럼 보이는 인간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를 위해 낮아지셨습니다.

 

예수님인 사람이 됨으로 낮아지셨습니다.

육체의 고통을 느끼고, 사람으로부터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죽으시고 장사지내심을 당했습니다.

14절의 말씀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기 위해서입니다.

사망권세를 잡고 있는 사단을 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15절입니다.

죽기까지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해서입니다.

종이 아닌 자유인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17~18절입니다.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고난 당해 흔들리는 우리들을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고난 당하셨기에 우리들의 마음을 가장 알고 계십니다.

 

누가 도울 수 있습니까?

어려움을 겪어 본 사람이 고난을 겪는 사람을 위로 할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을 겪어보지도 못했으면서 고난을 이야기하면 힘이 없습니다.

목사도 그렇고 성도도 그렇습니다.

고난은 유익입니다.

 

예수님이 고난 당한 자의 위로가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멸시, 조롱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되는 낮아지심을 겸험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멸시는 받는 사람을, 낮아진 사람을,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겪는 사람을 위로하실 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참에 위로해 주실 겁니다.

 

히브리서 3;1~6

이 편지를 읽는 형제들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해 거룩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기 자신이 결심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그 결심하기 전에 하나님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은 누군가의 초청에 응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깊이 묵상하는 겁니다.

1절을 보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시며,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다리는 놓는 역할을 하는 대제사장입니다.

이 사실을 깊이 묵상하라고 합니다.

왜 깊이 묵상하라고 했을까요?

참되신 예수님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분인 것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종 노릇하는 동족을 구원한 지도자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을 구원하여 이끄는데, 최선을 다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 신실했습니다.

하나님께 신실해야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죄의 종노릇 하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데, 신실하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며 그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세와 비교할 수 없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집 전체에 신실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집의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은 주인으로 신실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가정 총무처럼 신실했습니다.

집 주인과 집을 돌보는 이와 비교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5절에서 다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4절을 깊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집마다 지은 이가 있습니다.

우리를, 우주를, 이 땅의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창조주

집은 권속, 가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예수님이 온 가족을 돌보십니다.

히브리서 3:7~14

7절부터 4:13절은 안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안식을 누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말씀합니다.

7~11절은 시편 95:7~1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과 광야 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했고, 광야에서 각종 이적을 경험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출애굽 1세대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안식을 누리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식을 누리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요?

완악과 거역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몸은 자유인이 되었는데, 생각과 마음은 그대로 애굽의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완악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본질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자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러낸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불평, 만나로도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출애굽 한 이후의 행적을 보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베풀어준 의미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경험하고도 불평하면 결국 안식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안식을 누리는 못하는 까닭은 자발적으로 예배자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다니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안식을 누리지 못한 깨닭입니다.

우리의 완악, 온고함, 불평을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12~14절입니다.

악한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악한 마음을 품으로 하나님과 거리가 생길 것을 걱정하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피차 권면하는 것입니다.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순종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놀라운 은혜를 가지고 신실하게 살면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14절의 사람과 반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봅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끝까지 그 마음을 유지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처음과 끝이 같아야 합니다.

신실해야 합니다.

십자가 구원을 헛되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 받고 구원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5~4:3

신앙인에게나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진정한 안식입니다.

모두가 안식을 원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안식을 누리기 위해 여행을 하고, 깊은 산속에서 쉼을 갖기도 합니다.

그렇게 잠시 안식을 누린다고 생각되지만 지속적인 안식을 누리지 못합니다.

 

무엇을 놓쳤기 때문에 안식을 누리지 못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놓쳤는가요?

안식을 주는 주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에게 안식을 이끌자는 모세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은 마음이 완악하여 모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격노하는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에게 노하셨나요?

17절에 광야에서 죽게 된 안식을 누리지 못한 자였습니다.

 

원래 그들은 4:1절에 안식에 들어갈 자로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3:18~19절에서 설명해 줍니다.

 

누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

18~19절의 사람입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입니다.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약속받았지만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처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백성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를 받아 읽는 자들입니다.

 

광야의 때나 지금이나 안식에 이르는 법은 동일합니다.

2절 하반절입니다.

믿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않으면 똑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종입니다.

3절에도 순종을 강조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창조의 안식을 누리지 못한 것은 불순종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은 나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참된 안식에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세요.

말할 수 없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히브리서 4:8~13

이 땅에서 완전한 안식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일을 마치고 쉬신 것과 같이, 그 사람도 자기 일을 마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11절의 말씀처럼 불순종의 본을 따르다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순종할 힘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순종하도록 이끌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지 않을 수 길이 없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합니다.

대신 말씀은 인간을 해부합니다.

말씀이 인간의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말씀 앞에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12절의 말씀이 은혜가 되길 바랍니다.

말씀을 5가지로 규정합니다.

- 살아 있습니다.

말씀이 살아 있어서 말씀이 들어가면 살아납니다.

어떤 분이 사고로 큰 수술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 가망이 없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수술 후에 의사 선생님이 환자의 귀에 매일 주기도문을 들려주셨다고 합니다.

기적적으로 의식이 돌아와서, 이 분은 불신자였는데, 주기도문을 외우더라는 것입니다.

살아 있다고 믿고, 살아 움직인다는 믿으면 그대로 됩니다.

- 활력이 있습니다.

운동력이 있습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를 끌고 갑니다.

 

- 말씀이 수술칼보다 예리합니다.

 

- 그 말씀으로 혼과 영과 골수를 찌러 쪼갭니다.

말씀이 수술을 하니까 아프죠.

말씀이 들어오면 아픔을 느낍니다.

마음이 찔려서 어치할꼬로 반응하게 됩니다.

 

- 말씀이 우리를 판단합니다.

말씀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말씀 앞에서 감출 수 없습니다.

안 변하면 안 읽은 것입니다.

지식이 목적이 아니라 변화가 목적입니다.

 

히브리서 4:14~16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을 어떤 사람이 가장 잘 이해하고 도울 수 있을까요?

고통과 고난을 겪어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진실하게 도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일 년 한 번 속죄소에 들어가 이스라엘백성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론의 후손들이 대제사장을 이어 맡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다른 계열로 오신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한 후 예물을 드린 멜리세덱 계열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심을 받은 멜리세덱 계열입니다.

 

14절에 다른 계열로 오신 대제사장이 누구인가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늘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킵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동변상련의 감정을 느낍니다.

다른 계열로 오신 대제사장 예수님은 공생애 전까지 바닥 인생을 살았습니다.

공생애 기간 동안 고통, 눈물의 현장을 돌아보았습니다.

우리의 사정을 하는 분입니다.

 

그 분은 사람이 느끼는 배고품, 슬픔, 아픔의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죄의 열매들인데, 죄가 없으신 분이 이런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을 다 이기셨습니다.

그 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길이 열렸습니다.

16절입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은혜의 보좌 앞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긍휼과 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이 여러분을 돕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 앞으로 담대히 나아가실 바랍니다.

 

 

 

5:5~10

히브리서는 비교종교학입니다.

유대교와 예수교를 비교해서 예수교의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5~8장까지는 대제사장에 대한 내용입니다.

대제사장이 하는 가장 중요한 사역은 일년 한 번 대속죄일에 지성소의 법궤 뚜껑에다 이스라엘 죄를 사하기 위해 피를 붓는 일이다.

이것은 대제사장만이 하는 고유한 사역이다.

속죄함을 받아야 일 년을 살게 된다.

제사제도 속에 잡혀 있었고, 믿는 유대인들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1~4절은 이 땅의 대제사장의 세가지 특징을 설명합니다.

1-사람으로부터 선택된 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일이 제사입니다.

선악과 사건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소통이 아니라 막혔습니다.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2-사람과 일체감을 가졌습니다.

대제사장의 마음입니다.

분노, 폭발하지 않거 죄에 무감각하지 않습니다.

죄인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지만 제사의 직분을 수행합니다.

4-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야 합니다.

아론-레위-레위지파에서 사독계열-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4세의 헐라정책으로 사독계열 암살-마카비혁명(제사장의 5명 아들) 중 시몬이 제사장을 맡음-반발로 사막공동체(쿰란공동체)-예수님 당시 아무나 되었습니다.

 

5절 이후 예수님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1.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5,6)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레시를 받았을 때, 십자가을 지시기 전 변화산에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론의 계열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계열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2. 사람과 일체감을 가졌습니다.(7)

눈물, 통곡, 간구 소원을 합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그렇게 기도했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따르겠다고 함

3. 고난으로 순종함으로 온전하게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줘야 우리들이 행동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고난-순종-온전케 됩니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순종하는 자는 감사가 많습니다.

내 뜻대로 안되었다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도록 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면 순종하게 되고, 감사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6:11~6:2

히브리서를 읽는 분들도 멜기세덱을 관한 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도 더 말하고 싶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을 걱정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기초가 약하니까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내용입니다.

 

멜리세덱에 관한 내용은 단단한 음식입니다.

그래서 젖을 먹는 자나 어린 아이는 먹을 수 없는 단단한 음식과 같은 말씀입니다.

그들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입니다.

연단을 받아서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자입니다.

 

신앙의 기초에 머물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의 기초는 6가지로 요약합니다.

1~2절입니다.

유대교의 초보를 버리고, 회개, 믿음, 세례, 안수, 부활, 심판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것은 초보이니까 다시 딱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젠 온전한 데로 나아가야 장성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9절 이후의 내용입니다.

 

 

 

 

 

 

 

 

 

 

 

 

 

 

 

 

 

 

 

 

 

 

 

히브리서 6:4~12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고 떠날 수 있는가?

신앙생활을 했는데, 다른 길로 가는 사람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4~5절을 경험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은사를 맛보고, 성령의 참여한 자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그 순간 기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은혜 받았습니다고 말합니다.

절대로 하나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배교한 자들입니다.

배교를 강력하게 응징한 말씀입니다.

진짜로 이런 은혜를 맛보았다면 절대로 떠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비한 체험을 하고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거듭났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는데 다른 길로 가는 것이 납득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열매 맺는 삶은 복입니다.

열매가 잘못되면 저주입니다.

신명기 26장의 말씀입니다.

복과 저주의 말씀입니다.

 

9-구원을 확신하라.

10- 하나님은 잊지 않습니다.

11-끝까지 소망이 풍성함에 이르라.

12-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생활을 하라

 

 

 

 

 

 

 

 

 

 

 

 

 

 

 

히브리서 6:13~20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사람이 약속을 반드시 지킨다고 하면서 하늘에,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약속을 지키신다고 하면서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큰 이가 없기에 자가를 가리켜 맹세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하신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14절이 약속의 내용입니다.

창세기 12:1~3절의 약속입니다.

, 후손, 복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15절입니다.

소망하면서 살았습니다.

약속은 쉽게 이뤄지지 않습니다.

약속을 인내, 참음으로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맹세를 하실까요?

13, 15, 17절에 약속이라는 단어가 나오고, 13, 16, 17절에 맹세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집니다.

하나님이 맹세하신 이유를 17절에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맹세한 야속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소망입니다.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합니다.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지성소로 나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고 다스리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반드시 성취됩니다.

인내함으로 소망을 이루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7:1~10

언제 등장하나요?

창세기 14:18절에 등장합니다.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조카 롯을 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영접합니다.

멜기세덱은(나의 의의 왕, 살렘의 왕(평화의 왕))왕입니다.

동 시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왕으로 제사를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제사장으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천지의 주재이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부릅니다.

전쟁을 승리한 이유를 알려줍니다.

빈틈을 공격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략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적을 네 손에 붙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승리케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브람이 십일조를 드립니다.

십일조를 드린다는 것은 나는 당신에게 종속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당신이 말이 맞다, 당신이 나를 다스린다, 당신의 말을 인정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왜 멜게세덱을 이야기 하는 걸까요?

대제사장인 예수님이 아론족보계를 통해 세워진 대제사장보다 높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 10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높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아론은 멜기세덱의 계열로 온 예수보다는 낮다는 것입니다.

4절이 목적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유다지파이지만 대제사장보다 월하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월하신 예수님을 버리고 왜 낮은 아론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

왜 진리를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왜 진리를 버리고 낮은 것인 세상의 것을 취하려고 하느냐고 묻습니다.

고상한 가치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8:1~13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멜기세덱과 아론을 이야기를 한 결론이 1절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십니다.

하나님의 우편은 자리가 아닙니다.

통치, 다스림에 대한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참 장막을 섬기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장막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든 담력을 얻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성경은 모형과 원형을 말씀하십니다.

모세에게 보여준 짓게 한 장막은 하늘 성전의 모형입니다.

모세가 지은 성막은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을 보여준 언약입니다.

백성들이 믿음이 없으니까 보이는 성막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했습니다.

7절입니다.

그런데 백성은 첫 번째 성막으로 받은 언약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완전히 지켰다면 두 번째 언약을 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주셨습니다.

언약을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문제였기에 새로운 조치를 취했습니다.

예전에는 돌판에 언약을 새겨서 주었습니다.

새 언약은 마음에 새겼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같습니다.

그들을 변화시킨 마음, 생각에 언약을 둠으로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또 하나의 조치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셨습니다.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말씀이 생각나게 합니다.

오늘도 말씀이 생각나서 말씀이 이끄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9:1~10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 가는 것입니다.

9~10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막에 대한 내용입니다.

, 성소, 지성소로 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성막 만들라고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을 기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을 상실하고 성막, 돌판, 법궤만 붙잡고 있습니다.

내용만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그것들은 모형에 불과한 것을 붙들고 있으면 되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1~7절까지 성소와 지성소를 설명하면서 이것은 모델하우스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9절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깨끗하지만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일시적입니다.

언제까지 유효합니까?

개혁할 때까지입니다.

예수님으로 지성소에 나아갈 길일 열렸습니다.

예수님 오실 때까지 필요한 성전만 붙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 제도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휘장이 찢어졌습니다.

제물을 들고 와서 제사장에게 부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전 제도는 없다, 제사장을 의지할 필요는 없다. 제물은 필요없다.

예법에 묶여 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하나님의 교회는 아직도 제도를 붙들고 있음

제도에 묶여 잇을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행위에 묶이지 마시고,,,

제사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제사에 묵숨을 걸고 잇지 않습니까?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사는 죄의 삯이 죽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올 때까지 그림자, 모형에 불과한 것에 매여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3~28

모형과 실제를 구별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것과 일시적인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와 율법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형을 붙잡겠다고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는 이들을 보고 너무나 많이 아팠습니다.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9:23절에서 성소와 제사는 하늘의 있는 것들의 모형입니다.

24절처럼 예수님은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가두어 둘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단번에 죄사를 드려 죄를 사했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이것이 믿음으로 받아들여 집니까?

그러면 됩니다.

정말로 믿어져야 됩니다.

머리가 아닙니다.

가슴으로 진정으로 믿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가 한때 헤맸던 것처럼 의심, 의문으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27절의 말씀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가치 있는 진리입니까?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져 있습니다.

안죽었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들어보셨어요?

 

죽은 것이 당연한 것처럼 심판도 당연한 것입니다.

만약 심판이 없다면 죽음도 없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장이 됩니다.

죽음이 있다는 것은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재림하실 겁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에게 드러내실 겁니다.

이것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능력이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0:32~38

신앙은 꾸준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좋았는데, 나중에 나쁘면 더 나빠 보입니다.

편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 같아야 합니다.

같은 속도로 전진해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빛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소금과 빛으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난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32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그전에 경험했던 은혜를 소환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로 이긴 것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번 고난도 분명히 이길 것을 확신하는 겁니다.

 

소망을 갖고 이기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33~34절의 고난을 이길 힘이 됩니다.

영원한 것을 소망하는 능력이 힘입니다.

이 땅이 전부가 아니라는 확신이 권능이 됩니다.

견디고 이기고 넘을 수 있는 신앙인이 됩니다.

 

결국 무엇일까요?

38절입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꾸준함도, 소망도 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뒤로 물러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다시 모형과 형식으로 물러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1:1~7

생명이 없는 모형과 형식으로 돌아가는 걸까?

실체를 보고 따랐던 신앙을 버리는 걸까?

눈에 보이는 제사, 성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

결론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정의해 주고 있습니다.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해 확신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켜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저를 구원해 주셨는데, 주님의 일을 하는데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확신입니다.

믿음이 실상인지 허상인지는 말씀에 비쳐봐야 합니다.

믿음은 개인적인 신념, 의지, 야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절입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사물들에 대해 확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는, 인간의 오관으로 인식할 수 없는 것들에 관계하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믿음은 이성을 뛰어넘습니다.

 

5~6절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이 상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염려를 맡기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모습입니다.

 

7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산 사람들의 삶을 통해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8명의 인물들이 보여준 믿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물들을 통해 확인되는 믿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단순합니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다가 망해면 하나님이 책임져 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서 11:8~12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아벨은 자기 것 중에 첫째의 것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전부를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자기 것 중에 드렸습니다.

가인은 자기의 소유 중 하나를 드렸습니다.

 

에녹은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녹의 아들은 므두셀라입니다.

므두셀라는 죽음이 온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죽음과 심판의 계시를 받고 평생 동안 종말론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과 동행의 삶이었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

구원의 방주는 보이지 않는 일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아는 모든 일을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갖고 진행했습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나타나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조상으로 세웠습니다.

1. 명령에 순종했습니다.(8)

2.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떠났습니다.(8)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도 그곳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지 몰랐으며(12:5,6)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12:7)

3. 천막에서 살았다.

정착지가 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았다.(9)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설계자와 건축가가 되셔서 튼튼한 기초 위에 세워주실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10)

4. 아내도 같은 믿음을 가졌다.

약속하신 분을 믿을 수 있는 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3분의 믿음을 배우시고 적용하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1:13~19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빚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실수하고, 각종 시험을 통하게 함으로 믿음의 원리를 배우도록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을 때까지 믿음의 원리에 따라 살았습니다.

13절입니다.

1) 약속을 바라보고 환영하며 살았습니다.

2) 본향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나그네이며 외국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았습니다.

 

15절입니다.

뒤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뒤로가거나 머물지 않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생명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크던 나무가 작아지면 병이 들었거나 죽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쓸모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은 자라가야 합니다.

 

16절입니다.

요즘 성도나 새상 사람이나 다 현세적입니다.

교회가 인기가 없는 이유입니다.

교회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믿음은 영원한 세계를 사모하게 합니다.

 

17, 19절입니다.

시험을 받았을 때 순종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믿음은 각종 시험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입니까?

이삭을 드리면 이삭을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삭은 낳을 수 없는, 죽은 곳에서 얻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원리가 여러분들의 믿음의 원리로 삼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1:23~29

히브리서에 기록된 믿음의 인물 중에 어떤 분의 믿음을 닮고 싶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에녹의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간 인생이 부럽습니다.

 

오늘은 모세의 믿음입니다.

23절입니다.

모세는 부모의 신앙을 받았습니다.

모태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말들도 많은데요,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복입니다.

자연스럽게 주님을 만날 기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모세는 축복 받은 가정에서 태어났고, 부모의 믿음을 이어받았습니다.

 

24~26절입니다.

믿음은 어려운 길을 선택하는 용기로 나타납니다.

공주의 아들로 살기보다,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모든 보화보다 고난과 수모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큰 재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상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7절입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분을 마치 보는 것처럼 여기고 꿋꿋이 참는 것입니다.

인내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28~29절입니다.

유월절을 지키고 홍해를 건너는 것입니다.

구원을 믿는 것입니다.

죽음을 건너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홍해는 죽음을 건너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36~40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믿음과 많이 다르죠.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을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요즘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편한 세상입니다.

기독교는 오랜 시간 동안 심한 박해 가운데 있습니다.

특히 초대교회가 겪은 박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런 박해 가운데도 그들은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35~36절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받았던 박해 목록입니다.

우리는 이 중 하나만 만나도 힘들다고 하나님께 간구했을 겁니다.

믿음이 자란다는 것은 이런저런 고난을 견뎌내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힘들었던 것이 이젠 거뜬히 넘어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표현합니다.

이런 사람이 살기에 세상이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적한 하지 않은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은 구별되게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은 사랑과 함께, 믿음은 소망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믿음은 힘이 없습니다.

 

40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더 좋은 것을 예비해 놓았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소망이 믿음을 강하게 합니다.

이 소망이 있기에 참아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스스로 믿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크다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겉으로 보면 우리가 믿음 지키면서 내가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믿음은 내의 힘으로 유지하거나 크다고 자랑할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에 두 가지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길을 응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응원에 힘을 얻습니다.

운동하는 선수가 응원받고 힘을 내는 것과 같습니다.

 

1절에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려갑시다.

인내하는 믿음은 이런 응원을 받고 자라갑니다.

인내하라고 합니다.

고난의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응원하는 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십니다.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믿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으며 지금은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3절입니다.

예수님을 죄인들의 증오를 몸소 참으셨습니다.

우리도 죄인들의 증오를 참아야 합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용기를 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생각함으로 생기는 것입니다.

참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4~13

성경은 고난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오늘 말씀도 고난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인간들이 겪는 일들 중에 고난이 많다는 반증입니다.

고난을 만나면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제가 등산을 가끔 가는데요, 어떤 산이든 산은 힘듭니다.

정산에서 누리는 뷰, 차가운 바람, 등산 후에 느끼는 개운함이 다시 산을 가도록 합니다.

 

고난은 자의적 고난과 타의적 고난으로 나뉩니다.

예수님은 고난은 자의적 고난에 속합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의적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타의적 고난은 질병, 죽음, 전쟁, 자연재해, 가난 등 우리들이 겪는 대부분 고난입니다.

고난이라는 분량이 있다고 합니다.

일정한 분량까지만 고난을 준다는 것입니다.

고난의 컵에 자의적 고난으로 많이 채울수록 타의적 고난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자의적 고난을 택하는 것은 어려울 줄 알면서 그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선교사가 되거나, 목사가 되거나, 섬김을 하면서 만나는 고난은 고난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견디가 쉬워집니다.

그러면 고난의 총량이 즐어드는 겁니다.

 

우리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5절입니다.

징계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자녀를 만드는 훈련이기 때문입니다.

징계가 없다면 자녀가 아닙니다.

자녀마다 징계가 따릅니다.

 

11절입니다.

징계는 즐거워 보이지 않습니다.

슬퍼보입니다.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습니다.

고난을 통과한 인생의 열매, 신앙의 열매는 많이 맺으시길 바랍니다.

 

 

 

 

 

 

 

히브리서 12:14~24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방해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먼저 고난입니다.

고난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해야 합니다.

고난은 사랑의 매이며,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하는 도구입니다.

 

다음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합니다.

사람들과 화목하고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이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15절의 말씀을 잘 아시죠.

그러면서 쓴 뿌리에 대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쓴 뿌리가 나서 또 넘어졌다는 말을 듣습니다.

과거에 받은 상처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공동체 안에 독초가 생겨나 분란을 일으키고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쓴 뿌리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 많은 사람을 괴롭히거나 더럽히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쓴 뿌리가 돋아나서 괴롭게 하고,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쓴 뿌리와 같은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는데 방해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 하라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이르지 못한 예로 에서를 들고 있습니다.

에서는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놀라운 특권을 받았는데, 은혜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로 장자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자기에게 올 축복이 야곱에게 갔습니다.

은혜받는 것에 실패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합니다.

받은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신 시내산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죄인이 접근하면 죽음을 당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2~24절의 말씀처럼 성도가 하늘의 예루살렘교회에 이르렀습니다.

은혜로 이르게 된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13:1~6

 

하나님 백성의 실제적인 삶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런 공동체가 되라고 하십니다.

1~3절은 사랑을 실천하는 공동체가 되라고 하십니다.

가까운 사람부터 시작해서 범위를 넓혀가는 것입니다.

먼저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12:10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형제도 사랑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가장 가까운 분부터 사랑하셔야 합니다.

손님 대접에 열심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하다가 주님을 대접하고, 천사를 대접했습니다.

롯도 그랬습니다.

갇힌 자와 고난 당한 자를 돌봐야 합니다.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도움은 공감함이 더불어 가야 합니다.

마음과 직접적인 필요를 채워줘야 합니다.

 

4~6절은 거룩을 실천하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레위기 19장에 기록된 거룩하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 결혼생활이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을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서 사용하라

2) 재정사용이 거룩해야 합니다.

- 있는 바를 족한 줄을 알 때 가능합니다.

물질을 사용할 때 노예로 살지 말고,,도구로 사용하는 것

- 하나님이 함께 함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도움이시다(6)

 

-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재물을 삶의 목표로 삼습니다

- 하나님을 섬기고 재물을 종으로 다루는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받은 훈련은 하나입니다. 축적의 삶이 풍성한 비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가둬들여 하루하루 사는 방식을 배우는 것입니다.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이 쌓아 놓았지만 못 먹게 됩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물질이 아닌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배우는 훈련입니다. 그것을 하는데 물질이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3) 본받는 공동체가 되라(7~8)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3:10~17

히브리서를 읽는 분들의 우리와 많이 다른 상황에 있었습니다.

핍박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유대교에 속했다가 거짓 메시야 예수를 믿느냐는 말도 들었습니다.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편안한 곳, 안락한 곳, 나를 알아주는 곳으로 돌아갈까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사법도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더 이상 짐승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생활도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유대교로 돌아가면 제사법도 익숙한데,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향해 고난의 길을 걸어가라고 당부한 말씀입니다.

그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1-대속제일 제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제사장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뿌립니다.

이날 드린 제물은 다 태워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제물의 똥이나 가죽과 같은 것은 영문에서 불태웠습니다.

 

영문은 이스라엘백성이 광야 생활 할 때 진영을 갖췄습니다.

가운데 성막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영문은 예루살렘 성을 상징, 유대교, 제사법을 가리킵니다.

12-예수님은 예루살렘 밖에서, 영문이 아니라 밖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부정한 존재처럼 여김을 받고 진 밖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똥으로 죽으셨습니다.

13-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밖으로 나아가면 거기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유대교에 머물러 말고 밖으로 나아가자, 제사법에서 벗어나서 나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가자고 하십니다.

 

영원한 도성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지 말고

15-찬송의 제사를 드리자

새로운 예배 형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6-선행의 제사를 드리자

상당한 종교개혁입니다.

영문 밖에 나아가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도 마음을 잠잠하게 합니다.

생각밖에 어려움도 많지만 감사할 것이 많습니다

찬송의 제사는 감사의 제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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