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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일꾼을 세우라

by ysong 2023. 9. 17.

디모데전서 1:1~5

1차로 투옥되었을 때는 연금 상태로 자유롭게 사람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쓴 옥중서신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1차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나서 아가야와 에베소와 마게도냐를 방문했습니다.

4차선교여행이라고 불립니다.

4차 선교여행 도중 아마도 마게도냐에서 있을 때 디모데전서와 디도서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아가야지역에서 큰 집회를 준비하다가 체포되어 두 번째로 로마 감옥에 투옥되었을 쓴 편지는 디모데후서입니다.

마지막 유언과 같은 서신서이기도 합니다.

순교에 임박한 할 때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함께 동고동락 했던 제자를 보고 싶은 마음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자신이 떠난 후에도 교회를 잘 지도하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 있기도 합니다.

 

바울는 디모데를 각별하게 대했습니다.

그를 부르는 호칭에서 느낄 수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로 부르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낳은 아들과 같은 존재로 봤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자식처럼 대했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간이 네게 있을지어다고 간구하는 속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까?

신앙 안에서 이런 관계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 교회를 맡겼습니다.

디모데가 목회를 달 하기를 바라는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3~5절은 디모데가 무엇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 것을 권면했습니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면 신화나 족보와 같은 것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는 수 많은 신화로 가득했습니다.

 

창조신화, 홍수신화, 반인반신의 신화에 빠지면 변론만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룬 업적보다는 논쟁만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아닌 변론에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5절입니다.

말씀은 청결한 마음을 유지합니다.

말씀은 선한 양심을 갖게 합니다.

말씀은 거짓이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사랑으로 생명을 살립니다.

여기에 집중하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1:6~11

목회자가 청결한 마음, 선한 양심,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성도를 섬길 때 교회가 든든하게 세워집니다.

교회 지도자는 중심이 올곧아야 합니다.

중심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지면 목회자도 망가지고 교회도 망가집니다.

특히 목회자가 율법의 선생이 되면 성도들의 삶은 경직됩니다.

은혜가 아닌 법으로 처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생활이 되기 쉽습니다.

 

교회는 질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질서보다 은혜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설거지를 한다고 할 때 순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한 것은 섬김의 마음입니다.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율법에 빠지지 않는 신앙생활입니다.

 

법이 필요합니다.

9~10절까지 법이 없으면 맘대로 행동하는 불법의 사람에게 필요합니다.

그들에게 벌을 주기 위해 필요합니다.

우리의 선행은 법이나 심판을 두려워서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망시키고, 자비로운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릉 억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11절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소식에 따르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희소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의 소식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2~17

하나님이 각자에게 직분을 맡겨셨습니다.

맡겨진 일은 각각 다릅니다.

또 맡겨진 일이 사람의 눈에 중요한 일로 보이고, 하찮은 일로 보이기도 합니다.

주인공인가? 영향력이 큰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충성되게 여겼습니다.

바울의 충성을 보시고 직분을 맡겼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런 맡을만한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주님을 알지 못했을 때 너무나 많은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비방자이고 박해자이고 폭행자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셔서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과 은혜로 직분을 맡았다는 인식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겸손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몇 번 봤던 말씀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 질수록, 직분을 감당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감당하는 직분의 많아질수록,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신에 대한 인식은 반대로 갔습니다.

 

고린도전서 15: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에베소서 3:8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제는 15절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합니다.

오래 참아서 자신을 이렇게 다듬어 주셨다는 확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자신을 똑바로 보게 합니다.

어제 말씀하신 것처럼 진정한 부흥을 이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18~20

바울와 디모데는 사제 간을 넘어 아주 각별한 사이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부를 때마다 아들이라고 호칭합니다.

2절에서는 참 아들이라고 불렀고, 18절에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신뢰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디모데는 이름은 두 개의 헬라어로 되어 있습니다.

디메데오스입니다. 티메=존경, 데오스=하나님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뜻합니다.

디모데는 자신의 이름을 생각하면서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생활을 하길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것이 선한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장군이시고 인생은 전쟁이며 인간은 군병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과 같은 전쟁입니다.

한눈을 파는 순간 넘어지는 전쟁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선한 싸움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선한 싸움을 위해 에베소 교회를 맡겼다는 것입니다.

죄은 구원하는 선한 싸움을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가지 무기로 몸에 지니도록 했습니다.

19절입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입니다.

믿음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됩니다.

믿음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주님에 대한 확고한 신뢰만이 난관을 뚫고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착한 양심입니다.

순수한 양심입니다.

가식이나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마음입니다.

 

양심을 버리고 떠난 두 명의 이름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양심이 인도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두 명은 디모데후서 2:17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4:14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에 다시 거론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소리보다는 자신들의 힘이나 설득력으로 말하고픈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생명을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의하지 않고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제멋대로 행동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1~2

바울은 1장에서 디모데에게 자신을 살피라고 권면했습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지니나라고 했습니다.

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2장부터는 목회자인 디모데가 성도를 어떻게 돌볼 것인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첫 번째로 권면한 내용은 1절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는 황제나 비참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있는 노예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기도에 대해 4가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도의 방법에 대해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간구로 번역된 데시스입니다.

요구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결핍으로 인해 힘들어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결핍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기도는 자기 스스로 인생을 다룰 수 없다는 자각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자각하는 데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소경이 보지 못하는 결핍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결핍이 기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기도로 번역된 프로슈케입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채워줄 수 있는 결핍을 뜻합니다.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힘에 대한 요구입니다.

 

도고로 번역된 엔튝시스입니다.

애원이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왕에게 드리는 청원을 드릴 때 쓰는 단어입니다.

우리에게 청원을 드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감사로 번역된 유카리스티아입니다.

감사와 기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고 동시에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결핍함과 소원과 요구를 하나님에게 가지고 갈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무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의 목적이 2절입니다.

경검함을 위함입니다.

단정함을 위함입니다.

평화로운 시대를 위함입니다.

디모데전서 2:3~7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두 번째 내용은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를 끝까지 붙잡고 나아가라는 권면합니다.

4절의 말씀처럼 두 가지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주께 돌아오길 원하십니다.

또 하나 진를 아는 데에 이르기룰 원합니다.

이 앎은 지식이 아닌 경험을 통해, 교제를 통해 알게 되는 앎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꼭 알아야 할 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진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러 신을 섬겼습니다.

어떤 신의 존엄을 훼손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지금도 여러 신을 두려워합니다.

산의 신, 바다의 신, 하늘의 신을 두려워합니다.

산에서 대물을 찾는 사람들은 산에 오르기 전에 알지 못하는 산의 신에 제의를 표현합니다.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존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운동을 하거나, 사업을 해도 알지 못하는 신들에게 제의를 올립니다.

그들의 두려움에서 건져내서 유일한 하나님만 믿게 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진짜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알 수 없는 신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중보자도 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위대한 진리입니다.

중보자란 두 개 당파 사이에 서서 매개자가 되고 양자를 화해시키는 행위를 하는 자를 일컫는다는.

유대인들은 천사들이 중보자라고 말해 왔습니다.

헬라인들은 모든 종류의 중보자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개입하는 것은 천사나, 신령이나 반신을 통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 사상이나 헬라 사상에서도 사람은 직접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는 생각했습니다.

기독교인은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직접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믿습니다.

바울은 7절에서 자기 자신의 일을 대해 말합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전파하는 보도자라고 밝힙니다.

보도자란 진리를 전하는 자입니다.

자신은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증인은 이것은 진실이며 나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입니다.

증인은 이것이 진실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이것은 유익하다고 말하는 자입니다.

자신은 스승이라고 말합니다.

교사는 사실만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도 그렇게 사명을 감당할 것을 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2:8~15

또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자 성도들도 기도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8절입니다.

각처에서 기도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일터에서나 기도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분노와 다툼이 없이 기도하라고 합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면 기도가 안됩니다.

마음에 화가 있으면 기도가 안됩니다.

기도는 용서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23~24절에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으면 먼저 화해하고 예배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다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디알로기스모는 의논과 의심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신다는 확신을 갖고 기도해야 합니다.

두 마음을 품고 기도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손을 들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항복하는 것입니다.

 

9~15절은 우리 시대와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당시 여성들은 인격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복음으로 인해 여성들의 역할과 권위를 주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우리는 여러 명의 여성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루디아, 유오디아와 순두게, 베베, 전도자인 빌립에게 예언자인 네 딸, 로이스와 유니게 등등입니다.

지나친 역할과 권위로 인해 세상에 오해를 주기도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분열과 갈등이 되기도 했습니다.

 

9~10-치장이 아니라 소박함으로, 선행으로 여자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라고 합니다.

 

13~15-이유를 설명합니다.

질서를 지키라는 것, 순서를 지키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것은 여인의 후손인 마리아를 생각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고 구원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구원을 얻는 것은 교회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역할에 충실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본연의 의무를 감당하므로 정숙함을 이루라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3:1~7

교회지도자에 대한 덕목입니다.

감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장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직무의 의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관리와 교육의 책무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먼저 선한 일을 사모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아내가 인정할 정도이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충실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표현이 아내의 남편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절제하고, 신중하고, 단정하고, 나그네를 대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도자는 가르치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가르쳐 지키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어떻게요?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쾌락을 즐기지 않는 것입니다.

구타하지 않습니다.

폭력을 행사하지 않습니다.

관용해야 합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너그럽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는 것입니다.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말싸움과 같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위해 삽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자녀들을 잘 가르쳐서 공손하도록 해야 합니다.

참 쉽지 않는 일입니다.

새로 입교한 사람을 지도자로 세우면 안됩니다.

세상의 법에 따라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도 인정하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탄의 비방거리가 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3:8~13

초대교회에서는 집사들이 주로 봉사를 감당했습니다.

봉사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가 참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뒤를 보기 때문입니다.

 

봉사자는 정중해야 합니다.

타인을 존중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말이 상대에 따라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한쪽 사람에게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다른 한 사람에게는 그것과는 다른 말을 하면 안됩니다.일구이언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공동체가 분열됩니다.

봉사의 의미가 퇴색됩니다.

가난한 사람을 방문하여 구제하는 일을 하는 집사이기 때문입니다.

솔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때때로 위선이나 교만한 말의 유혹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술에 인박하지 않됩니다.

3:3절에 술을 즐기지 말라고 했는데, 당시 술에 취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술은 방탕하게 합니다.

그것은 남녀를 불문합니다.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곡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깨끗한 양심에 십자가의 비밀을 믿는 자이어야 합니다.

 

11절의 여자들은 집사의 아내나 교회에서 중책을 맡은 여자들을 가리킵니다.

일꾼들은 남을 비방하는 험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봉사를 하다보면 그 사람의 속내를 알게 됩니다.

그런 흠점을 타인에게 알리면 안됩니다.

그런 나쁜 소문은 너무나 빨리 퍼저나가기 때문입입니다.

그래서 절제가 픽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12절이 여자는 남편과 자녀에게 위로와 격려자입니다.

남편과 자녀들을 세우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 직분을 잘 수행하는 것이 아름다운 지위라고 합니다.

 

1~13절을 읽으면서 요즘 시대에 맞지 않는 내용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이 묵상하면 교회가 이런 기준에 따라 충실히 일꾼을 세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디모데전서 3:14~16

목회서신을 쓴 이유가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동시에 동료 성도들과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네 가지 중요한 기능을 나타내는 말을 사용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입니다.

가족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가족이며, 동시에 서로서로 형제자매입니다.

교회 집과 같이 쉼과 평안과 행복으로 가득해야 합니다.

신앙생활, 기도생활, 현실이 행복해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셔서 행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때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어떤 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그 분이 세상에서 불러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불러서 출애굽을 이루어 자유를 주신 것처럼 지금이 이 일을 행하십니다.

 

진리의 기둥의 터입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고대 신전의 기둥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에게 기둥의 이미지는 화려함을 상징합니다.

어떤 기둥은 대리석으로, 어떤 기둥에는 보물이 박혀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랑들은 기둥이라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높이 걸어 놓은 일이 교회의 의미라는 것입니다.

진리를 명확하게 과시하고 나타내는 것 그것이 교회의 의무입니다.

 

터입니다.

버팀벽은 건물을 떠받치는 물건입니다.

세상의 방해에 넘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물건입니다.

 

교회 안에서 16절의 말씀처럼 찬양하는 것입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신 예수님.

성육신 사건과 십자가의 사건, 부활의 사건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보이신 분, 만국에서 전파되시는 분, 온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신 분, 영광 가운데 올려지신 분, 그 분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디모데전서 4:1~5

우상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듬어 만든 우상은 생명이 없습니다.

죽었으나 살아나셔서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성령을 통해 알게 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지주의자는 진리를 따났습니다.

그들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받아들였습니다.

 

그 가름침을 받아 들인 결과가 마음에 화인을 맞게 되었습니다.

낙인을 찍는 것입니다.

짐승이나, 노예에게 낙인을 찍어 소유권을 알렸습니다.

귀신이 마음에 낙인을 찍어 자기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특징을 말합니다.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합니다.

위선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합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직접 계시를 강조했습니다.

신에게 직접 계시를 받은 자가 지혜로운 자라고 했습니다.

이 뿌리는 지금도 신사도운동과 같은 것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들은 음성이 말씀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믿는 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면 버려야 하는데, 본인이 기준이 되어 버리지 않습니다.

 

우리도 마음에서 들리는 음성을 듣습니다.

기도는 선택이 아니라 방향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방향만 맞으면 가는 길에 고난과 환란이 있을 겁니다.

힘들면 돌아가면 됩니다.

방향만 바뀌지 않으면 됩니다.

 

영지주의는 혼인을 금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위에 있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음식으로 거룩해 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고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상이 경건, 하나님의 마음으로 살아내는 것이 경건입니다.

 

종교적인 활동을 경건이라고 하면 언젠가는 외식하게 됩니다.

일상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6~9

어떻게 일꾼이 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경건의 비밀로 양육 받으라고 합니다.

받은 것이 있어야 나눠줄 수 있습니다.

가르치려고 하는 자는 자기 스스로 늘 끊임없이 계속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런 후에 형제를 깨우쳐야 합니다.

 

무엇으로 깨우칠 수 있을까요?

가깝게는 3:14~4: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교회에 대해 바르게 알고,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도록 깨우치면 좋은 일꾼이 됩니다.

일꾼이 될 때, 믿음의 말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일꾼이 될 때,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벋게 됩니다.

디모데와 에베소교인들 간의 믿음의 관계, 신뢰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경건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경건은 예수의 성품을 이루는 것입니다.

먼저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정신을 버리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이야기를 하는데 하나님 없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경건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성입니다.

영지주의적인 신비적인 것을 추구하지 말고 경건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진리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연단해야 합니다.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은 매일 매일 하는 것입니다.

 

훈련의 내용이 절제입니다.

약간의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현실과 내생에 유익합니다.

하나님의 관계가 깊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경건의 연습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함 속에서 기쁨으로 예수를 따르는 훈련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4:10~16

경건을 연습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에게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일까요.

새벽에 나오셔서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10절에서 알려줍니다.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세상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지 않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훌륭한 목회자가 되길 소망했습니다.

먼저 믿는 자의 본이 되라고 했습니다.

12절입니다.

말과 행실은 보이는 모습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정절은 보이지 않는 모습입니다.

모든 면에서 믿는 자의 본이 되라고 권면했습니다.

마음과 겉이 동일하게 본이 되라고 합니다.

지행일치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

목회자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성도의 첫 번째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어리다는 단점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공부하고 가르치라는 권면입니다.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고 했습니다.

13절입니다.

목회자는 읽고 권하고 가르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에 이르게 됩니다.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성숙함을 드러내는 방법이 위에서 언급한 행실, 경건의 연습입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16절입니다.

이것을 행함으로 너와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모두를 구원할 수 있는 길입니다.

제도 오늘 말씀에 유념하려고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단 한 분이라도 우리 주님을 만나고,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됩니다.

 

 

디모데전서 5:1~8

잘못을 지적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나이가 어린 디모데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성도가 잘못 했을 때 견책하는 일이었을 겁니다.

교훈하고 훈계하는 일은 보통 내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 자신도 실수하면서 깨달은 것을 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도 사람과 관계에서 여러 번 실수하는 장면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나바와 다툰 일이나 고린도교회에서 겪었던 갈등도 속할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성도들을 잘 훈계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것을 교정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늙은이는 꾸짖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 목소리에 노여움이나 신랄함이 있어서도 안됩니다.

공포를 일으킨 효과는 일을 모르지만 더 큰 아픔과 고통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늙은이들에게는 애정과 존경을 보여야 합니다.

노인은 아버지처럼, 노파는 어머니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같은 세대의 사람에게는 형제애를 보여야 합니다.

젊은 사람에게는 아우같이 대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서로 낯도 모르는 남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입니다.

 

이성을 대해서는 순결해야 합니다.

마음의 친교가 있어야 합니다.

 

3~8절은 힘들고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돌봄을 이야기 합니다.

남편을 잃은 과부는 존대하라고 했습니다.

자녀들이 있으면 효를 행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보무를 잘 보시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참 과부는 당시 일부다처제로 인해 과부의 신세가 된 분들입니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권면합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주야로 나누라고 합니다.

실수하여 책망받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가족이 돌보라고 합니다.

가정은 가장 작은 교회입니다.

가정교회가 살아야 그들이 모인 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5:10~16

교회는 한 아버지를 모시는 가족입니다.

서로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늘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 과부의 등록부가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명부에 올려서 지속적으로 돕자고 했던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사람을 도울 것인가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9~10절입니다.

60세 이상이어야 합니다.

나이가 상당히 많은 편입니다.

한 남편의 아내였어야 합니다.

순결의 본을 보여야 했다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로 좋은 평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자녀들을 양육한 자이어야 했습니다.

자녀를 끝까지 책임진 자어야 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한 자이어야 했습니다.

성도들의 발을 씨긴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가장 더럽고 낮은 곳을 섬긴 흔적입니다.

환난이나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돕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여러 가지 선행에 몸 바친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명부를 만든 것은 도울 사람이 많아서입니다.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도움이 시작되면 불만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돕는 문제로 예루살렘이 어려움이 겪었던 것을 봅니다.

돕는데도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명부의 조건을 보면 어떻게 살아 왔느냐가 중요해 보입니다.

존경받는 어른으로 살아왔느냐가 중요해 보입니다.

 

올리지 말아야 과부의 조건은 11~15절입니다.

젊음 과부는 안됩니다.

다시 결혼하도록 도우라고 합니다.

다시 정상적인 가정을 갖도록 도우라는 것입니다.

젊은 과부들이 일하지 않고 편하게 살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고,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분란을 만든 다는 것이 이유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사회적으로 취약한 사람을 국가와 NGO가 체계적으로 돕습니다.

교회도 당연히 구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구제가 있어야 하지만 본 임무는 아닙니다.

마른 뼈를 살리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합니다. 말씀이 약해져서는 안됩니다.

앞뒤가 바뀌면 안됩니다.

디모데전서 5:17~22

교회는 신비한 공동체입니다.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질서가 있습니다.

리하는 감독-장로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목사는 교회의 리더입니다.

교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를 세워가는데 필요한 세심한 것까지 다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교회를 세워가는데 어려움과 갈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이 이런 말씀에 기초로 교회가 세워가야 합니다.

17~18절은 교회의 어른들에 대해 어떻게 존대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말씀과 가르치는 교사=목회자들에게 합당한 예후를 해 주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말씀을 전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5:4절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소가 힘든 일을 하기때문에 가끔씩 곡식을 먹습니다.

그런데 소에게 망을 씌우면 소가 지쳐서 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10:10절에 여행을 위하야 배낭이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고 다니지 말라, 일꾼들이 자기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대우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바울 자신은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들이 너무 대접을 요구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이들도 있습니다.

목회자는 말씀에 전념할 수 있는 대접만 받으면 됩니다.

생계에 몰두하면 교회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빈부와 귀천에 흔들리지 않는 능력인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당당하게 말씀만 전할 수 있습니다.

장로나 목회자가 실수했을 경우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9~20절입니다. 고발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세명의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라고 합니다.

고발을 함부로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신중하게 받아라고 합니다.

확연히 드러난 이가 있으면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경계의 본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누가 판단할 것인가?

21~22절입니다.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누가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할 때 편견을 없애야 합니다.

불공평은 한쪽에 치우치는 것입니다.

불공평에 대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는 좌우로 쏠리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디모데전서 5:23~6:2

사랑은 관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세심하게 살폈습니다.

바울의 자상한 면입니다.

디모데는 나이가 어리고, 건강도 좋은 것 같지 않습니다.

바울은 연소함에 대해서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도록 힘쓰라고 권면합니다.(4:12)

데모데의 건강을 걱정한 바울은 23절에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했습니다.

평소 술에 취하지 말라고 강조했던 바울인데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 먹으라고 권면합니다.

이 말씀을 인용하여 맘 놓고 포도주를 마시려는 분들이 있기도 합니다.

특수한 상황입니다.

그곳은 물이 석회석이 섞여 있습니다.

위장병을 유발하기 때문에 식수를 겸하여 포도주를 마시었습니다.

디모데를 향한 걱정과 염려가 담긴 말입니다.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깊어져야 합니다.

 

죄는 반드시 드러납니다.

24~25절입니다.

순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들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숨겼다고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미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선행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다 드러납니다.

밝히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다 드러납니다.

공의로 분명히 드러납니다.

과거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되는 이유입니다.

 

1~2절은 요즘 말로 하면 성도들의 직장생활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전을 범사에 공경하라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비방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를 믿는 상전들에게도 더 잘 섬기도록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한 형제, 자매라는 이유로 맡은 일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잘 가르쳐서 지키도록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6:3~10

저도 친구 목사나 설교를 비롯하여 여러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설교다 다 설교가 아니라는 것을 가끔 느낄 때가 있습니다.

말씀이 아닌 다른 교훈을 교묘하게 섞어서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의 말씀을 보면 말씀과 경건을 전하지 않습니다.

별로 자극적이고 역동적으로 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왜 이렇게 전하는 것일까요?

4절의 말씀처럼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앞서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변론과 언쟁에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을 말씀과 섞어서 전합니다.

 

이런 교훈을 따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형상이 있습니다.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이는 세상의 생각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들으면 들을수록 마음이 부패해집니다.

말씀 주는 능력과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경건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6절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자에게 나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을 던진 자의 마음의 상태입니다.

살리는 분도 주님이고 죽이시는 분도 주님이라는 믿음에서 나오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게 경건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인생이었고, 바울이,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삶의 태도입니다.

 

반대로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탐심은 버려야 주님을 온전히 따를 수 있습니다.

그곳이 주님을 만나는 지점입니다.

 

 

 

디모데전서 6:11~21

63절부터 21절까지는 신앙생활에 정말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7대 덕목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덕목은 분별, 정의, 절제, 인내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의, 경건, 믿음, 사랑, 인내, 온유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단어에 대해 깊은 묵상을 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단어를 심장에 간직하여 평생 실천해 보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디모데가 큰 도움을 얻은 것처럼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능력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12절의 말씀처럼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언제까지 이 싸움을 해야 할까요?

14절입니다.

우리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 아니면 우리가 죽어 주님을 뵐 때까지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해야 할 싸움입니다.

 

먼저 이 치열하게 싸우는 자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7~18절입니다.

부자에게 마음을 높이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도록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재물에 소망을 두지 않게 해서 나눠줌의 기쁨을 누리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게 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필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목적을 분명히 하도록 가르치라는 권면입니다.

 

그런 사람은 너그럽게 됩니다.

이것을 에베소교회에서 가르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깨우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19절처럼 모두에게 참된 생명을 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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