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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전서

사랑의 수고로 가득합니다

by ysong 2023. 8. 9.

데살로니가전서 1:1~5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체류한 기간의 기사는 사도행전 17:1~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 일행이 3주 동안 머물면서 말씀을 전했는데, 야손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유대인의 핍박을 피해 베뢰아로 피해야 했습니다.

바울이 불안한 생각에 싸여 있을 때 데모데가 아덴에 도착합니다.

바울은 데모데를 데살로니가로 돌려보냅니다.

데모데가 바울에게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들은 환난 가운데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기 위해 고린도에서 서신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 중에 첫번째 편지입니다.

주요 메시지는 환란과 재림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두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기도하면 감사의 제목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감사하게 되었을까요?

복음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열매일까요? 3절입니다.

 

믿음의 역사입니다.

일하는 방식을 칭찬합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믿음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보수의 목적으로 일하고, 의무감으로 일하기도 합니다.

반면 데살로니가교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믿음으로 해습니다.

 

사랑의 수고입니다.

사랑에는 수고가 따름니다.

수고가 없다면 말로만 사랑한 것입니다.

사랑의 수고는 더 이상 수고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에 대한 수고, 성도를 섬기는 수고, 전도의 열매를 수고는 사랑의 수고이기에 감사하고 기쁜 것입니다.

4절에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택하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인내입니다. 인내는 누구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 아래 있기에 견디는 것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있는 한 모든 것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밤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벽을 향하여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을 가진 자는 모든 것을 견딜 수 있습니다.

이는 말로만 된 것이 아닙니다.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주어진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으로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갖게 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6~10

데살로니가 교회는 본받을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환란 가운데 복음을 지켰습니다.

복음 때문에 겪는 환란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 겪는 고난입니다.

대접받지 못하는 수모입니다.

그들은 이런 환란 가운데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예수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7절에 그들은 모든 교회가 본받고 싶은 교회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본 받는 것입니다.

즉 흉내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흉내 내고, 바울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흉내 내고, 베드로를 흉내 내는 것입니다.

가까운 목사님을 흉내 내고, 장로님을 흉내 내고, 권사님, 집사님을 흉내 내는 것입니다.

겉모습만 아니라 내면까지 본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의 본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한 믿음의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그들의 무엇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갔을까요?

9절입니다.

우상을 버린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섬긴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부활과 재림을 믿음입니다.

 

3주밖에 안되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말씀을 받아 믿음으로 승리했습니다.

단단한 교회로 자라가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

바울은 예수님을 따랐던 신앙인입니다.

그는 초대교회를 세우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는 바울의 헌신과 섬김을 본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삶과 늘 함께 따라다니는, 동행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그를 반기는 곳은 없었습니다.

빌립보에서도 바울은 고난과 능욕당했습니다.

루디아라는 평생 동역자를 만나기도 했지만 감옥에 갇혀 능욕당했습니다.

그 고난을 통해 간수의 집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말씀을 전했는데,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의 설교를 비난했습니다.

그 비난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런 비난 속에서 바울이 어떤 자세로 일을 했는가를 알려줍니다.

먼저 바울의 설교는 간사한 말로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 했다는 비난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3절에 말씀을 전하는데 간사함이나 부정함으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마술과 같은 사람 속이는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고 밝힌 이유입니다.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4절에 바울은 복음을 위탁받았다는 생각으로 처신했다고 말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수입을 얻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5절과 9절에 무엇을 얻고자 알랑거리는 아첨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9절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일을 했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바울은 개인적인 영예를 구한다는 비난 받았습니다.

그래서 6절에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분명하게 밝힌 이유입니다.

 

바울은 독재자처럼 행동한다는 비난 받았습니다.

그래서 7절에 온유함과 순함을 강조했습니다.

바울의 온유함은 어진 아버지의 온유함이었습니다.

 

비난과 박해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울의 신앙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의 전도정신이며 목숨까지 바친 신앙정신입니다.

개인적인 목회철학을 세우는데 크게 은혜받은 말씀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이 각자의 신앙철학을 세우시는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0~16

어제 나눈 3~9절의 말씀은 바울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증인이었습니다.

증인인 데살로니가교인들도 바울처럼 비난과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11절에서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했습니다.

위로했습니다.

비난하는 자를 경계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이나 데살로니가교인들이 환난 가운데 있게 되었을까요?

동족에게 박해당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인을 격려하는 말이 독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비밀을 13절에서 알려 줍니다.

바울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니까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고난 당하는 것을 보니까 성도의 길을 잘 걷고 있는 것입니다.

 

14~16절에 동족을 박해한 유대인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와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들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들은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지도자들은 무죄한 예수님을 죽이려고 논의하고 실행했습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복음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너희들도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바르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데살로니교인의 같은 민족인 이방민족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유대인은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했다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진정한 섬김의 뜻을 놓쳤습니다.

특권 의식에 빠진 유대인은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만이 모든 사람의 대적이 되는 요인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안에 있는 유대인은 이방인이 구원받기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 방해는 자기의 죄를 채우는 행위입니다.

그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유대인의 악이 채워지듯 이방인의 죄도 채워지는 박해가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위로, 권면에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여러분들도 잘 가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1~9

바울이 예수님을 믿으면 환난이 따라오는데, 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증언했습니다.

예수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어제 본문의 배경이 되는 사도행전을 보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의 행정수도였습니다.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윤택했습니다.

(아가야-고린도)

그곳에는 유대인이 상당히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회당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의 관례대로(선교방식대로) 회당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 말씀을 전했는데,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죽어셔야만 했고, 또 죽은 자 가운데서 반드시 다시 사셔야만 함을 가르치면서,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잖은 귀분인들이었습니다.

유력한 지도자들의 부인으로 상류층에 속한 귀부인들로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인들이었습니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의 헬라인이나 특히 상류층 귀부인들이 상종할 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설교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했을 뿐만 아니라 바울과 실라의 삶에 합류했습니다.

 

반면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고정관념에 막힌 유대인의 반발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설교를 통해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생명의 역사가 뜨내기에 불과한 바울을 통해 일어났음을 그들의 자존심이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시기심이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비겁한지를 보세요?

자기들이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시장바닥에서 폭력을 행사하면서 빌붙어 사는 폭력배들을 동원합니다.

소위 종교지도자들이 불량배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소동을 피우고 바울 일행을 끌어내기 위해 바울 일행이 묵고 있는 야손의 집을 덮칩니다.

마침 바울 일행이 야손의 집에 없자, 유대인들은 집주인 야손과 그 집에 모여 있던 믿음의 몇 형제들을 붙잡아 그 도시의 통치자 앞으로 개 끌 듯 끌고 갔습니다.

이유는 천하를 어지럽게 하고 로마 황제를 거역하는 불순한 바울 일행을 맞아들였다는 거짓 모함으로 고발했던 겁니다.

바울을 찾지 못하자 보석금(서약서)을 받고 풀어줍니다.

다시는 바울 일행과 교제하지 않는다는 서약서입니다.

 

다시는 교제하면 중벌을 받겠다고 서약서를 쓴 야손과 형제들은 그날 밤 바울과 실라를 베레아로 떠나보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7~3:5

신앙인의 관계는 다릅니다.

신앙인의 관계는 마음이 통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신앙인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얼굴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표현입니다.

비록 지금은 상황이 허락되지 않아 얼굴을 보지 못하지만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는 표현입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보고 싶어지는 겁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고 싶어서 몇 번 방문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여의치 않았나 봅니다.

영적인 방해가 계속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이 막아서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본인 직접 갈 수 없게 되니까 디모데를 보내게 됩니다.

베레아에서 머무는 동안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서 믿음을 굳게하고 믿음의 위로를 하도록 했습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변하지 않으니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관계를 발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를 보낸 목적이 2~3절입니다.

특히 3절에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3주 동안 복음을 전하면서 당차 닥칠 고난에 대한 말씀도 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말씀이 자신들의 현실에 경험되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나 유혹하는 자들에게 넘어갈까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고난이 있는 것 보니까 잘못된 복음이라고 유혹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예수 믿었더니 고생만 하게 되었다고 낙담할 것을 염려했던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믿음을 굳게 잡도록 디모데를 보내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매일 주셔서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 주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6~13

신앙인이 생각하는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6절의 말씀입니다.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 기쁜 소식을 함께 누리고 싶어서 만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매주 우리들의 예배 모임이 이런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주고받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6절의 말씀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기를 놓고 기도합니다.

 

신앙인의 가장 큰 위로는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위로는 무엇일까요?

나의 현실에 도움을 주는 위로보다 더 위로가 있습니다.

7절입니다.

바울과 일행이 비록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가 이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그 소식이 먹지 않아도 배부름과 같은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살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토록 데살로니가 교인을 만나고 싶은 것은 10절입니다.

주야로 기도한 기도 제목입니다.

심하게 간구한 기도 제목입니다.

만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11~13절입니다.

갈 수 있도록, 사랑이 넘치도록, 믿음이 굳건하게 하도록, 거룩함에 흠이 없도록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쌓고, 쌓다보니 더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서입니다.

혹시나 선 줄 알았는데, 넘어질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이런 만남, 이런 위로가 가득하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2

신앙의 성장은 배운데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성숙하고 성장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이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하고 바랬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가르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3가지입니다.

2절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거룩을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은 구별됨입니다.

세상과 구별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제 막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익숙한 세상의 습관을 하나하나 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버릴 것은 음란이었습니다.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대하는 것입니다.

이방인처럼 색욕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음란을 위해 이웃을 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문이 퍼질 정도였습니다.

계속 잘 하기도록 권면했습니다.

 

셋째는 직장생활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11~12절입니다.

참 앞선 권면입니다.

직장이 선교현장이기라는 것입니다.

근면하고 아름다운 생활로 기독교를 외부에 알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궁핍하지 않도록 열심히 노동해야 한다는 것도 권면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하나님의 뜻을 다시 언급하면서 기본에 충실한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되길 권면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5:4

처음부터 진리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알고, 경험하고, 쌓여서 깊어집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선교를 시작할 때, 주님이 곧 재림하실 것으로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임박한 종말론 신학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기에 힘쓰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면서 내용이 달라집니다.

그의 서신서들은 교회를 세우는데 필요한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초창기에 가졌던 신학을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내용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영적인 세계를 알길 원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명확한 진리를 갖고 있기를 바랬습니다.

13절에 자는 자는 표현은 죽음에 대한 말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달리 죽음에 슬퍼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재림의 사실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자들도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재림하십니다.

주님이 재림 할 때 산자가 변하게 됩니다.

주님과 불이 섞인 유리바다 건너편에서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이 말씀이 서로에게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권면했습니다.

맞습니다.

시작과 끝을 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끝을 알고 싸우는 인생은 재방송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림의 시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불신자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할 때 갑자기 오십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피할 시간이 없습니다.

준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믿는 자는 어둠에 있지 않기에 매일 매일 경각심을 갖고 살게 됩니다.

재림이 주는 영적인 유익입니다.

깨어서 살기 때문입니다.

경각심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어둔에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 걸어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5~11

그리스도인은 정직해야 합니다.

빛 가운데 생활해야 합니다.

어둠에 머물지 않고 빛 가운데 살기 위해 손해도 감수해야 합니다.

어둠에 있으면 빛을 싫어합니다.

어두운 동굴에 살고 있는 벌레들은 빛이 들어오면 더 깊숙이 들어갑니다.

 

빛 가운데 살아가는 신앙인이 취할 태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3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6절에 깨어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맑은 정신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밤은 취하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밤의 문화는 세상의 문화입니다.

어둠의 문화입니다.

그들처럼 살지 말고 깨어 정신을 차리라고 합니다.

 

깨어 있기 위해 무장해야 합니다.

8절에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는 것입니다.

가슴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무장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는 투구입니다.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 것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살아가도록 보호하는 투구입니다.

개인적인 무장입니다.

 

공동체가 무장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서로 권면하고 덕을 세우야 합니다.

혼자가면 쉽게 지칩니다.

함께 같은 신앙의 길을 걷는 자가 필요합니다.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고, 주저앉아 있으면 손잡아주는 신앙의 동료가 필요합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동료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깨어서 살아가는 성도의 태도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2~22

교사의 죽음으로 교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선생님들의 교권이 땅에 떨어졌습니다.

학생들이 교사를 존경하거나, 교사가 학생들을 사랑으로 아끼는 시대가 지난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하나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가 깨지면 망가진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지도자들에 대한 권위가 추락했습니다.

제가 어릴 때처럼 목사님을 존경하거나, 목사님을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12~13절은 요즘 우리 시대의 교회, 사회에 대한 권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스리는 자, 권하는 자의 수고를 알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고 땀을 흘리는 수고를 알아야 합니다.

그 역사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소중한 헌신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는 성도끼리 화목할 때 이뤄집니다.

서로 다투고 시기하면 14절의 말씀처럼 전진하지 못합니다.

 

게으른 자들을 권면하고 그 권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음이 약한자(소심한 자)를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주고, 오래 참아야 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항상 선을 따라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는 매일매일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벤트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상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매일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적인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는 지금의 설교자와 같습니다.

악한 것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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