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골로새서

위의 것을 찾으라

by ysong 2023. 7. 7.

골로새서 1:1~8

골로새서 염색업이 유명했습니다.

골로새는 부자도시 라오디게아,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폴리스와 가까이 위치했습니다.

골로새는 지리적으로 상호관계가 있어 산업적으로 크게 번영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교회는 바울 자신이 창립하거나 방문한 적이 없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 3년 체류하는 동안 말씀을 들은 에바브라가 개척했을 것으로 봅니다.

골로새교회는 이방인이 주축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에바브라가 방문했습니다.

에바브라가 가저온 소식을 다 좋았습니다.

4절에 바울은 골로새 교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도들에 대한 사랑의 소식을 듣고 감사했습니다.

6절에 그들이 성장하여 열매를 맺은 것을 기뻐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이단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다시 정리해 주었습니다.

예수를 바르게 아는 것이 이단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골로새서를 기독론에 관한 말씀으로 봅니다.

바울은 무엇에 감사했나요?

3절에 바울을 기도할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그 이유가 4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신앙생활의 양면입니다.

기독교인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더불어 사람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믿고, 서로 섬기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야 신앙이 성장하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은 단순히 지적인 확신이 아닙니다.

사랑의 행위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하늘에 축적된 소망에 근거합니다.

5절에 이것이 하늘이 쌓아 둔 소망이라고 말합니다.

 

왜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려고 하는가? 왜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가? 왜 자기 인생을 남을 위해 바치려 하는가? 그 대답은 우리 앞에 있는 소망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9~14

어제 읽기만 하고 나누지 못한 6~8절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

6~8절은 복음이란 무엇을 하는지를 요약해 놓고 있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좋은 소식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에 놓게 합니다.

복음은 열매를 맺으며 증가합니다.

복음은 개개인의 생활을 변화시키고, 주변을 변화시킵니다.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에바브라가 통로로 쓰임을 받았습니다.

복음은 소유를 넘어 나눠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9~14절은 바울이 골로새 교인을 위한 기도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길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최대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원하는 계시는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기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이해력을 가져서 하나님의 뜻을 알길 원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10절에 이것을 행할 힘을 갖도록 기도했습니다.

행동을 하면서, 움직이면서 하나님의 뜻을 점점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만 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는 것이 자라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점점 더 알게 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이런 신앙의 과정을 통해 자라나길 기도했습니다.

-행함-열매-자람으로 나타나길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견딤과 참음과 기쁨을 갖도록 기도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덕목입니다.

이는 어떤 상황에도 지지 않는 힘입니다.

어떤 일에도 견디고 어떤 사람에게도 참는 자세가 무너져서 안됩니다.

무너지면 기쁨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승리의 기쁨이 가득하도록 기도했습니다.

 

바울의 골로새 교인을 위한 마지막 기도 내용은 감사입니다.

속량하여 하나님의 기업이 되게 하신 것,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서 사랑의 아들의 나로 옮기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바울의 기도를 닮았으면 좋겠습니다.

골로새서 1:15~17

골로새서의 핵심 말씀입니다.

이단에 빠진 이유는 예수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생각으로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설명과 표현은 다양합니다.

선재하시는 예수님, 창조주 되신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 천사들의 위에 계신 예수님,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님, 구세주가 되신 예수님, 중보하시는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님, 너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 다시 오실 예수님,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는 예수님, 영원히 함께 하실 예수님 등등

 

15절에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기간 제자들에게 나를 보면 하나님을 본다고 했습니다.

 

형상은 초상이 될 수 있습니다.

초상은 완전한 것이 현현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완전한 현현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우리는 예수님을 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볼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완전한 초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인데, 완전합니다.

19절이 이 말씀입니다.

충만은 완전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스케치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요약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이 없는 초상화 이상의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계시입니다.

 

예수님은 선재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입니다.

처음 난 자는 일반적으로 명예의 칭호입니다.

처음 난 자는 메시아의 칭호입니다.

처음 난 말은 시간적 관계로만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명예를 가진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 한 것은 피조물이 가지는 최고의 명예는 아들의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피조물은 아들의 것이 되고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창조는 아들에 의해서 되었습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는 예수님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분이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전 세계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최후의 도달점입니다.

골로새서 1:18~23

어제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 창조주 되신 예수님, 선재하신 예수님에 대해 살펴봤습니다.

18절은 예수님이 교회에서 어떤 분인지를 알려줍니다.

 

예수님과 교회에 관계되는 4가지 중요한 사실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의 머리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몸 자체는 무능합니다.

머리가 없이는 죽은 것입니다.

 

원래 몸인 목사나 장로가 교회의 머리가 되려고 하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사람이 교회의 머리가 되면 안됩니다.

성도는 교회의 몸입니다.

머리되신 예수님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유기체입니다.

교회가 살아 움직여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없이는 교회는 진리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도구가 되는 것은 교회의 특권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근본이십니다.

교회의 창시자입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신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교회의 원동력은 부활신앙입니다.

 

20절은 구속주 되신 예수님에 관한 설명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화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화를 고치고 간격에 다리를 놓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주실 만큼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화해의 중보는 십자가의 피입니다.

화해의 원동력은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회해의 목자적은 21~23절입니다.

성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하고 음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신앙을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합니다.

 

골로새서 1:24~29

바울은 자신이 교회의 머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교회의 머리가 아니라 몸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일꾼은 일을 해야 합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괴로움이 있습니다.

봉사가 고난과 고통과 희생을 동반합니다.

 

그때 24절의 말씀은 의미를 알려줍니다.

그 고난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고 그것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봉사하여 받는 고난은 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권이요 명예입니다.

 

일꾼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임무의 본질입니다.

그 임무는 대대로 세상에서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명백해진 미밀과 새로운 발견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담에게는 선악과의 비밀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뱀에게도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10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 13:11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우리는 예정과 선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2:2절입니다.

 

28절은 일꾼의 사역입니다.

이 비밀을 각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권하고 가르쳐서 성숙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욥기의 표현으로는 정금같은 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꿈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꿈입니다.

바울은 2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의지하여 일꾼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세우는 일은 행복한 일입니다.

 

골로새서 2:1~7

골로새교회와 라오디게아교회에게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는 요한게시록에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않아 책망을 받았던 교회입니다.

동쪽에 19km 상류에 위치한 골로새와 서쪽으로 10km 떨어진 온천으로 유명한 히에라폴리스로에서 흐르는 물이 합쳐진 곳에 위치합니다.

바울은 아직 이들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사랑했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무엇을 위해 힘쓰고 있는가요?

2~3절의 말씀입니다.

만세 전에 감추어진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안에 지혜와 지식과 보화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바르게 알면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4절에 교묘한 말로 속이는 이단에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예수에 대해 의심하고, 말씀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없으면 흔들립니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상황과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기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정해 놓은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본주의 사상은 이 질서를 경시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도 하나님이 정해 놓은 질서에 따라 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필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나무가 흙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견고하고 탄탄한 기반 위에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에게 뿌리박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집을 세워가야 합니다.

이렇게 서 있기 때문에 인간적인 어떤 힘 위에 서 있지 않고 예수님의 힘 위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에 어떤 바람에도 굳건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8~15

복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들을 합니다.

골로새교회에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복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에 교회는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예배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복음만 전하면 밋밋하고 말합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늘 듣던 말씀이라고 합니다.

이런 태도가 바로 복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는 태도입니다.

 

골로새교회는 예수만을 전하는 복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고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부가적인 철학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사상을 가르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식인이 아니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그들은 초등학문 즉 점성술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했습니다.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영적인 세계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우리 사회에 잘못된 영적인세계, 귀신론이 얼마나 편만하게 퍼져있습니까?

 

9~10절에 예수님으로 충만하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만으로 완전하다는 말씀을 하신 이유입니다.

복음만으로 충분합니다.

늘 듣던 그 말씀이 생명입니다.

 

다른 측면의 이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에게 할례를 강요했습니다.

신앙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다.

믿음에 할례가 부가되어야 했다.

육체적 표시는 마음의 태도를 대신하든가, 적어도 부가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충만하다고 하신 이유입니다.

십자기로 이기셨습니다.

모든 영적인 권세자들을 이기셨습니다.

신앙은 단순합니다.

밋밋하게 보이지만 그것이 능력입니다.

예수님만으로 충분하지 못하는 교회가 세상의 가치를 교회를 끌어드리는 세속화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골로새서에서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골로새서 2:16~23

어제 말씀에 이어서 계속해서 예수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정신세계와 물질세계를 구분한 영지주의 사상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기독교가 자꾸 이런 사상에 영향을 받아 혼합되어 가려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특별한 날에 대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자들은 특별한 날을 숭배하는 사상이 있었습니다.

그 날에는 어떤 일을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되는 것을 정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이사를 할 때 손없는 날을 택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날이라는 인식이 얼마나 미신적이고 오래된 전통인지를 알게 됩니다.

 

당시 교회들은 주일이나 안식일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도 사회적인 영향을 받아 날에 대한 다툼이 있었습니다.

날을 종교와 동일시 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18, 23절에 꾸며낸 겸손은 고행을 의미합니다.

거짓 겸손함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특별히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여 타인을 내려다보기 때문에 거짓 겸손아라고 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자신이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23절의 말씀처럼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천사를 숭배하는 사상이 팽배했습니다.

유대인은 천사의 교리를 높게 발전시켰습니다.

천사를 향해 예배했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예배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드리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영적인 지혜를 가진 자만이 특별한 환상을 본다고 과장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볼 수 없는 것을 자신들은 볼 만큼 거룩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과장했습니다.

교회가 이 영향을 받아 거듭나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환상을 자꾸 보려고 하고 과장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17절에 바울은 이것들은 모두가 진리의 그림자의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본체는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19절에 이 모든 일들은 머리되신 예수님을 붙들지 못한 결과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21~22절의 말씀처럼 한때 유명해졌다가 사라진 주장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한 유행을 붙잡지 말라고 합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자유를 바꾸어 비기독교인의 노예 상태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경계했습니다.

골로새서 3:1~4

기독교의 세례를 받음으로써 죽고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물이 그를 덮을 때는 마치 죽어 매장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물에서 나오는 것은 새 생명으로 다시 산 것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으려고 물속에 들어갈 때와 똑같은 인간으로 물에서 나올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합니다.

대체 어디에 다른 점이 있는가?

그 다른 점이란 기독교인의 생각이 높은 것을 구한다는 데 있습니다.

지상의 사소한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판단 방법, 새로운 균형 감각을 갖게 합니다.

 

누가 위의 것을 찾을 수 있는가?

위에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사랑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는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

 

2절에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땅의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치 기준은 인간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세상정신을 거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했기에 손해를 감수하는 시대정신입니다.

 

그 비밀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 분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누가 위의 것을 생각하고 찾을 수 있는가요?

주님만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한 분들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만으로 충만하다는 생각이 부족하기에 자꾸 시대정신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3~4장은 실천편인데, 도덕이나 윤리를 강조하는 것 같은데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그것을 지킬만한 힘이 없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며,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지키도록 성령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윤리와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골로새서 3:5~11

위의 것과 반대되는 것은 땅의 것입니다.

 

5절도 그러므로 시작합니다.

땅의 것은 2장에서 거론되고 있는 초등학문으로 형성된 가치관이나 사상입니다.

땅의 있는 지체를 죽이어야 합니다.

육체를 죽이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대적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게 하고자 하는 자신의 인간적인 지체를 죽이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곧 이하입니다.

자기중심주의를 죽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간음과 부정을 버려야 합니다.

이생의 자랑과 정욕의 안목, 육신의 안목을 버려야 합니다.

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돈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면 훔치기도 합니다.

명성과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면 악한 야심까지도 가집니다.

권력을 얻으려고 한다면 악한 야심까지도 가집니다.

사람에 대한 욕망이라면 성범죄까지 범합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자부했던 청년에게 예수님은 청년의 마음 속에 웅크리고 있는 탐심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10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상이기 때문입니다.

땅의 것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경쟁해서 쟁취하려고 했습니다.

뺏어서라도 가지려고 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권면합니다.

옛 사람과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합니다.

옛사람은 무엇입니까?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입입니다.

살인의 무기들입니다.

이젠 10절의 말씀처럼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에 따라 지식의 새롭게 함을 입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12~17

12절도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하늘을 향하고, 자신의 지체를 죽이는 것을 향했던 시선이 이젠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웃을 항하고 있습니다.

 

골로새교인들은 누구이가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이 말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적용하여 사용되었던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방인은 거룩하고 성결한 백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사랑 받은 백성입니다.

 

하나님은 백성은 이웃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사람과의 관계를 흉택하게 하는 덕목들입니다.

첫 번째가 긍휼입니다.

불상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비는 친절을 베푸는 것입니다.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용서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서 말하는 사랑의 다른 표현입니다.

12~14절은 사랑이 해답이라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주관하도록 자신을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생각과 마음을 주관하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시와 찬미로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의 것을 찾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이 위의 것을 생각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이것이 몸의 지체를 죽이는 성도의 삶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도록 합시다.

 

 

 

 

 

 

 

 

 

 

 

골로새서 3:18~4:1

기독교는 가정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중에서 부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인류 첫 가정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아담이 하와를, 하와가 아담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사탄의 첫 시작은 둘의 관계를 깨는데 있었습니다.

타락한 부부는 서로 핑계를 내고,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탄은 지금도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윤리는 상호 의무의 윤리입니다.

한쪽으로만 모든 의무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같이 중요한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 부인은 남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집이나 가축이나 여러 가지 물건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인에게는 법적 권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처음으로 상호 의무에 의한 윤리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따른 것입니다.

주님과 교회의 관계인 것처럼, 머리와 몸처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둘이 하나로 묶인 관계입니다.

 

에베소서에서도 동일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복종과 사랑의 관계입니다.

남편의 머리됨을 인정하는 복종입니다.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남편은 책임자로서, 보호자로서 그 역할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책임입니다.

 

부부는 쌍방의 관계입니다.

가깝기 때문이라도 존경해야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존중하는 것입니다.

온전한 신앙을 이루면 점점 부부의 관계가 화복되는 것입니다.

한쪽이 먼저 믿으면 나중에 따라 믿게 되는 이유입니다.

 

에베소서와 동일한 말씀입니다.

23절의 말씀으로 기도의 제목을 삼고자 합니다.

주께 하듯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신 것처럼 따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 주님의 사랑, 주님의 긍휼을 따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보시는 것으로 여기면서 맡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나를 평가하는 분은 주님밖에 없다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2~6

기독교인의 노동윤리도 시대를 앞섭니다.

노예는 주인의 눈앞에서만 봉사해서는 안된다, 감시할 때만 일해서는 안된다는 권면합니다.

당시 교회의 구성원이 노예가 대부분임을 생각할 때 시대정신에 앞선 권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은 의와 공평으로 노예를 대우하라고 합니다.

지금도 고유용주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인은 항상 자신 위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다윗은 항상 자신이 대리통치자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사장, 고용주, 지도자는 항상 자신 위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처신해야 합니다.

 

바울은 항상 기도를 계속하라고 말합니다.

서신서를 보면 기도에 관한 내용이 빠진 적이 없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깨어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할 때 다른 생각을 하거나, 졸거나 잠자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이 잠잔 일이 생각난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분명 바울은 골로새교인들보다 영적으로 앞서 있습니다.

영적으로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서신서들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바울의 겸손함을 짐작케 합니다.

 

바울의 기도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전도,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 감옥에 매인 것 등이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이 세상에 보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힘과 기회를 줄 것을 기도하여 주기를 원했습니다.

 

골로새교인이 교회의 외부에 있는 사람에게 지혜와 재능을 가지고 행동할 할 것을 권면합니다.

세월을 아끼는 것은 전도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선한 영향력으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6절의 말씀으로 기도의 제목을 삼고자 합니다.

말은 항상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합니다.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처럼 해야 합니다.

살리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면서 말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4:7~9

바울이 첫 번째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쓴 편지가 4편입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4편을 옥중서신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는 로마 감옥까지 방문한 에바브로디도가 직접 가지고 가서 교인들에게 읽어 주었을 겁니다.

 

나머지는 3편은 두기고가 가지고 가서 읽어 주고, 바울과 일행에 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두기고를 신실한 동역자라고 부릅니다.

두기고는 편지에 쓰여 있지 않는 바울의 사적인 내용까지 전달했습니다.

어쩌면 두기고는 바울의 사적 대사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입니다.

 

7절입니다.

에베소서 6:21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에베소에 살았던 두기고는 로마 출신입니다.

에베소 교회 대표자로서 예루살렘에 있는 가난한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연보를 가지고 가기도 했습니다.

골로새서에는 한 문장이 더 추가됩니다.

주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사랑을 받고, 진실하고, 종이 되었습니다.

 

두기고는 위로의 전달자입니다.

그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집안의 노예였습니다.

로마까지 도망해 왔는데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비록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그는 도망자이고 노예의 출신입니다.

그런데 두기고는 그와 긴 여행을 함께 합니다.

두기고는 사람을 신분이나 인종으로 구분하지 않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두기고는 진실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편지에 쓰여 진 내용 이상의 내용을 그래도 전달하는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그가 편지를 전달하거나, 연보를 전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두기고와 같은 사랑받는 사람으로 주님의 종으로 신실하게 대사의 역할을 감당하길 소망합니다.

 

 

 

골로새서 4:10~11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와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신실한 하나님을 닮은 신실한 사람들이 겪었던 고난과 위로를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과정에는 크고 작은 기적과 이적을 체험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그들의 삶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아리스다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출신인 마게도냐 사람입니다.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너무 앞에 있어서 폭도들에게 체포되어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소요가 있은 후에 바울 일행이 에베소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바울 일행과 동행했습니다.

20:4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사도행전 27:2 “아시아 해변 각처로 가려 하는 아드라뭇데노 배에 우리가 올라 항해할새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하니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가이사라 감옥에서 로마로 압송될 때 함께 했습니다.

아리스다가 바울과 최후의 영행을 같이하기 위해서는 바울의 노예로 등록한 것같이 생각됩니다.

그리고 지금 로마에 바울과 같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어려운 문제에 빠질 때는 언제나 아리스다가 있었습니다.

아리스다고는 바울이 곤경에 처했을 때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타인의 곤경에서 필요로 하는 타입의 선량한 사람입니다.

 

마가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1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 중에 곤란한 일을 당할 때 마가는 일행에서 떠나 귀가해 버렸습니다.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하려고 할 때 마가의 문제로 바나바와 갈라지게 됩니다.

바울은 중도에 포기한 자를 다시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베드로와 동행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베드로는 그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벧전 5:13)

전설에 의하면 전도자가 되어 애굽에 가서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만약 마가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마가에 대한 신뢰를 보내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지막으로 투옥될 때 마가는 바울과 같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마가를 나의 동역자 마가로 불렀습니다.

마가는 자신을 다시 찾은 사람입니다.

 

유스도라 하는 예수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하여는 이름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로마에 같이 간 사람입니다.

이들의 충성은 바울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을 겁니다.

힘들 때 같이 있어 주는 사람이 위로자입니다.

골로새서 4:12~15

어제에 계속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명예 있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의 명단이 계속됩니다.

에바브라입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회의 목사입니다.

에바브라가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골로새 도시를 순회하면서 돌봤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종이었습니다.

 

그는 항상 교인들을 위해 애써 기도했습니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기를 항상 기도했습니다.

세 도시를 순회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 사실이 바울에게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바울은 누가를 2차 선교여행 중에 만났습니다.

드로아에서 만났는데, 바울의 몸이 좋지 않아서 치료를 받다가 만난 것으로 보입니다.

누가는 의사입니다.

당시 의사는 지금처럼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보통 해당 된 노예 중에 똑똑한 사람들이 종사했던 것으로 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등장한 누가는 바울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의 최후 변론자로 나서기도 했습니다.

 

데마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찬사나 평가가 붙지 않았습니다.

이름만 있다는 것이 다른 뜻이 있어 보입니다.

그는 단지 데마입니다. 그 이상의 인물이 아닙니다.

 

여기 말고 데마를 소개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는 많이 흔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결국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데마는 변절이나 열정이 식은 것으로 보입니다.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형제들입니다.

초대교회는 주로 가정집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의 지도자 집에서 모였습니다.

에베소에는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 있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빌레몬의 집에서 모인 교회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와 가정이 같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가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