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빌립보서

주 안에서 기뻐하라

by ysong 2023. 6. 13.

빌립보서 1:1~6

빌립보교회는 자주색 옷감으로 옷을 만드는 루디아집사와 간수와 가족, 귀신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자매가 주축이 되어 세워진 교회입니다.

루디아는 이름이 아닙니다.

리디아 지방 출신의 경건한 사람입니다.

귀족출신이 아닙니다.

이방인 출신이며 아마도 노예출신일 것으로 봅니다.

그가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기도하다가 만나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된 분입니다.

빌립보교회의 담임목사는 2:25절에 나온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에게 필요한 후원금을 가지고 그리스에서 로마까지 온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빌립보교회에 약간의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두 주축이 되는 루디아집안과 간수집안의 약간의 다툼이 생겼습니다.

더 주도적으로 섬기겠다는 육신의 안목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담임목사인 에바브로디도가 해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바울사도를 찾아와 목회적으로, 인간적으로 나눔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이 빌립보교회를 위해 쓴 편지가 빌립보서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의 평생 동역자로 물질과 기도의 후원교회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늘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3~4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빌립보교회의 헌신과 섬김을 자주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그때마다 생각하며 기도하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힘들게 신앙생활하는데 지켜달라고, 그들의 믿음이 헛되지 안호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겁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생각할 때마 기쁨이 가득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생각하며 근심이 많았는데, 빌립보교회는 달랐습니다.

똑같이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인데 성장의 속도는 달랐던 모양입니다.

 

빌립보교회는 한결같았습니다.

5~6절입니다.

첫날부터 시작했습니다.

루디아집사는 바울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되면서 자기 집에 기거하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편의를 제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집이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도록 하나님이 끝날까지 변함없이 섬길 수 있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같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도 지금까지 후원하면서 웬만하면 끊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 개척 연도와 비슷한 분도 있습니다.

교통선교회가 지금까지 우리교회에게 후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1:7~11

마음이 통한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는 마음이 통하는 관계였습니다.

바울은 가이사에게 상소했기에 재판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 모르고 있는 상황입니다.

7-빌립보교회를 향한 바울의 애정 표현

1) 너희가 내 마음에 있기 때문, 마음에 품었기 때문에 간구할 때마다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된다는 것

2)바울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할 때나 확정할 때 동참했기 때문(변명은 최후 진술가 같음)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될 것을 함께 나누고 싶다는 것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보살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8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살기 때문입니다.

멋진 신앙적인 단어 같습니다.

심장(장기)=장기가 감정, 사랑이나 동정심이 솟아나는 곳

) 백막이 빨라지면서 심장이 뛴다, 겁이 없는 것을 간이 부었다, 몸시 두려워 하는 것을 간이 콩알만 해지다, 초조하고 안타까운 속을 많이 태우는 것을 애간장을 태운다, 단장의 미아리고개-장기가 끊어짐

예수의 심장으로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셨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과 빌립보교회의 교제는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빌립보교회를 사모해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두근거리는 설렘이 가득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람을 대하고, 맡은 일을 대하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9~11절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한 빌립보교회를 향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위한 바울의 기도제목입니다.

1) 사랑이 점점 풍성하게 하사-점점이 중요/감정의 사랑 900-의지의 사랑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사랑에 지식이 더해지지 않으면 그 사랑은 맹목적이 되기 쉽고, 총명이 없는 사랑은 편협하거나 근시안이 되기 쉽습니다.

지식=하나님의 앎=하나님 말씀을 통한 영성입니다.

총명=분별력, 통찰력=경험과 체험을 통한 영성입니다.

이유)

1) 선한 것을 분멸하기 위해(본질을 아는 것)

2) 그리스도의 날까지 진실하고 허물이 없기 위해서(다른 사람을 넘어지지 않게 하다)

3) 의의 열매가 가득하도록(15:1~5)

 

 

 

빌립보서 1:12~18

바울이 당한 일, 일이나 나의 매임은 감옥생활에 대한 표현입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뜻대로 되지 않아 막힌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먼저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까?

13절입니다.

시위대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시위대군인은 일반군인과 달리 13,000~14,000명의 로마시민으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최고의 대우를 받았고,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매일 두 명의 군인이 4교대로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나기도 힘든 이들을 붙잡아 놓고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 복음을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죄수로 잡혀 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바울에게 들은 복음을 집에 돌아가 가족에게 전했던 것입니다.

투옥으로 말미암아 복음이 놀랄 만한 속도로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14절절에 형제들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형제는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동안 연약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잘 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재판장에서 진지한 자세로 때로는 조용한 목소리로 예수 그리스도를 변증하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에 대한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1)투기와 분쟁으로 보는 성도는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기 싫었습니다.

2)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성도는 바울이 법정에서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왜 바울이 그토록 가기원했던 스페인으로 보내지 않으시고 로마법정에 세운 것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바꾸는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17절에 다시 설명

18-바울의 태도

사역의 초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두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것에 두지 않고 주님을 높여드리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 그의 기쁨이었습니다.

 

깨달은

1. 잘되어야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 아님

2. 잘되면 예수를 더 잘 믿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닐 때도 잘 믿는 것이 중요

 

에베소서 1:20~26

바울이 기뻐하는 것과 우리들이 기뻐하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 말씀처럼 투기와 분쟁으로 하든 그리스도만 전해지만 기쁘다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기쁘면 주님도 기쁘고, 자신이 기쁘지 않으면 주님도 기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이익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쁨은 달랐습니다.

 

19, 20절은 바울의 기쁨에 대한 내용입니다.

1) 빌립보교회 사람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이 자신을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구원은 성화의 과정에 대한 표현입니다.

빌립보교회의 기도가 그만큼 큰 역할을 하기에 기쁘고, 성령님이 도우심을 늘 경험하기에 기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오늘 엎드려기도하는 기도제목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길 바랍니다.

 

2)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자신 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통해 예수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 바울의 기쁨입니다.

자신이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표가 분명한 분에게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존귀하게 하다=크게 하다 그리스도는 커지고 자신은 작아지는 것입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만 커지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습니다.

절대적인 것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이고 삶과 죽음은 상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분들에게 나오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아직 초보적인 단계입니다.

그러나 목표를 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살아보자고, 해 보자가고 하는 것입니다.

생과 사를 초월하여 그리스도가 존귀되는 것입니다.

21~26절에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유입니다.

사는 게 낫지만 주님의 뜻에 맡김입니다.

22-죽어서 존귀케 되면 좋고, 살아서 사역의 열매가 맺으면 좋고

23-죽는게 낫지만 살아 있는 것도 유익입니다.

그 중에서 훨씬 더 좋은 것을 선택하라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내가 더 사는 이유는 빌립보교회의 믿음의 진보를 보는 것입니다.

빌립보교회에 믿음의 진보에 도움을 조금 줄 수 있기에 빌립보교회에 유익입니다.

빌립보교회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조금 더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1:27~30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 뭘까요?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신분에 걸맞은 행동이 요구되는 경우입니다.

대통령에 걸맞은 예우해 드립니다.

대통령이 왔는데 본체만체하면 상당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합당한 행동 요구 받고, 그렇게 할 때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국격이라고 합니다.

나라도 걸맞은 행동이 요구되는 경우입니다.

코로나가 풀리면서 해외에 나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의 관광객들의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반면 중국관광객도 세계 곳곳에 많습니다.

늘 행동과 말이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중국정부가 교육시켜 내 보내겠다고 합니다.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곧 천국 시민답게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표현입니다.

천국 시민에 걸맞은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27-오직-하나 한 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활하라-시민이 되라, 시민으로 의무를 다하라고

어떻게 합당하게-진지하게

 

어떻게 하는 것이 진지하게 시민다운 것인가요?

첫째는 서서입니다.

군대가 일렬로 서서 적을 맞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군데가 무너지면 전체가 무너집니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협력해야 합니다.

함께 경주하다, 함께 싸우다, 미식추구 연상하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존중하고 그 복음을 가치있게 여기며 그 복음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8-반대자들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조금도 겁내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합당하게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싶었습니다.

 

셋째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29-고난을 두려워하지 마라고 합니다.

이런 합당하게 생활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동일한 모습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30-누구에게나 동일한 싸움이 있습니다.

바울도, 빌립보교회, 우리도 있습니다.

신앙에 걸맞은 나를 찾는 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에베소서 2:1~4

1절은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이 부사는 앞에 있는 부분을 요약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뒤에 있는 내용은 앞에 나온 내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1:27~30절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권면이 오늘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1:27~30절이 빌립보교회 사람들 전체에게 주는 권면이라면 2:1~4절은 빌립보교회 사람들 개개인에게 주는 권면입니다.

 

합당하게 생활하는 개인적으로 실천 내용입니다.

1) 권면(파라클레스)입니다.

곁에서 속삭이다, 보혜사와 어근이 같은 단어입니다.

권면은 상대로 하여금 용기를 갖도록 돕는 것입니다.

질병, 경제적인 터널을 통과하는 이들에게 그래서 내가 기도하라고 했잖아는 권면이 아니라 권총을 쏘는 것입니다.

권면은 언제나 따뜻해야 합니다.

2) 사랑의 위로입니다.

격려와 비슷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격려라면 위로는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한 격려입니다.

권면과 위로의 공통점은 곁에서 말해 주는 것입니다.

3) 성령의 교제입니다.

동역, 참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함께 친교 하도록 만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함께 사역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5:19~23절 성령의 일과 육체의 일이 있습니다.

4) 긍휼과 자비입니다.

모두 장기와 관련이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의 심장(1:8)을 가지고 하는 행동입니다.

 

4가지의 행위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1) 권면을 위해서는 마음을 같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눈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권면은 이내 잔소리로 바뀌게 됩니다.

2) 위로는 사랑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납니다.

3) 성령의 교제는 성령께서 주시는 교제로 하나 됨을 통해 가능합니다.

생각과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여행이 즐거운 것과 같습니다.

4) 긍휼과 자비의 상품은 한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3)

다툼-저급한 본성으로 편을 가르는 것입니다.

허영-(케노독시아)텅 비다(케노스)와 영광(녹사)의 합성어로 허영은 텅 빈 것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무엇이 자신을 틀림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는 의미

빌립보서 2:5~11

행복하게 살려면 내가 속한 공동체가 행복하면 인생이 행복하게 됩니다.

내가 소속된 가정, 직장, 교회에서 행복하면 행복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될 수 있는가요?

1) 5절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면 됩니다.

마음=생각+감정을 포함합니다.

빌립보교회에 갈등이 있습니다.

마음이 갈라져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4:2절을 보면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생각과 감정이 하나가 되라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겸손한 마음이며 겸비한 삶입니다.

겸손의 뜻은 비굴함과 굴욕을 의미합니다.

노예처럼 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그렇게 사셨습니다.

6절부터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의 과정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입니다.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다 가지신 분입니다.

그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존성, 무한성, 완전성,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동등됨을 포기하셨습니다.

영광을 포기하셨습니다.

스스로 놓았습니다.

2) 자기를 비웠습니다.

영광과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마땅히 누려야 할 영광과 주장을 표기하셨습니다.

3) 종의 형체를 가지셨습니다.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양만 아니라 실제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었습니다.

4) 십자가의 죽음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이 마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여 주셨습니다.

그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하나님이 높여주십니다.

한나를 높여 주신 것처럼 그렇게 높여 주십니다.

 

빌립보서 2:12~18

성화의 과정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루어가야 하는 구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구원은 과거 현재 미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과거 완료의 구원인 칭의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100% 해 주시는 구원으로 신분의 구원입니다.

마치 고아원에 있는 아이를 데려다가 양자로 삼은 것처럼 그 아이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죄인이었는데 의인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이었는데 양자가 되었습니다.

2) 현재진행의 구원인 성화의 구원입니다.

수준의 구원입니다. 마치 고등학교에 학교를 다니지만 수준이 다른 것과 비슷합니다. 성도마다 수준이 다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겸손하게 자라가야 합니다.

3) 미래완료의 구원인 영화의 구원입니다.

세상 마지막 때에 이루어지게 될 구원입니다.

12절은 성화를 이루는 자세를 말한 것입니다.

항상 복종하며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13-성화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지만 실제로 우리 속에 그러한 삶을 살도록 열정을 주시고 의지를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14-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합니다.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해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일이 못마땅하게 여겨질 때 원망이 나옵니다.

출애굽기에 원망이 많이 나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투덜거리다, 구시렁구시렁거리는 행동입니다.

시비-옮음과 그름입니다.

헬라어직 의미는 말로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나 다투는 것입니다.

원망이 내적인 것이라면 시비는 외적인 것입니다.

원망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부족에서 나옵니다.

시비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부족에 나옵니다.

시비와 원망으로 하지 말아야 이유가 15절과 16절입니다.

14-흠이 없다는 비난받을 만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윤리적으로 높은 수준외적, 순전하다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다--내적인 고결함

 

16-각자의 구원을 이루어가기 위해 행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생명의 살리는 말씀)을 붙잡는 것과 생명의 말씀을 밝히는 것은 같은 의미입니다.

그 속에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명의 길을 걷는 자들이 누릴 수 있는 기쁨입니다.

빌립보서 2:19~30

디모데가 빌립보서를 가지고 빌립보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보낸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빌립보교회를 보고 들은 이야기를 진실하게 전해주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빌립보교회 사람들의 신앙과 삶의 이야기를 들어서 자신도 격려받기 위함입니다.

 

혹시 빌립보교인들이 디모데를 모를까 봐 디모데가 누구인가를 편지에 쓰고 있습니다.

20~21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가를 증거입니다.

1) 뜻을 같이하다=같은 영혼을 갖다=디모데는 나의 분신이다.

이런 지인이 있다면 참 행복할 것 신앙의 수준은 혀끝에 있지 않고 손끝에 있습니다.

 

22-디모데는 연단을 받았습니다.

무슨 연단을 받았을까요?

디모데후서 1:5절을 보면 디모데의 믿음은 거짓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때는 언제나 겉사람으로 만나지 않고 속사람으로 만납니다.

겉사람-외모, 지위, 명예, 학문 등의 명함에 쓰여 있는 내용으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하면 결코 신앙이 성숙할 수 없습니다.

 

21절을 보니까 주변 사람 중에 디모데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일은 열심히 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함께 수고한 동역자이었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빌립보교회를 방문하기를 원했습니다.

풀려나면 곧 갈 것이고, 디모데를 속히 보내겠다고 약속합니다.

 

25- 에바브리디도는 누구인가?

1) 나의 형제-유대인과 이방인인데, 형제라고 합니다.

2) 함께 수고한 자=동역자/동일한 주인을 위해, 동일한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입니다.

인종도, 나이도, 경험도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종교도 달랐습니다.

3) 함께 군사 된 자-전우=서로 목숨을 같이 걸었던 관계가 되었습니다.

4)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입니다.

 

그런데 몸이 약했던 모양입니다.

빌립보교회로 인해 힘들었던 것이 병으로 나타났던 것으로 보입니다.

27절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기적처럼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면 하루아침에 해결됩니다.

바울과 에바브로디도의 관계는 하나님의 사랑이 맺어준 것입니다.

 

빌립보서 3:1~9

1-주 안에서 기뻐하라

빌립보서 주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

환경을 넘어서 주어지는 것=우리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1)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바르게 이식하고

2) 지금의 모습까지 얼마나 하나님께서 애쓰셨는지 깨달아야 함

3) 16번이나 등장

4) 일반적인 개념으로 기뻐하는 것은 외적 조건에 대한 내면적 반응입니다.

2~21절까지 율법주의자들을 조심하는 권면입니다.

2- 율법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 유대인들을 개 같은 존재로 거짓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합니다.

행악하는 자=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공로를 필수로 가르쳐 진리를 혼탁하게 합니다.

몸을 상해하는 자=율법주의자들은 자신이 할례 받은 것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몸에 하나님께서 금하신 칼자국을 낸 것에 불과합니다.

삼가라 3번 반복-그만큼 율법주의자들을 조심하라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공로주의. 직분주의가 다 율법주의에 속합니다.

 

3-진정한 할례파로 사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징입니다.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합니다. 봉사하다=예배드리다=하나님을 섬기다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합니다. 6:14 자신의 자랑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삽자가라고 합니다.

3)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합니다.

 

5~6절 바울이 육체를 자랑할 만한 것을 나열

1) 8일 만에 하례를 받음-유대교로 개종한 부모의 아들은 받을 수 없고, 순수한 유대인의 아들만 받을 수 있음, 정통 유대인임을 말하는 것

2) 이스라엘 족속-바울의 부모가 정통 유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상 대대로 그러했다는 의미, 이스라엘 족속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하신 민족이라는 의미, 양반 중의 양반이라는 의미

3) 베냐민지파-사울왕..남유다(유대지파와 베냐민지파), 모르드개, 라헬의 아들로 가나안 땅에서 낳은 유일한 아들

4) 히브리인 중 히브리인-히브리인 부모에게 태어난 히브리인, 흩어진 유대인 중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어 회당. 히브리어 회당을 지어 예배 드립니다. .

5) 바리새인-자신이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바리새인이라는 것은 자신이 율법을 깊이 연구하고 지키려는 것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보여 줌

6)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 했음-열심당의 열성 회원이었다는 의미

7)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바울이 가장 자랑하던 것이고,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고상하게 여기던 것이었음

 

그러나 7~8절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만 의롭게 됩니다.

배설물로 여기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빌립보서 3:10~16

의인이 살아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3가지를 알길 원했습니다.

10절입니다.

1) 그리스도입니다.

이전에는 율법을 더 잘 알기를 원했습니다.

율법에 흠이 없기 위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도 증인으로 자리를 지켰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부정확하고 왜곡된 자식, 선입견이 된 지식이었는지 눈뜨게 됩니다.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주님이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2) 부활의 권능입니다.

삶의 최후에 기다리는 것은 사망이 아니라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알게 되었습니다.

3) 주님의 고난에 참야함입니다.

고난의 성적표입니다.

우리는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죽겠다고 예수님을 믿음는데 살게 됨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이미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을 더 알기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은 주님은 알면 알수록 그 고상함이 더욱 빛나기 때문입니다.

 

12절은 자신의 삶의 대해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서로 매여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에, 남편은 아내에, 학생은 학교에, 직장인은 직장에 매여있어야 합니다.

주님께 매이면 매일수록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붙잡히면 붙잡힐수록 더욱 신실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직~~~” 자신이 인생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었지만 자신도 그분을 붙잡기 위해 전력 질주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무엇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13절의 말씀처럼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에 집중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 생각할 것은 바른 목표에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처럼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푯대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자라기 위해 생각할 것은 신앙의 완성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30년 동안 한 방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온전히 이루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온전히 이루지 못했음에도 온전히 이루었다고 착각하던 사람들이 빌립보교회에 있었습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온전히 이루었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빌립보서 3:17~21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고상함을 이야기 하고, 세상의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서 이런 나를 본 받으라고 말합니다.

17절에 나를 본받으라.

간혹 부모가 자식에게 네 형 좀 봐라든가, “네 형 반만 따라가 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형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나를 본 받으라고 합니다.

그만큼 자신감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따라 간다고 했습니다.

빌립보교회도 나가 하고 있는 몸부림을 보고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고 합니다.

주변에 이런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을 본으로 삼는 사람을 본받는 것이 바른 신앙의 태도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을까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그리스도인의 전기를 읽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생각과 태도로 임했는지를 배우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어떻게 몸부림쳐야 하는지를 적용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거짓된 복음을 전해지는 것을 통곡하고 있습니다.

 

19절은 거짓된 복음을 전하는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1) 멸망-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해도,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아도 그 마침은 멸망입니다.

2) 배를 신으로 섬기는 자-먹는 것이 전부인 인생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은 배입니다.

3) 자랑이 아닌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입니다. 불법법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4)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인생이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배할 때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그때 우리는 초막에 있어도 상관없고, 왕궁에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낮은 몸, 천한 몸이지만 예수님이 오실 때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됩니다.

 

빌립보서 4:1~3

바울의 서신을 읽다 보면 각 서신서들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의 다른 마음과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다른 서신서보다 에베소서와 빌립보서는 다정한 느낌이 듭니다.

바울의 속정이 깊이 배여 있습니다.

푯대를 향해 함께 달려갑시다.

나도 몸부림치면서 달려가고 있으니 나처럼 따라 오십시오.

 

하늘의 시민권이 있고, 하늘에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1-주 안에서 서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다가오는 적을 막기 위해 진지를 굳게 지키고 있는 군인들에게 쓰던 용어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주 밖에 서라고 유혹합니다.

부부관계, 자녀교육, 직장생활과 사업, 결혼, 취미생활 등에서 주 밖에 서라고 합니다.

세속적 가치관으로 서라고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그것을 물리치고 주 안에서 서야 합니다.

나도 주 안에서 서 있으니 빌립보성도여, 지금 이 말씀을 읽는 성도여 주 안에서 서길 바랍니다.

 

2-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맞추는 것은 조화를 이루는 것의 시작이고 과정이며 결과입니다.

주님과 나, 주님과 다른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우리의 등 뒤에 자기 사랑이라는 스프링과 이기심이라는 고무줄이 달려 있어서 이내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같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삼상 18:1 요나단은 하나님 안에 있었고 하나님 안에 있는 다윗을 보았기 때문이다.

 

3-서로 돕는 것입니다.

빌립보 성도들이 앞장서서 섬기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와 줄 것을 부탁드립니다.

두 마리 소가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아요.

왼쪽소를 안소, 오른쪽 소를 마라소라고 부릅니다.

안소가 크고 힘이 좋습니다.

서로 힘을 합해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의 멍에를 메라고 했습니다.

안쪽에 주님이 밖에 내가 메고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은 기쁨과 감사가 넘치게 됩니다.

 

빌립보서 4:4~7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최상의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1) 우리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5)

공정함을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공정함을 성취하는 따뜻한 그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관용을 보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관용하심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의 관용을 입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가죽옷을 입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속일 때 하나님의 관용을 입지 못했다면, 그는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를 팔아먹는 치사한 인간으로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에서 목자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관용을 입지 못했다면 그는 출애굽의 지도자가 아니라 처가살이한 사위의 시조가 되었을 것입니다.

나를 만든 관용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라는 것입니다.

만달란트 탕감받았으면 백데나리온은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용입니다.

2)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6)

우리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께 아시게 함으로 주님 안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염려에 대한 통계가 있습니다.

걱정거리의 40%-결코 현실로 일어나지 않는 일// 30%-이미 일어난 일

22%-사소한 일// 4%-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

4%-우리가 바꿀 수 있는 일 고로 96% 염려하는 것이 무의미한 것입니다.

염려-찢다, 분열하다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마음의 일부분이 찢겨나가는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의 최고의 처방전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판에 박힌 말처럼 들리지만 이보다 정답이 없습니다.

기도에 대한 단어를 세 번이나 반복합니다.

기도는 공예배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두는 것입니다.

간구는 개인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감사는 돌아보는 것입니다.

5절의 동사인 주께서 가까우시니라4~6절의 동사들 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주 안에서 기뻐라하,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네 개의 명령을 성취하게 하는 열쇠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지 모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주시는 응답은 7절입니다.

1) 마음-심장, 감정을 대표

2) 생각-사고 작용을 대표

염려의 출발지는 바로 마음과 생각입니다. 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기 위해 모든 지각이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동원된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3) 지킨다-군인이 초소를 지키는 것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기쁨의 열매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빌립보서 4:8~9

8절은 하나님의 평강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는 8가지 덕목입니다.

1) 무엇이든지 참되며- 참되다는 것은 겉과 속이 같다는 의미입니다.

2) 무엇에든지 경견하며- 고상한, 존경하는, 가까이에서 볼수록 높은 품격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3) 무엇에든지 옳으며-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른 것입니다.

4)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순결하다, 흠없다,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는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5)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매력적이다는 의미, 속사람의 아름다움은 겉사람의 아름다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국민가수, 국민배우는 겉사람보다 속사람이 아름답기에 가능하다고 봅니다.

6)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좋은 평판을 듣다, 한 두 번 잘했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반복해서 잘하게 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7) 무슨 덕이 있든지- 인격적 능력입니다.

8) 무슨 기림이 있든지- 칭찬 칭송의 뜻입니다. .

생각하라고 명령형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 명령형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행동을 요구합니다.

평생 계속 생각해야 하는 것들이라는 의미입니다.

 

9절은 배우는 것이 이성을 통한 앎이라면, 받는 것은 감성을 통한 앎이고, 듣는 것은 의지를 통한 앎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스승처럼 말을 합니다.

배우고는 말씀을 바울로부터 배우 내용들입니다.

받고는 바울이 쓴 편지를 회람해서 읽은 것입니다.

듣고는 바울을 만났을 때 들은 설교들입니다.

본 바는 같이 지내면서 바울의 인격과 삶의 태도를 본 것입니다.

배운 것을 실천하라는 것은 익히라는 것입니다.

습관처럼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7, 9절에서처럼 평강의 하나님이 평강을 지켜주신다는 것을 겸험했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 응답은 평강입니다.

평강이 물 밑들 밀려오면 응답이 시작된 것입니다.

평강이 머문다는 것은 평강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빌립보서 4:10~13

빌립보교회 사람들의 도움에 깊이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빌립보교회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사람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감사와 신앙을 함께 표현하려다 보니 말이 길어지게 되었습니다.

 

10- 빌립보교회는 바울을 후원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좋은 기회를 얻지 못하자 거의 잊히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 투옥되자 예전에 생각했던 것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를 통해 후원금을 보냈고 바울은 그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보낸 후원금이 바울을 기쁘게 했지만 본질적인 기쁨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후원금 안에서 기뻐한다고 하지 않고 주 안에서 그것도 크게 기뻐한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큰 기쁨을 준 것은 빌립보교회가 보내 준 후원금이 아니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1-궁핍이라는 단어는 한 번 씁니다.

마가복음 12:44-과부가 가난한 중에, 생활비 전부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합니다.

자족은 자기에게 필요한 적절한 양을 스스로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외적인 양이 적을 때는 그것을 크게 여겨서 적절한 양으로 만들고, 많을 때는 그것을 적게 여겨서 적절한 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족은 속이 아주 강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12절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에 처함을 통해 자족을 배웠다고 합니다.

비천하다는 것은 가난하고 돈이 없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 때문에 무시당하고 천대당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배고프고 궁핍한 상황에서도 그것을 모자란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풍부하다는 필요한 것보다 많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배부름이나 풍성함에도 그것을 자기 속에 적절하게 맞췄습니다.

나머지는 흘러보냈습니다.

 

바울이 풍부에 경험할 때나 궁핍을 경험하게 될 때 주님께서 속삭여 주신 것입니다.

바울아 힘들지? 그래도 복음을 위해, 나를 위해 살아 줄래? 내가 너와 함께할게.

이것이 바울이 배운 일체의 비결입니다.

 

풍부함과 배부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주신 주님께 집중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비천에 처하면 사람들과 세상과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고, 풍부하면 눈에 보이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잊기 쉽습니다.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13절은 여기서 능력은 가난과 풍부에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가 더 크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14~20

바울은 자족을 배웠습니다.

그에게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분을 신뢰함에서 생성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배부름과 배고품, 풍부와 궁핍에도 교만하거나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는데 14절에 괴롭다고 합니다.

 

이 괴로움은 일차작으로 감옥생활에 대한 표현입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함이나 사람들의 오해에 따른 괴로움입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지만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때 빌립보교회로부터 온 선물은 하나님의 격려와도 같았다는 것입니다.

 

14~15절에 빌립보교회가 함께 참여함에 큰 위로를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함께 나누고, 함께 교통한 빌립보교회를 가리킵니다. 의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남다른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빌립보교회는 복음을 받은 이후부터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일행을 후원했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두 번이나 쓸 것을 후원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베뢰아, 고린도에 있을 때도 쓸 경비를 제공했습니다.

 

바울은 도움을 준 빌립보교회가 더 풍성해질 것을 기도했습니다.

빌립보교회가 보낸 후원금은 18절의 말씀처럼 향기로운 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받은 선물로 인해 풍족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감사의 표현입니다.

실은 풍족하거나 여유 있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있다고 하고, 채우고도 남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족을 배운 사람, 일체의 비결을 배운 사람의 표현입니다.

 

바울과 그의 사역을 섬기려 했던 빌리보교회의 신앙도 참 아름답고 그들의 선물을 하나님께 드린 제물로 승화시킨 바울의 신앙도 참 귀합니다.

우리의 삶도 모두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향기로운 제물로 가꾸어 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역사는 그런 사람들을 통해 오묘하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은총, 그것은 살아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바울은 그런 빌립보교회가 풍성한 대로 모든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들의 손길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바울처럼 이런 경험을 했기에 이 말씀대로 이뤄지는 것을 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