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어둠 속에 빛이 되는 교회
  • 성령의 열매가 풍성한 교회
갈라디아서

다른 복음을 전하지 말라

by ysong 2023. 5. 26.

갈라디아서 1:1~10

바울의 인사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사도라는 직분에 대한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새롭게 시작된 인생에 대한 자각이 뚜렷합니다.

누구에게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갖고 있어야 할 인생관이기도 하고, 사람과의 관계에서 은혜와 평강을 구하는 태도입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개척한 교회입니다.

예수로 인해 구원에 이르는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 복음을 버리고 다시 할례파들의 주장을 따랐던 것입니다.

할례파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부족하다면서 할례를 받아 유대인이 되어 율법을 지켜야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6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쓴 동기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이와 비슷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잘 구분하셔야 합니다.

 

그런 주장은 교란케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얼굴이 상기된 표정입니다.

복음에 대한 확신에 찬 바울은 8절에서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습니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자신이 깨닫고 알게된 복음 이외에 것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는 확신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은 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입니다.

사람이 듣기 원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람이 공로를 자극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사랑의 종교심을 자극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값없이 주어진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인간의 어떤 공로나 의가 들어가지 않은 죽음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의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1:11~24

율법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율법에 관련된 이단들이 있습니다.

율법주의자인 이단은 여호와증인, 안식교, 몰몬교, 안산홍증인회입니다.

율법폐기주의자는 구원파, 기복주의,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율법이 완성되어 산산수훈의 말씀처럼 더 나은 의를 지켜야 합니다.

할례파가 갈라디아에 와서 바울을 폄하했습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지도 않았고, 예수님의 제자도 아니었다는 주장을 덧붙였습니다.

현실적으로 틀린 주장이 아닌 것으로 들려서 많은 갈라디아서 교인들이 흔들렸습니다.

바울은 사도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울이 전한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설명한 이유입니다.

11~12절에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계시로 알게 된 것입니다.

깊은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통해 주님이 열어주신 계시로 알게 되었습니다.

또 성경연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13~14절에 자신의 과거를 거론한 이유입니다.

자신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조건과 환경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믿는 자를 핍박했고, 교회를 박해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율법에 대해 전통했습니다.

열심히 따지면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나를 부르셨을 때 사람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부모와 가족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사도와 제자들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으로 들어가 3년 동안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철저히 주님 앞에서 모든 진리를 알기를 원했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예루살렘에 방문했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진리를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베드로나 야고보도 같은 진리를 이야기 했습니다.

 

그 후에 고향 다소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박해자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에 대해 교회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내가 전한 복음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진리를 떠나지 마십시오.

율법에 매여 있었던 나의 잘못되었던 그 신앙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갈라디아서 2:1~10

다양한 사역의 모양이 있습니다.

목사, 선교사, 교사, 성도 등 다양한 직분으로 사역을 합니다.

지역도 여러 가지입니다.

크기도 다양합니다.

사람은 크기와 역할을 놓고 봅니다.

 

계속해서 사도권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렇게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울이 자랑하고 싶어서나 자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입장에서 볼 때, 공부한 것으로 볼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같은 제자들과 비교가 안된 정도입니다.

바울은 이런 것에 억울해 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은 배설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잘못될 것을 염려한 것입니다.

 

2절에 베드와 야고보와 은밀하게 받은 계시의 내용을 나눈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사로이는 개인적으로,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7절에 자신은 무할례자에게, 비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을 맡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도와 동등한 입장으로 서로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8~9-주님이 각각 필요에 따라 역할을 맡겼습니다.

이것은 누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필요에 맡겼을 뿐입니다.

근거 없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0절에 베드로와 요한이 부탁한 일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각자 자기의 구간이 있습니다.

모세도 자기의 구간만 갔습니다.

요즘 많은 목사님들이 은퇴하면서 교회의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구간을 놓치못한 결과입니다.

 

디도가 할례를 받지 않게 한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을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말합니다.

 

 

 

 

 

 

 

갈라디아서 2:11~21

이번주 제가 말씀을 저도 바울과 같은 마음에 동감이 되어 새벽에 탁탁하게 말씀을 나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답답했을까에 대한 공감이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사도권을 주장하기 위해 극히 개인적인 일을 거론하는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앞 내용과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에 방문했을 때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루살렘교회에서 안디옥교회를 방문했습니다.

베드로가 안디옥교회 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12절의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도 안디옥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이 분들은 예루살렘교회의 교인들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황급히 자리를 떴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를 한다는 말을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베드로의 태도를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a라는 사람이 있고, b라는 사람이 있는데 둘은 서로 사이가 않좋다고 가정했을 때 a라는 사람과 식사를 하고 있는데 b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들어오면 어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단호하게 베드로를 책망했습니다.

14절입니다.

유대인이 이방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이방인을 유대인처럼 살라고 하면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일까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요?

누구든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계하지 않으면 오식하는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베드로와 동등한 입장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복음에 대해서는 더 확고한 입장이라는 것입니다.

 

16절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이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깊은 깨달음을 받은 말씀입니다.

성취된 위가 전가된 의로 고정에서 손을 내미는 것과 같은 믿음을 통해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17절 의롭다고 하면서 죄를 짓는 것을 보니 예수의 공로란 것이 효력이 약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갖는 자가 있습니다.

이는 밝은 빛으로 나아가면 작은 티끌이 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에 있을 때 발견할 수 없는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20절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3:1~9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대한 애증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이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사사로운 일까지 거론했습니다.

바울의 답답한 마음을 읽혀집니다.

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3절에 이같이 어리석으냐라고 쓴 표현에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멍청아, 바보야라고 쓰는 표현이라고 볼 때 깊은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마음의 감정을 표현할까요?

바울이 어리석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절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을 깨닫지 못한 자

5절 성령을 주시고 능력을 행하시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

9절 믿음이 복의 근원인 것을 체험하지 못한 자

10절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주로부터 살아나게 된 것을 모르는 자

 

우리가 듣기로도 딱딱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 가운데 온전히 세워질 때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다니지 않습니다.

이곳저곳 기웃거리지 않습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

- 혈통으로 유대인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다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면적 유대인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14절 이방인들 가운데 예수를 믿으면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깊고 깊은 진리입니다.

 

 

 

 

 

 

 

 

 

 

 

 

갈라디아서 3:23~29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한번 약속하신 것을 꼭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빈말을 하곤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면 꼭 실망하게 됩니다.

 

간혹 사람들 중에 꼭 약속을 지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분들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한발 다가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했습니다.

그 약속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지켜졌습니다.

 

17절의 말씀처럼 이 약속은 430년 후에 주신 율법으로 깨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어떻게 왜 주셨을까요?

19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모세에게 전해 진 것으로 보입니다.

약속된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기능입니다.

 

믿음이 오기 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갖기 전까지 유대인들은 율법의 권세 아래 꽁꽁 묶여 있었습니다.

율법으로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율법은 진정한 구원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게 됩니다.

율법이 지시하는 그리스도를 바라봐야 합니다.

24절이 이런 이야기입니다.

율법의 초등교사입니다.

똑똑한 노예 중에 교사가 되어 주인의 자식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이 선생이 되어서 학생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합니다.

율법의 기능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25절 믿음이 온 후에는 =그 자식들이 자라면 더 이상 초등교사의 지시를 받지 않습니다.

26절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까지 율법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젠 에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율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해위가 구원을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4:8~15

갈라디아교회가 다시 할례를 받고, 유대인이 되어야 구원이 받는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일입니다.

3~4장에 믿음과 율법의 관계를 다시 설명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이 뼈저리게 깨달았던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누구보다도 열심이었던 허송세월한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식으로 생각한다면 이런 것 같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 땅에서 잘되고 천국에 갈 수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구원을 받게 되면 이젠 세상과 다른 가치관 세상관을 가지고 살기에 고난과 어려움이 따라옵니다. 예수님을 닮는 사랑으로 살려고 하니까 힘든 일도 만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빼앗길 수 없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값없이 아브라함과 한 약속이 먼저이고 백성답게 살도록 준 율법은 나중입니다.

값없이 전적인 은혜로 홍해를 갈라서 구원이 먼저이고 50일 후에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을 약속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아브라함과 약속한 믿음으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고 한 갈라디아교회에 대해 9절에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려고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10절에 유대인들이 지키는 절기를 지키려고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바울의 두려움은 11절의 말씀처럼 복음이 헛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몸이 많이 약했습니다.

갈리디아교인들은 바울을 천사처럼,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처럼 극진하게 대우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교인들 중에 눈이라도 빼어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 그 복음을 버리고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보니까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복음의 진리 위에 흔들림없이 서 있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4:19~5:1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그가 억성을 높이는 이유도, 그가 마음에 두려움을 갖는 것도, 그가 강한 어조로 표현한 것도 다 갈라디아교회를 사랑해서입니다.

더 나아가 복음에 대한 확신 때문입니다.

주님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안따까움으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

 

19절은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여 예수님을 닮게 하기까지 어떻게 했는가요?

해산하는 고통을 감내했습니다.

남자들은 이 고통을 알지 못하지만 바울이 가장 큰 고통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에베소교회에서도 3년 동안 눈물로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장소를 불문하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열정을 다했습니다.

우리들도 무슨일을 하든지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봅니다.

 

21절부터 5:1절까지 하갈과 사라가 자녀를 갖게 된 이야기를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여종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라는 자유자를 통해 이삭을 낳았습니다.

여종에게서 난 자식은 육체를 따라 낳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 세상의 원리에 따라 낳았습니다.

 

그러나 사라에게서 난 이삭은 약속에 따라 낳았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낳았습니다.

전적인 은혜로 낳았습니다.

인간의 원리, 인간의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로 낳았습니다.

 

하갈은 아라비아 있는 시내산과 같고,사라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율법은 시내산에 주어졌습니다.

은혜의 복음은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떡이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박해를 받은 것처럼 성령에 따라 낳은 자는 예나 지금이나 박해를 받게 됩니다.

20절입니다.

 

그런데 자유자가 어찌 종이 되려고 하느냐?

진정한 복음을 갖고 있는 자유자가 다시 종이 되랴고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무엇이 좋고,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2~15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합니다.

죄로부터 자유, 율법의 저주로부터 자유,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유입니다.

 

만약 이 자유를 버리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한다면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4절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집니다.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어집니다.

또한 은혜에서 떨어집니다.

 

성령 안에 있는 자만이 믿음을 따라 의와 소망을 갖게 됩니다.

하루에 소망, 미래에 대한 소망은 성령님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믿음의 능력을 통해서만 사랑의 능력이 나타납니다.(6)

 

이 진리를 저버리도록 한 이들이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들의 권면, 가르침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합니다.

 

지금도 사람의 생각을 권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언변의 능력으로 성도들의 마음을 빼앗는 이들이 많아 집니다.

이단이 대표적인이고, 말씀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이들도 포함됩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10절에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주신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요?

13절입니다.

자신을 위해 죄를 짓는데 자유를 사용하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하는데, 서로 섬기는데 자유를 선택하라고 합니다.

섬길 자유도 있고 섬기지 않을 자유도 있습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섬기는 것을 선택하라는 겁니다.

 

그 자유로 선택한 결과가 22~23절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로 상대방을 물어뜯는데 사용하면 어떻게 될까요?

15절입니다.

피차 멸망하게 됩니다. 그 고리를 벗어나고 길은 사랑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16~24

사람이 살아가는 행동의 기준은 두 길밖에 없습니다.

인생을 이끌어 가는 주 주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말씀이, 성령이 마음속에서 이끄는 삶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단이 정육속에 들어가 이끌는 삶입니다.

서로는 상반되어 거부하게 됩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합니다.

서로 대적합니다.

17절입니다.

 

그 열매도 각각 다릅니다.

육체를 따라 살아가면 열리는 열매들은 19~20절입니다.

성적인 죄, 종교적인 죄, 도덕적인 죄들입니다.

성적인 타락이 종교의 옷을 입고 엄청난 도덕적인 죄악을 버리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반면 성령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9가지 색깔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장의 사랑과 일맥상통합니다.

 

내 인생은 무슨 열매를 맺기 살고 있는가?

나는 무슨 열매를 맺으려고 할 때 행복했는가?

 

24절의 말씀은 제가 자주 암송하는 말씀입니다.

육체, 정욕, 탐심은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죽었습니다.

그것들과는 형제가 아닙니다.

24절의 말씀으로 무장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5:25~6:5

성령에 따라 행하면 성령이 이끄심에 순종하게 됩니다.

성령은 우리의 인생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솔로몬이 말한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성령이 강하게 막아섭니다.

그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성령이 이끄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음성에 민감하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든 일상생활을 하든 타인의 실수한 일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행동들이 나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1절입니다.

타인의 실수를 지적할 때 가져야 할 신앙적인 태도이고, 성령이 이끄심을 성도의 태도입니다.

허물을 덮어두고 오래 참고 기다릴 일도 있습니다.

여기선 지적하지 않으면 반복되고 위험에 빠질 것을 염려되는 경우입니다.

 

- 온유한 심령으로 지적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적할 때 온유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감정이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 겸손한 마음으로 지적해야 합니다.

자신은 완벽해서 실수하지 않을 것처럼 행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하고 타인의 실수도 그렇게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4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혹시 자기 스스로 자랑할 것을 있다고 할지라도 남들 앞에서 내세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타인의 실수를 지적하는 것이 시험거리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짐을 서로 지는 것입니다. 함께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으로 서로 짐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타인이 짐을 져 주니까 자기는 짐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5절에 각각 자기의 짐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짐까지 질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성경의 원리를 잘 적용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6~10

갈라디아서는 2:16절이 가장 유명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진리입니다.

루터가 이 말씀에 충격을 받은 말씀입니다.

 

이 밖에도 갈라디아서는 자유와 선택에 대한 말씀도 귀합니다.

또 하나는 성령에 따라 행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말씀입니다.

9가지의 성령의 열매에 관한 5:22~23절도 유명한 말씀입니다.

 

또 있습니다.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게 순회선교사를 잘 대접하라고 권면합니다.

6절의 말씀이 그런 의미입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이룬다는 잘못된 것을 가르치는 자가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선지자이기에 대적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잘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순회선교사를 지칭한 표현입니다.

 

7절에 신는 대로 거둡니다

심는 원리입니다.

무엇을 심어야 할까요?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데 심어야 합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행복합니다.

주는 자는 이 기쁨을 알기 때문에 기회가 되고, 여건이 되고, 상황이 되면 또 심는 것입니다.

물질이 가는 곳에 마음도 가는 것입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많은 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십니다.

 

선을 행하다고 시험을 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선을 하다가 낙심되는 일이 생깁니다.

선을 행하지 않으면 만나질 않게는 되는 낙심과 시험거리입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오늘의 말씀으로 이기셔야 합니다.

낙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받드시 거두게 됩니다.

9절의 말씀이 오늘 아침에 우리들에 준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대로 그렇게 하시는지 시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11~18

나는 누구인가?

세상에서 사는 나는 사회적인 지위나 학문, 가문, 명예로 자신을 규정합니다.

혹자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육신을 심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2:20, 6:14-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5:24절에 에수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 그리스도가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십자가만이 나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17절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확실한 주님의 소유임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스티그마란 곧 소유를 뜻하는 낙인이요 화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이나 희랍인들이 짐승들에게 화인을 찍은 것은 소유권을 분명히 하려는 조치였습니다.

예술가는 자기 작품에 낙인을 합니다.

이 작품이 내 작품이라는 인증입니다.

 

자신이 주님을 위해 당한 고난의 흔적을 가졌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웠다는 진술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예수의 흔적이라고 말한 것은 자기 몸 어디엔가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

고난의 흔적이 있다는 고백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 나오는 그의 고백을 보면, 수도 없이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돌에 맞아 기절하기도 하고, 항해를 하다 몇 차례 파선하기도 하고, 강도나 동족, 이방인에게 온갖 박해를 당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래서 고난은 유익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혔는데 따라오는 삶은 평강과 긍휼입니다.

평강과 긍휼은 관계에서 오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물질이 주는 것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만이 줄 수 있는 선물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