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11절
현실교회는 고린도교회의 단면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와 닮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고린도교회를 왜 답습하는 걸까요?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다루면서 계속해서 스스로 묻는 말입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동안 1~5장까지 파당의 문제와 음란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오늘은 세상의 법정에 소송해야 하느냐에 대한 내용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내용도 어렵지 않습니다.
읽으면 다 알 수 있습니다.
해석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현실에 적용하기에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입니다.
음란의 문제보다 현실적으로 적용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무도 많이 교회들이 고소와 고발로 상처를 입히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세상의 법정으로 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소송하지 말아야 하는 성경적인 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이런 문제를 겪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이런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뭘까요?
다툼입니다.
법대로 해야 해결될 것 같은 문제가 생겼습니다.
진위를 따질만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늘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고린도인들은 소송하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었지만 그대로 소송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1절의 다툼은 교회 안에서 벌어진 문제만을 한정하지 않습니다.
일상에서 그리스도인 사이에 이뤄지는 모든 다툼을 말합니다.
사업문제로 인한 다툼부터 폭행까지 다 포함합니다.
교회에서 판결한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으로 보아도 불가능해 보입니다.
사회에서 교인들끼리 사업상 문제로 다투다가 교회에서 판결해 주길 바란다고 한다면 난감합니다.
현실에 적용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고린도교인들은 모든 다툼을 세상의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성도 앞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불의한 자들에게 판단을 받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꼭 세상 법정을 무시하는 표현처럼 들립니다.
자신도 로마 황제의 법정에 상소했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 표현은 세상 법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법정이 불의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기 때문에 불의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정이 강조하는 정의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법정은 불의합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 재판관이 불의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재판관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보면 불의하기는 합니다.
세상 법정이 불의하니까 우리끼리 대충 알아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덮자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 재판관의 위치를 생각해야 합니다.
통치자만이 재판했습니다.
재판과 통치가 동시에 이뤄졌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통치자이며 재판관이었습니다.
재판은 통치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습니다.
재판한다는 것은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불의한 자의 통치를 받는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통치를 받는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2~3절에서 잘못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판단하는 자입니다.
세상은 욕망의 법칙을 집착합니다.
교회는 영원의 법칙 속에 있습니다.
멀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에 정치, 교육이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가장 잘 판단합니다.
어느 정도인가요?
천사도 판단해야 할 존재입니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해야 하는데, 거꾸로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구원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세상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신앙이 실천되어야 할 영역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영역에 하나님이 주되심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런데 거꾸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도리어 세상이 성도인 교회를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몰랐습니다.
바울은 세상과 교회의 관계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영원한 통치자로 불렀습니다.
교회는 주님과 함께 세상을 다스리고, 주님과 함께 재판관에 앉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의한 자들을 찾아가서 소송하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또한 그런 행위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을 잃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존심과 명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명예가 더 소중합니다.
진정한 진리가 살아 있다면 세상 법정으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문제를 덮자는 것이 아니라 상실한 은혜를 되찾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교회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를 알자고 했습니다.
선배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아버지도 목회자였습니다.
자신은 어릴 때 점심을 먹은 기억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점심때가 되면 어머니가 솥에 물을 붓고 불을 지폈다고 합니다.
굴뚝에 연기가 나도록 했다고 합니다.
목사가 굶는 것을 보여주기 싫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목사의 자존심입니다.
교회도 자존심과 명예가 있습니다.
그 명예와 저존심을 되찾아야 합니다.
교회가 자존심과 명예를 잃으면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5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단하지 못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신분적으로 약하고, 비천하고 무명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판단할만한 지혜자가 없는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부끄러운 일이 된 이유입니다.
개 교회는 제직회, 당회, 공동의회가 있지만 불의한 자들처럼 판단합니다.
총회 차원에서 제도를 마련해 놓았지만 우리끼리 해결하지 못합니다.
바울의 표현대로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판단할만한 지혜자를 찾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이런 지혜가 없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런 지혜자가 없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법으로 이기면 그 사람도 법으로 이기려고 합니다.
교회는 법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이 일상화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세상 사람과 구별되지 않은 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세상 법정으로 가지고 갈까요?
하나님의 법 앞에 나가면 손해 볼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실패한 행동입니다.
7절의 말씀처럼 뚜렷한 허물이 있게 됩니다.
영적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허물이 생겼다는 의미는 세상의 법정까지 간 것은 패배자란 표현입니다.
돌이킬 수 없는 패배자가 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어뗗게 해야 할까요?
7~8절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이 필요합니다.
두 창기가 4일 차이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한 창기가 나쁜 잠버릇으로 인해 아이를 죽게 했습니다.
아이를 죽인 엄마가 아이를 바꿔치기합니다.
서로 산 아이가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솔로몬이 양측의 이야기를 다 듣고 판결을 내립니다.
산 아이를 둘로 쪼개서 공평하게 나누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평등의 원리를 적용한 것입니다.
그때 산 아이의 진짜 엄마의 마음에 불을 붙었습니다.
자신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양보를 합니다.
솔로몬은 한 엄마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보고 판결하게 됩니다.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게 합니다.
진짜 엄마가 손해를 봅니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들에게 속아줍니다.
져주는 것입니다.
지혜는 져는 것, 속아주는 것입니다.
세상과 다른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말씀이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마태복음 5:39~4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세상 기준으로 보면 바보입니다.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당하는 쪽이 이기는 것입니다.
모함을 받는 것에 이겨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모함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큰 틀 속에서 보셔야 합니다.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는 것입니다.
9절~10절에 불의한 자들을 열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합니다.
형제들끼리 소송하는 일은 이런 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속아주고 져주는 이유는 하나님의 유업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고 그들이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받은 복이 많아서 지는 것입니다.
이미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룻과 관계를 보세요.
성령이 부어주신 것이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보다 더 큰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이 확신이, 이 믿음이 져주고, 속아주게 합니다.
허물이 없으신 예수님이 정의롭게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이 마땅한 권리를 쓰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법을 넘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단7:22절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성도들의 원한은 하나님께서 풀어주십니다.
억울한 일을 겪게 되지만 원수 갚은 일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소송으로 풀지 말고 은혜로 해결해야 합니다.
교회의 자존심과 명예를 지키는 것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적용) 차라리 속아줍시다.
형제라는 단어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형제라면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옳은 것보다 중요한 일이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차라리 속아줘라
사랑하면 속아줍니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속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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