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8:10~22절
신앙의 홀로서기는 필수과목입니다.
자녀가 홀로서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있듯이 신앙의 홀로서기에도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오늘은 신앙의 홀로서기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나만의 벧엘을 경험해야 하고, 나의 벧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홀로서기에서 보여준 신앙 여정이기도 합니다.
야곱의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의 신앙의 차이로 가족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미비는 갈등은 이삭이 에서를 좋아하는 것으로, 리브가가 야곱을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기볍게 여기는 것으로, 야곱은 장자권의 집착으로 나타났습니다.
한 가족 안에서 심리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삭은 야곱을 에서로 착각하여 축복했고, 에서는 억울한 심정으로 야곱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미비하게 시작한 갈등이 살인의 감정으로까지 커졌습니다.
결국 야곱의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야곱은 77세라는 늦은 나이에 집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살기등등한 에서 형의 눈을 피하기 위해 야곱은 집을 떠나 광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막에 거하기를 즐겼던 야곱은 쓸쓸하고 외로운 첫날 밤을 광야에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은 소망보다는 절망이, 희망보다는 짐승의 습격을 걱정해야 했습니다.
야곱은 돌을 베개로 삼고 잠을 잤습니다.
보통 여행은 봇짐을 베고 자는 것이 정상이지 않습니까?
영어 성경은 돌을 머리 아래 놓고 잤다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성경에는 “메라아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메라아샤는 무엇 무엇 곁에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머리에 베고 잔 것이라 아니라 머리 곁에 돌을 놓고 잤다는 것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사건은 사울이 물병과 창을 곁에 두다,
천사가 로뎀나무 아래 있는 엘리야 곁에 떡과 물병을 두었다 등에 쓴 단어입니다.
야곱은 두려운 밤을 보내기 위해 만약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머리 곁에 돌을 두었습니다. 짐승이나 강도나 형이 두려워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았습니다.
큰 돌을 가져다가 방패막이로 삼았습니다.
돌이나 나무 뒤에 숨어 있으면 위로가 되고 안심이 됩니다.
야곱은 돌을 의지하여 방어하면서 잠을 잤습니다.
그만큼 야곱이 두려움으로 가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려워하는 야곱에게 믿음이 생기는 여정의 시작인 것입니다.
야곱이 밤에 누워서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습니다.
보통 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하였습니다.
사닥다리는 쏠람이라는 단어입니다.
쏠람이라는 말은 사닥다리같이 딛고서 높이 올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51절에서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야곱이 본 꿈의 이야기를 합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그 사다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영원한 세계와 땅의 세계를 연결하는 사다리라고 말씀합니다.
인성과 신성이 연결된 그리스도를 사다리로 표시한 것입니다.
야곱은 꿈에서 보인 사다리의 심오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야곱은 예수님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믿습니다.
창세기 28: 13~14은 이삭이 한 축복의 말씀을 하나님이 야곱에게 공식적으로 하신 것입니다. 땅을 주겠다.
자손을 주겠다.
지상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 일이 완성될 때까지 지켜주겠다(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아직 이 복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십니다.
야곱이 이 약속을 어느 정도 믿고 있었을까요?
결혼도 못했고, 자식도 없고, 도망자 신세입니다.
복과는 전혀 다른 형편입니다.
마음에 와닿지도 않을 약속으로 들렸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중에 믿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야곱은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야곱이 믿으니까, 창세기 28:18~19의 일이 일어납니다.
자신이 몸을 숨겼던 돌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는 돌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야곱은 돌아오면 이렇게 하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3가지 요구조건을 지키신다면, 주신다면, 충족되면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3가지를 약속하니까 야곱도 3가지를 서원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조건을 말한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될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해 드리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여기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십일조의 의미는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당신을 나의 신으로 모시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서원에서 알 수 있듯이 야곱의 신앙 수준은 초보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아버지에게 들었던 하나님을 직접 만났지만 아직 나의 하나님이 되지 못하는 야곱의 얕은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곳이 야곱의 벧엘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난 장소입니다.
신앙의 홀로서기는 바로 이런 벧엘로 시작됩니다.
어떤 분은 어릴 적에, 어떤 분은 청소년기에, 어떤 분은 장년이나 노년의 때에, 어떤 분은 고난의 때에, 병상에서 야곱과 벧엘로 신앙의 홀로서기를 시작합니다.
주님을 만나게 되고, 각자의 믿음에 따라 소원도 하는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입니다.
어떤 분은 벧엘을 착각하기도 합니다.
섬김이나 봉사로 이룬 일을 벧엘로 오해하는 경우입니다.
벧엘은 업적이나 행위가 아닙니다.
벧엘은 조용히 찾아오신 하나님과 만남이며, 확신에 대한 믿음의 결단입니다.
어떤 분은 뚜렷하게, 어떤 분은 슬며시 믿어지는 은혜입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 벧엘로 올라가야 합니다.
야곱이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창세기 34장의 사건을 겪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합니다.
창세기 35:1~8의 내용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세겜성에 정착했는데, 사랑하는 딸 디나가 성에 놀러 갔다가 성주의 아들인 세겜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성의 모든 남자들을 죽이고, 성주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을 죽였습니다. 피의 복수가 있었습니다. 만약 이 소식을 가나안 땅의 족속들이 듣고 연합군을 일으켜 죽이려고 오면 야곱은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상황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다시 벧엘로 올라가면서 세 가지 행동을 취합니다.
제단을 쌓아 예배를 드립니다.
결단의 예배, 순종의 예배, 회복의 예배입니다.
이방 신상들을 버립니다.
귀고리들도 버렸습니다.
장식품은 우상을 새긴 것들이었습니다.
마치 몸에 지니고 다니면 좋다고 여기는 부적과 같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것이 정결입니다.
죄에 물든 것을 씻는 것이 정결입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듯이 새로운 마음과 태도로 출발을 결심합니다.
가나안의 연합군도 쫓아오지 않았습니다.
야곱의 일행이 안전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신 것입니다.
드디어 야곱은 벧엘에 이르게 됩니다.
모세의 벧엘은 시내산입니다.
모세는 시내산 아래 떨기나무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나오서 자신의 벧엘인 시내산에 하나님을 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벧엘은 광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타락한 이스라엘을 징계하기 전 광야를 생각합니다.
예리미야 2: 1~3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3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위한 성물 곧 그의 소산 중 첫 열매이니 그를 삼키는 자면 모두 벌을 받아 재앙이 그들에게 닥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었던 때를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으로 여겼습니다.
베드로의 벧엘은 길릴리바다입니다.
어부로 일할 때 부름을 받은 갈릴리바다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고 다시 갈릴리바다로 갔습니다.
주님은 갈릴리바다에서 베드로의 벧엘로 다시 만나셨습니다.
나의 벧엘을 어디입니까?
나의 벧엘로 다시 찾아오신 주님을 뵙습니다.
야곱은 시련과 연단을 통해 성숙한 모습으로 벧엘로 올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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